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라틴어: Manius Otacilius Crass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조부) 가이우스 마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형제)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3년 |
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
임기 | 기원전 246년 |
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 |
동기 | 마르쿠스 파비우스 리키누스 |
후임 |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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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베네벤토 출신의 평민 집안인 오타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집안은 기원전 3세기 초 로마의 파트리키 가문인 파비우스 씨쪽과 결혼 동맹을 맺은 뒤 로마로 이주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마니우스와 가이우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261년 집정관으로서 그처럼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가 있었다.그는 기원전 263년 오타킬리우스 씨족 최초로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동료와 함께 4개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67개의 도시가 귀순했다고 하고,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52개 도시가 귀순했다고 한다. 로마군이 여세를 이어가 시라쿠사로 진군하자, 그곳의 참주인 히에로 2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두 집정관에게 로마와 동맹을 맺을 의향이 있으니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로마 측은 장차 카르타고를 상대로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을 이어가려면 시라쿠사의 협조가 필요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시라쿠사가 지불해야 할 배상금 규모는 25달란트, 100달란트, 또는 200달란트로 기록마다 다르게 서술되었다. 나중에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대가로 배상금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시라쿠사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양자가 확보한 포로를 무상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한 발레리우스가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그는 이름이 별로 거론되지 않은 것을 보면, 전쟁을 주도한 쪽은 발레리우스이고 그는 보조 역할로만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46년 마르쿠스 파비우스 리키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다시 선임된 뒤 헤렉테 산에서 농성하면서 로마군의 보급기지를 습격하고 로마에 귀순한 시칠리아 도시들을 연이어 약탈하는 하밀카르 바르카와 대결했다. 그러나 서로 소규모 접전만 치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