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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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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라틴어: Gaius Laelius Sapiens
생몰년도 기원전 190년 ~ 기원전 129년 이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아버지)
대 라일라(장녀)
소 라일라(차녀)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140년
전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폼페이우스
동기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후임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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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집정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키피오 서클"의 일원으로, 제3차 포에니 전쟁과 히스파니아 전쟁에 참전했다. 훌륭한 웅변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농지 개혁을 시도했지만 귀족들이 반발하자 취소해 사피엔스(Sapien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그의 집안은 대대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을 섬기는 플레브스였다. 아버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친구를 따라 히스파니아 전선과 아프리카 전선에서 맹활약한 뒤 기원전 190년 라일리우스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올랐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나이가 같았던 그는 아버지처럼 스키피오 가문의 자제인 스키피오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우정에 대하여>에서 라일리우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키피오의 우정과 비교할 수 있는 보물은 없소. 나는 그 안에서 국가 문제에 대한 합의를 찾았고, 개인 문제에 대한 조언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안식을 찾았소. 내가 아는 한, 나는 한 번도 그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에게서 불쾌한 말을 들은 적이 없소. 우리는 한 집의 같은 테이블에서 한 끼 식사를 했소. 여행과 시골 생활도 우리에게는 일상이었소. 민중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가 여가 시간을 보낼 때, 항상 무언가를 배우고 연구하려는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에 대해 새삼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라일리우스 주변에 모인 이들로는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리우스, 스푸리우스 뭄미우스,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 등 당대의 저명한 정치인들과 그라쿠스 형제 등 로마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고, 서로에 대한 깊은 우정을 나눴다. 학계에서는 이들을 "스키피오 서클"이라 일컬으며, 수십 년간 로마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본다. 그는 아이밀리아누스처럼 젊은 시기에 포룸에 나타나지 않았고, 군대에 복무하지 않았으며, 정치 경력을 쌓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지적 추구에 집중하며 자신을 갈고 닦았다.

그는 법학과 철학을 전력으로 탐구했다. 젊은 시절 스토아 학파 인사인 셀레우키아의 디오게네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기원전 155년 3명의 플라톤 아카테미 학자인 카르네아데스, 크리톨라오스, 디오게네스가 로마에 방문했을 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리우스와 함께 이들의 강의를 적극적으로 청취했다. 나중에 스토아 학자 로도스의 파나이티오스는 스키피오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한편, 그는 문학가들과도 교류했다. 고대 로마의 희극작가이자 시인인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와 긴밀하게 교류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아페르의 작품에 자신과 스키피오의 단편을 삽입했다고 한다. 한 번은 스키피오와 라일리우스가 연극을 집필한 뒤 아페르에게 공연을 맡겨놓고 자신들은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페르는 이 소문을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홍보용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희극 "형제들"의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그 소문이 매우 즐겁소. 로마의 가장 인기있는 사람들이 내 연극을 좋아한다는 것을 밝혀주기 때문이오!"

또한 라일리우스는 시인 가이우스 루킬리우스와도 친분을 맺었다. 루킬리우스는 스키피오와 그의 이름을 담은 다음의 시를 짓기도 했다.
고고한 스키피오와 현자 라일리우스가
민중과 업무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은퇴했네.
그들은 종종 손님들과 농담하고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네.
한편, 그들은 식사를 위해 야채를 준비했네.

