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라틴어: Quintus Lutatius Cerco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36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키툴루스(조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버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형제) 그나이우스 루타티우스 케르코(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41년 |
전임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동기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
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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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라티움 일대에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부유한 평민 집안인 루타티우스 씨족 출신이지만, 그가 집정관에 오르기 전에는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242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있었다.기원전 241년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엔 2차례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첫번째로, 테베레강이 폭우로 인해 범람하면서 도시의 저지대 전역이 물에 잠겼다. 그 후 도시 전역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는데, 베스타 신전 역시 화마에 휩쓸렸고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맡고있던 루키우스 메텔루스가 신전 내부로 들어가 그곳에 안장되어 있던 유물을 모두 챙겨 바깥으로 빼냈다. 그는 이 일련의 사건에 심란해져 행운의 여신을 모신 신전에 신탁을 요청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해 초, 에트루리아 남동부의 팔리스키인들이 반란을 일으켯다. 그는 동료 집정관 아티쿠스와 함께 진압에 착수해 6일만에 진압하고 15,000명을 사살했다. 이후 팔리스키인들이 가지고 있던 영토의 절반을 로마로 귀속시켰으며, 로마로 귀환한 뒤 동료 집정관과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얼마 후 형제 카툴루스가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 카르타고 당국과 평화 협상을 논의한 끝에 '루타티우스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민회에서는 장장 23년간 치른 전쟁이었는데 얻은 게 얼마 안 된다며 거부했다. 이에 원로원은 10인 위원회를 시칠리아에 파견해 재협상하게 했는데, 케르코도 이중 한 명이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재협상 요구에 즉각 응했고, 양자는 곧 합의를 이루었다.
기원전 236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으나 그 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후손은 알려진 바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73년에 마케도니아와 이집트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그나이우스 루타티우스 케르코가 그의 손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