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Lucius Valerius Flacc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40년 ~ 기원전 18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조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버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형) 가이우스 푸블리우스 플라쿠스(동생) 발레리아(누이?)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5년 |
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대 카토 |
후임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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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의 집정관, 감찰관. 일개 평민에 불과했던 대 카토가 로마 정계에서 맹활약하여 집정관과 감찰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후원한 인물이다.2. 생애
고대 로마 최고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발레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61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27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15년 로마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차남 루키우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며, 막내 가이우스 플라쿠스는 미성년일 때 유피테르 신전의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183년 법무관을 역임했다.[1]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204년 4월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의 딸이자 루키우스의 누이인 발레리아가 프리지아에서 위대한 여신의 화신으로 알려진 신성한 돌을 가지고 로마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딸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확신할 수 없다.기원전 210년경, 그는 투스쿨룸의 평민 출신인 대 카토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토의 토지는 루키우스가 운영하는 토지와 가까이 있었기에 두 사람이 종종 만나곤 했다. 루키우스는 카토의 좋은 기질과 절제, 일에 대한 사랑 및 정직함을 마음에 들어해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나중에는 로마로 이주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당시 대 카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선인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 바르카와 대치하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고 있었는데 한가하게 농사를 지으며 루키우스와 이야기를 나눌 틈이 있을 리 없다며, 루키우스가 군영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그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클리엔테스로 발탁했을 거라 추정한다. 물론 복무를 마치고 나서 남는 시간에 카토와 발레리우스가 고향에서 교분을 나눴을 가능성은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후대의 둘의 교분 이야기만 듣고 선후관계를 착각해서 쓴 것일 수도 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기원전 201년, 그는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함께 조영관에 선임되었다. 그들은 웅장한 검투 경기 및 서커스를 조직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수많은 곡물을 시민들에게 싼 가격에 나눠줬다. 이리하여 인기를 끌어모은 그는 기원전 200년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법무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다. 당시 갈리아인들은 카르타고인 하밀카르를 사령관으로 세우고 플라켄티아를 공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크레모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푸르푸레오는 이들과 결전을 벌여 승리했는데, 그는 기병대를 이끌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35,000명의 갈리아인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하밀카르는 전사했다고 한다. 기원전 199년 시칠리아 총독에 부임해 3년간 통치를 행사했으며, 대 카토가 법무관에 선임될 수 있도록 도왔다.
기원전 195년 집정관 선거에 카토와 함께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가 집정관을 맡았을 무렵, 로마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 긴축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오피우스 법(Lex Oppia)의 존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법은 여성들이 1/2 온스 이상의 금제 장신구를 소유하거나, 다채로운 색상의 옷을 입거나, 종교적 축제가 열리는 때를 제외하고 도시에서나 도시로부터 1마일 이내에서 마차를 타는 것을 금지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나 법의 존속은 불필요해 보였고, 여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 법의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대 카토는 사치를 부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오피우스 법의 폐지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가 어떤 입장을 표명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뮌처는 오피우스 법 폐지를 처음 주장한 이 중 한 명이 발레리우스 씨족에서 역사에 등장하는 첫번째 평민 방계 출신인 호민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타포네스라는 점에 주목해, 루키우스가 그에게 오피우스 법을 폐지를 건의하라고 은밀히 의뢰했을 거라 추정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오피우스 법은 카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지되었다.
그 후 카토가 히스파니아 속주로 출진해 로마에 반기를 든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가서 보이 족과 맞섰다. 그는 전쟁으로 파괴된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를 복원하고 총독의 권한으로 이듬해까지 이 속주에 머물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기원전 195년과 194년에 리타나 숲 인근과 메디올라눔 인근에서 보이족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기술했지만, 카토가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그는 개선식을 거행하지 못한 것을 볼 때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을 맡고 있던 기원전 195년 말에 로마에 방문해 행정관 선거를 조직했다. 그 결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집정관이 되었고, 스키피오의 부관 3명과 클리엔테스 1명이 법무관이 되었다.
