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라틴어: Quintus Minucius Therm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88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트라키아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조부)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아버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3년 |
전임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
후임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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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305년 티베리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이래 여러 차례 집정관을 역임한 평민 씨족인 미누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루키우스와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 그는 기원전 202년 아프리카 원정을 수행하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 대대장을 맡았다. 카르타고에서 한니발 바르카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던 수송 부대를 습격해 4천 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4천 명을 포로로 잡는 공적을 세웠으며,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의 명령에 따라 분견대를 이끌고 전투력이 뛰어난 적 정예병에 의해 붕괴 위기에 몰린 좌익 부대를 구원해 승리에 일조했다.기원전 201년 로마로 돌아가서 호민관에 선출되었다.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스키피오를 밀어내고 자기가 아프리카 원정군 사령관이 되려 하자, 그는 동료 호민관 마니우스 악킬리우스 글라브리오와 함께 이를 저지했다. 기원전 198년 조영관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197년 캄파니아 일대의 푸테올리, 볼트룸, 살레르노, 부센툼 등 식민도시들에 로마인들을 이주시키는 사업을 담당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96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파견되었다. 그의 전임자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는 지역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참패해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었다. 그는 1개 로마 군단과 속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 9천 명으로 병력을 보충한 뒤 투르다 시 인근에서 부다르가 이끄는 부족민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부다르가 생포되었고 12,000명의 히스파니아인들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195년 로마로 돌아온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9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리구리아인과의 전쟁에 착수했지만, 숙영지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식량 부족에 시달리거나 협곡을 통과하던 중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타격을 입는 등 많은 곤경에 처했다. 기원전 192년 전임 집정관의 자격으로 리구리아인들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기원전 191년까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신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로마로 귀환했다.
로마에 돌아온 그는 원로원에게 두번째 개선식을 요구했고, 아이톨리아 원정에서 막 돌아온 글라브리오도 개선식을 요구했다. 원로원은 두 사람의 요청을 검토한 뒤 글라브리오에겐 개선식을 허락했지만 미누키우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 카토는 미누키우스가 뚜렷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으면서 거짓으로 승리 보고를 했다고 비난하는 연설을 했는데, 오늘날 이 연설이 후대 저자들의 인용문을 통해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189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평화 협상을 하기 위해 동방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아파메이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만나 협약을 맺은 뒤, 신임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의 갈라티아 원정에 동행했다. 기원전 188년 만리우스가 갈라티아 원정에서 확대한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트라키아를 지나갈 때 동행했다가 전리품의 규모에 유혹을 받은 트라키아 부족들의 습격으로 전사했다.
아들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는 기원전 182년과 178년에 레가투스를 맡았고, 기원전 154년 이집트 사절로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