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라틴어: Spurius Carvilius Maximus Ruga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카르빌리우스(조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4년 |
전임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동기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 |
임기 | 기원전 228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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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카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버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93년과 기원전 27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1] 아그노멘인 '루가(Ruga)'는 '주름진 얼굴'을 의미한다.기원전 234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처음에 코르시카를 임비로 배정받아 그들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후 사르데냐를 통치하던 법무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가 사망하고 사르데냐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시 사르데냐로 가서 진압하고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불임이라는 이유로 이혼한 최초의 집정관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228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2번째로 집정관에 올랐다. 이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하는 고대 저자는 오직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뿐이다. 키케로는 저서 <노년에 관하여>에서 집정관 루가는 호민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데 비해 파비우스는 극력 반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폴리비오스는 플라미니우스가 호민관을 맡아서 이 법안을 제시한 시기는 기원전 232년이며, 기원전 228년에는 법무관을 맡아 농지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직후, 그는 각 라틴 부족에서 2명의 대표를 차출해 로마 시민권을 주고 칸나이에서 전사한 원로원 의원들의 공백을 그들로 채우자고 주장했다. 이는 이탈리아 동맹시들을 로마에 묶어놓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그렇게 했다간 로마 시민의 순수성과 우수한 자질을 잃게 되니 논의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고 원로원은 이에 따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211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사망할 당시 아우구르였으며,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가 아우구르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키케로의 저서 <연설가에 관하여>에 따르면,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는 이 모습에 부끄러워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이길 꺼렸다. 이에 그의 어머니가 "친애하는 스푸리우스. 당신의 모습을 보여줘라. 모두가 당신의 업적을 상기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 인물이 기원전 234년과 기원전 228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1] 일부 학자들은 두 카르빌리우스가 집정관을 역임한 년차가 40년이나 되기에 부자 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