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Appius Claudius Pulcher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안티스티아(아내)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차남)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3년 |
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동기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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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증조부이기도 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기원전 212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아피우스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차남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84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삼남 가이우스는 기원전 177년 집정관, 기원전 169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177년 집정관 가이우스의 아들이었다.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46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43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제비뽑기 결과 메텔루스가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 배정되어 켈티베리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는 이탈리아에 남았다. 하지만 군공에 목말랐던 그는 알프스산맥 부족인 살라시족을 공격했다. 초전에서는 패배했지만, 두번째 전투에서는 적병 5,000명을 사살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자기 비용을 들여서 알반 산에서 축하 예식을 거행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호민관 한 명이 축제 행렬을 막으려고 했지만 베스타 여사제였던 그의 딸이 전차에 올라탄 것을 보고 포기했다고 한다.
기원전 142년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패배했다. 기원전 136년 재차 감찰관 선거에 출마해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함께 감찰관에 당선되었고 노빌리오르로부터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되었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농지 개혁을 실시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가장 가난한 로마 시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라쿠스는 호민관 재선을 노렸다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가 이끄는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다. 아피우스 역시 몇년 안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살리 사제단의 일원이었다고 밝혔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를 당대의 명 연설가였지만 열정이 과도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안티스티아라는 아내와 결혼하여 두 아들 가이우스와 아피우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딸을 낳았다. 장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92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차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7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딸 하나는 베스타 무녀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내가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식사하던 중 자기 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제안해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서 문지방에서 그의 아내를 향해 크게 외쳤다.
"들어보시오, 안티스티아! 내가 우리 딸을 약혼시켰소!"
안티스티아는 크게 놀라며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
"왜 그렇게 서두르셨나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우리 딸의 신랑으로 삼는다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