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판니우스 라틴어: Gaius Fann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판니우스(조부?) 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아버지 또는 삼촌) 마르쿠스 판니우스(아버지 또는 삼촌) 라일리아(아내)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2년 |
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후임 |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노빌레스 가문인 판니우스 씨족 출신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그의 조부와 아버지의 신상 명세가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가족 관계가 불분명하다. 기원전 180년대 호민관을 맡았던 가이우스 판니우스가 그의 조부일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으며, 기원전 161년 집정관 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와 기원전 144년 화폐 주조관 마르쿠스 판니우스 중 누가 그의 아버지인지도 불명하지 않다.그는 어릴 때부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수행원에 속했으며,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스푸리우스 뭄미우스, 마니우스 마닐리우스와 친분이 두터웠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당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휘하 레가투스를 맡았다. 플루타르코스가 인용한 그 자신의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함락될 때 처음으로 성벽 위에 오른 대 그라쿠스의 뒤를 이어 성벽을 넘었다고 한다.
기원전 142년 호민관을 맡았으며, 이 해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의 딸인 라일리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141~140년에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 휘하에 들어가 루시타니아 전쟁에 참여했다. 비리아투스가 로마 진영을 습격했을 때, 많은 군단병들이 싸우고 싶지 않아 천막에 숨은 와중에도 몸소 앞장서서 맞서 싸워 적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모종의 시기[1] 법무관을 맡은 그는 유대 왕국의 제사장이자 국왕인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파견한 사절단과 협상해 로마와 유대와의 동맹을 갱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세기 독일의 고전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30년과 129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고 한다. 기원전 122년에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는데, 원로원에 대항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려 노력한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그를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당시 동료 집정관 아헤노바르부스가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에서 켈트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서, 그는 로마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라쿠스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원로원의 편을 들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제시한 여러 법안에 관한 표결이 진행되기 전날, 그는 투표가 조작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며 모든 이탈리아인을 로마에서 일시적으로 쫓아내라고 지시했다. 이는 그라쿠스의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행보였다. 또한 그라쿠스의 계획 중에 가장 중요한 법안은 모든 라틴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모든 동맹시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에 대해 로마인들에게 아래의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정말로 라틴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뒤에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여기 민회에서도 계속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아니면 모든 게임과 오락에서 지금과 같은 자리를 계속 차지할 것이라 생각하오? 그들이 모든 자리를 채울 거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요?"
결국 법안 표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추종자들이 원로원 최종 권고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후의 행적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대 카토를 본받아 로마의 역사를 라틴어로 담은 <연대기>를 집필했다. 이 연대기는 아이네이아스가 이탈리아에 상륙하는 것에서 시작해 그의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여러 작가들의 글에 파편적으로 인용되었다. 살아남은 단편 중 하나에서, 그는 역사가에게 정치 활동 경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활동적인 삶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면, 현재는 긍정적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이 나중에는 부정적인 것으로 바뀌고, 많은 것들이 이전에 보였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의 작품이 전혀 평범하게 쓰여지지 않았으며,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품위가 느껴진다고 평했다. 그러나 키케로의 친구인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는 그를 지루한 역사가 중 한 명이라고 비평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그의 진실성을 높이 평가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그의 연대기를 인용한 부분이 여럿 실렸다.
[1]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32년일 거라 추정하거 또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26년이라 추정하지만, 어느 쪽는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