기원전 191년, 당해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2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카토와 함께 레가투스로 참여했고,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등 스키피오의 추종자들도 레가투스로 가세했다. 글라브리오의 군대는 많은 테살리아 도시를 공략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인들은 테르모필레 협곡을 장악하고 로마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글라브리오는 적 주변에 2개의 분견대를 파견했다. 하나는 카토가 지휘했고 다른 하나는 루키우스가 지휘했다. 카토가 적의 배후에 있던 고지를 공략하고 적을 습격해 승리에 결정적으로 일조하는 동안, 그는 길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로마군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연합군을 물리친 후 헤라클레아 시를 포위했을 때, 글라브리오는 그에게 공성군 하나를 맡겨 성을 공략하게 했다.
이 도시가 함락된 후 아이톨리아 동맹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하자, 글라브리오는 그에게 직접 아이톨리아인들과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아이톨리아인들에게 과거의 공로와 이전에 존재했던 연합에 호소하지 말고 자신의 죄를 깨끗이 인정하고 자비를 구하라고 조언해, 아이톨리아인들이 어느정도 관대한 평화 조건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는 친척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기원전 211년 아이톨리아 동맹과 최초의 우호 협약을 맺은 이래 이들을 자신의 클리엔테스라 여긴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90년 초 글라브리오, 카토와 함께 로마로 돌아온 그는 복원된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에 시민들을 정착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집정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는 새로 정복한 보이족의 영역에 2개의 새로운 식민도시를 세우기로 했지만, 위원회는 기원전 189년 해산될 때까지 단 하나의 도시만 건설할 수 있었다.
기원전 189년, 그는 카토와 함께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엔 그들 말고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그리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출마했다. 이 중 최근에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글라브리오가 당선될 확률이 가장 높아보였다. 이때 카토가 전 사령관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횡령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두 명의 호민관이 글라브리오를 재판에 회부했고, 카토는 증인석에 서서 자신이 그리스에서 본 금은 그릇 중 일부가 개선식이 벌어지는 동안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글라브리오는 카토를 위증 혐의로 고발했지만 곧 감찰관 입후보를 취소했고, 카토에 대한 고발 역시 취소되었다. 그러나 사령관으로 모셨던 이를 가차없이 고발한 카토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이 커졌다. 결국 루키우스와 카토는 당해 감찰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당선되었다.
기원전 186년 로마 시내에 바커스를 모시는 비밀 의례인 바카날리아에 가담한 수천 명의 여인과 청년들이 온갖 음란한 행위를 일삼고 유언장과 인장을 위조하며, 중상 모략을 일삼고, 친척을 중독시키거나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가 원로원에 올라왔다. 이에 원로원은 당해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게 바커스 신도들을 모조리 체포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를 구금하도록 일임하는 결의문을 체택했는데, 그는 두 번째로 결의문에 서명했다.
기원전 184년, 루키우스와 카토는 감찰관 선거에 재출마했다. 당시 카토는 매우 급진적인 정치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상대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온건한 감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카토는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약간의 유연성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고 연단에서 악에 빠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도시에 대 정화가 필요하다고 외쳤으며, 로마인들이 건전한 정신을 되찾고 싶다면 가장 신중하지는 않지만 가장 단호한 사람인 자신과 플라쿠스를 감찰관으로 세워야 한다며, 그러면 자신이 '사치'와 '타락'이라는 이름의 히드라의 머리를 베고 플라쿠스가 히드라의 상처를 불러 지버리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카토는 투표일이 열리기 전에 호민관 퀸투스 네비우스를 설득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반역죄로 고발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 때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았고, 그 대가로 포로로 잡은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을 몸값을 받지 않고 풀어주고 안티오코스 3세에게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재판에 참석하길 거부하고 자신의 영지인 리테르눔으로 낙향했고 그곳에서 기원전 183년에 사망했다. 동생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이 여파로 감찰관 선거에서 낙선했다. 이렇듯 정치적 술수를 구사한 결과, 카토와 루키우스는 감찰관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 후 카토가 감찰관으로서 사치 풍조를 타파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는 동안, 그는 뒷배가 되어줄 뿐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카토 덕분에 프린켑스 세나투스가 되었고, 댐을 건설하여 포르미아로 이어지는 수로가 형성되게 했다. 기원전 180년, 루키우스는 전염병에 걸려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5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이후 집정관이 된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들은 전부 그의 후손이었다.
[1] 다만 플라멘 디알리스는 평생 말을 탈 수 없고 로마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속주로 출장가야 하는 일반 법무관이 아니라 로마 시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법무관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