그러던 기원전 151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 방면 로마군에 입대하면서 비로소 경력을 시작했다. 라일리우스 역시 그와 함께 히스파니아에 가서 군사 대대장으로서 바카이족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 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을 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라일리우스는 즉시 아프리카 전선에 뛰어들었다. 기원전 147년 아이밀리아누스가 집정관이 되었을 때, 그는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가 되었다. 그는 누미디아 국왕 굴루사와 함께 네페리스 요새를 공격해 함락에 성공했다. 기원전 146년 봄 카르타고 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항구에 침입했다. 다음 6일 동안 비르사 성채에 대한 공세를 벌인 끝에 함락시켰고, 도시는 함락되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라일리우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고, 라일리우스는 기원전 145년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법무관으로서 법정에 정기적으로 출두해 변호사를 맡으면서 훌륭한 연설을 했다. 키케로는 그의 연설은 짧지만 화려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연설로부터 즐거움을 얻었고, 신성한 문제에 대해 이보다 더 숭고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호평했다. 다만 그는 라일리우스가 고대 그리스 웅변가들의 방식을 너무 선호해서 시대에 맞지 않은 표현이 많이 첨가되었고 미숙한 점이 여럿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의 최고의 연설은 친구의 어떤 연설보다 낫지 않다"고 비평했다. 또, 그의 연설은 청중들을 감동시키는 힘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실스크 숲의 타르 세입자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라일리우스는 훌륭하고 우아하며 신중하게 준비된 연설을 두 번 수행해 피고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지만, 집정관은 이를 묵살하고 조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라일리우스는 피고인에게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에게 변호를 부탁하라고 권했다. 갈바는 별다른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혀 망설이지 않고 변호를 맡았다. 그는 법정에 있는 집정관이 다른 업무를 봐야해서 가봐야 한다는 말을 하는 그 순간까지 연설했다. 이후 집정관이 떠나자 연설을 재차 이어가 "각 부분이 방청객의 박수 소리로 끝날 정도로 강하고 인상적으로" 연설했다. 그날 피고인은 모든 배심원의 동의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그는 민회에서 사제단의 일원을 선출할 것을 제안한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법안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사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파트리키의 혈통을 보존하는 사제단의 전통적인 인원 보충 방식을 옹호했다. 크라수스는 민회가 주로 열리는 코미티움에서 포로 로마노로 민중을 끌고 나온 뒤 자신의 법의 정당성을 설파했지만, 당해 집정관들과 원로원, 라일리우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기원전 144년,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에 부임했다. 전임 총독 클라우디우스 우니마누스는 루시타니아 전쟁을 이끄는 비리아투스와의 전투에서 거의 모든 병력을 상실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라일리우스는 자신의 지방에서 루시타니아인들을 격파해 로마인들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다른 고대 기록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키케로가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후 그의 뒤를 이어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에 부임한 가이우스 니기디우스는 비리아투스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기원전 142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자신의 선거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 퀸투스 폼페이우스가 돌연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뒤 사전에 포섭해둔 투표자들의 표를 확보하여 집정관에 당선되는 바람에 낙선했다. 그 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라일리우스와 연대하여 폼페이우스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기원전 140년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이탈리아의 자작농들이 심각한 부채에 시달리다 자기 땅을 대지주에게 넘기고 도시로 몰려오면서 빈민이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농지 개혁을 단행하려 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고자 뜸을 들이는 사이 개혁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고, 귀족들이 대거 반대했다. 그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이들의 거센 저항에 전면 대결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보고 농지 개혁을 포기했다. 이에 귀족들은 만족을 표하며 그에게 "사피엔스(Sapiens: 현명한 자)"라는 별칭을 붙였다.

기원전 137년,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4만 병력을 이끌고 누만티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4,000명의 수비대에게 연이어 패하여 절반을 잃어버렸고, 급기야 적군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만키누스는 당시 재무관으로서 종군 중이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적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그라쿠스는 아버지 대 그라쿠스가 누만티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걸 잘 활용해 그들과 협상한 끝에 2만 병사들을 온전히 빠져나오게 하는 대가로 누만티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공물을 바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로마 정계는 이민족의 아량으로 풀려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라일리우스 등은 만키누스, 그라쿠스를 비롯한 장수들을 고발했다. 그라쿠스와 다른 부관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만키누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협약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원로원의 의지로 누만티아에 알몸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누만티아인들은 로마의 배신을 한 사람에게만 물 수 없다며 만키누스를 되돌려보냈다. 훗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누만티아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출정했을 때 그가 함께 갔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 전선에 있을 때,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스키피오의 여러 경쟁자 및 정적들과 동맹을 맺고 라일리우스가 지난날 포기했던 농지 개혁을 단행했다. 라일리우스는 처음에는 그라쿠스를 지원했지만, 그라쿠스가 자신에게 반대한 동료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연단에서 쫓아내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반감을 품고 그라쿠스의 반대자들에 가담했다. 기원전 132년 그라쿠스가 피살당한 뒤, 그는 그라쿠스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원로원이 구성한 비상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그라쿠스 추종자였던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호민관의 재선을 합법화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지지자들을 총동원해 민회에서 이 제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았다. 기원전 129년 아이밀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세간에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누이 셈프로니아 또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암살을 사주했다는 등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그 중에는 라일리우스가 아이밀리아누스를 죽였거나 아이밀리아누스가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이 소문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이런 식으로 스키피오 가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아이밀리아누스에 대한 추도문을 쓴 것을 끝으로, 그의 행적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를 들인 뒤 평생 동안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내의 성함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두 딸 대 라일라, 소 라일라가 태어났다. 대 라일라는 기원전 117년 집정관인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와 결혼했으며, 소 라일라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인 가이우스 판니우스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