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라틴어: Marcus Popillius Laena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버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9년 |
전임 |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동기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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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씨족인 포필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아버지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기원전 17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사촌으로 기원전 132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있었다.기원전 154년 로마의 동맹이었던 마실리아인들이 리구리아인들의 거듭된 침략으로 인해 곤경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자, 민회는 그와 플라미니우스, 루키우스 푸피우스를 리구리아인들에게 보내 상황을 조사하고 "야만인들이 그들의 죄를 바로잡도록 권고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리구리아인들은 사절들이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공격했고, 플라미니우스가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로마와 리구리아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146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아카이아 동맹에 로마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 그를 여러 사절과 함께 코린토스로 보냈다.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은 사절단을 내쫓았고, 결국 아카이아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코린토스는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아카이아 동맹을 비롯한 그리스 전역이 로마에 복속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42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39년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해 누만티아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가 부임하기 전, 누만티아인들과 전쟁을 치르던 퀸투스 폼페이우스는 추위, 질병, 연이은 패배로 인해 막심한 손실을 입어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자, 원로원이 자신을 소환하여 책임을 물을 걸 두려워해 누만티아인들과 협상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비밀리에 인질을 돌려줄 테니 30달란트만 지불하라고 요청했다. 누만티아인들은 로마가 이를 받아들일지 의문을 품고,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가 항복했다고 선전하며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래서 누만티아인들이 항복했다고 여긴 라이나스가 누만티아에 접근하여 "항복했으니 무기를 반납하라"고 요구하자, 누만티아인들은 "전임 사령관이 맺은 협약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라이나스는 폼페이우스에게는 누만티아인들이 무조건 항복했다고 전해들었는데 정작 누만티아인들이 '전임 사령관과 맺은 협약'을 운운하자 깜짝 놀랐고, 아직 히스파니아에 남아있던 폼페이우스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은 누만티아인들에게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누만티아인들이 보낸 사절은 이에 대응해 폼페이우스와 합의를 이뤘을 때 동석했던 트리부누스 밀리툼과 레가투스들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라이나스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골머리를 앓은 끝에 폼페이우스와 누만티아 사절을 로마로 보내 원로원 앞에서 증언하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자신이 아무런 양보나 보증을 하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누만티아 사절은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를 논리적으로 밝혔다. 이에 원로원 내 수많은 인사들은 폼페이우스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속였다고 규탄하며 그를 누만티아인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는 전임자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군대를 자신에게 넘겨주기 위해 모든 병사를 동원 해제하고 식량이 있는 창고를 약탈했으며, 심지어 군비를 유용했다며 책임을 떠넘기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누만티아인과의 합의를 무효로 규정했다.
이 무렵, 먼 히스파니아 총독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압박을 받고 있던 루시타니아의 지도자 비리아투스가 그에게 평화를 맺자고 요청했다. 그는 먼저 탈영병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고, 비리아투스는 즉시 받아들였다. 이후 라이나스는 모든 무기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기원전 150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무기를 모조리 회수한 뒤 동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것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던 비리아투스가 거부하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
기원전 138년 봄, 라이나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누만티아를 정벌하라는 지시를 받고 누만티아를 포위했다. 프론티누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는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못했다. 이에 함정을 의심한 라이나스가 퇴각을 명령했다. 로마군이 지시에 따라 등을 돌리고 사다리를 타고 도로 내려가려 할 때, 누만티아인들이 돌연 나타나 그들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은 큰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고 한다. 이후 라이나스는 켈티베리아족에 속한 루손 부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137년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에게 임페리움을 넘겨주고 로마로 돌아왔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