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라틴어: Servius Sulpicius Galba | |
생몰년도 | 기원전 159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증조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조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버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동생)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8년 |
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동기 |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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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술피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씨족은 기원전 500년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른 이래 여러 집정관과 집정 무관을 배출했다. 이중 갈바 지파는 2차 포에니 전쟁 이래로 술피키우스 씨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가문으로 성장했다. 증조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는 기원전 211년과 기원전 200년에 집정관을 맡아 필리포스 5세의 일리리아 침공을 잘 막아냈다. 조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기원전 187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집정관 선거에 4번이나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아버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당대 저명한 웅변가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기원전 150년 먼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았을 때 루시타니아인들에게 정착할 땅을 나눠주겠다고 속이고 함정으로 유인해 몰살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질러 루시타니아 전쟁을 유발했기에 세간의 지탄을 받았다. 급기야 기원전 149년 호민관 루키우스 스키보니우스 리보는 노예로 팔린 루시타니아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갈바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원로원의 거두 대 카토가 갈바를 성토하는 연설을 하면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갈바는 호민관 리보의 법안에 대한 투표일에 두 어린 아들과 조카를 사람들 앞에 데려와서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로마를 위해 애썼건만 이제 야만인들을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게 되었소. 나는 이 수치를 견딜 수 없어 유언장을 작성해두고 죽음을 맞이하려 하니, 부디 이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시오."
그 말을 들은 민중은 눈물을 흘렸고, 리보의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를 소개한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갈바가 데려온 아이들이 10살을 넘기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른다면, 갈바의 아들이자 이 문서의 주인공 세르비우스는 기원전 159년경에 출생했을 것이다. 동생으로 토지 분할을 수행하는 위원회의 일원을 받았다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된 혐의로 추방당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있었다.
기원전 111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먼 히스파니아 속주를 통치했다. 전임자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는 현지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던 도중에 전사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아버지 갈바가 히스파니아에서 보인 잔인한 모습을 아들 갈바 역시 보여줘서 히스파니아 부족들이 로마 총독을 살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길 바라는 원로원의 의중이 담겨 있다고 추정한다. 그가 히스파니아에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로마로 돌아온 직후 얼마 안가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므로 총독으로서 직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것이다.
기원전 108년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호르텐시우스는 당선 직후 유권자들을 매수한 혐의로 고발당한 뒤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당선되어 그와 함께 직임을 수행했다. 그가 집정관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 모인 귀족 무리에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이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