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라틴어: Publius Licinius Crass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조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아버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형제) 리키니아(누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아게라스투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1년 |
전임 |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리구스 |
동기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후임 |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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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는 기원전 236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는 기원전 208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168년 집정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있었고, 누이로 기원전 17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아내 리키니아가 있었다.기원전 176년 법무관에 선임되었고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를 임지로 부여받았지만, 플라멘 신분이기 때문에 로마를 떠날 수 없다며 그곳에 가기를 거부했다. 기원전 171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제비뽑기 결과, 그가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와 맞서게 되었다. 크라수스는 2개 군단병과 비슷한 숫자의 동맹군을 이끌고 브룬디시움에서 아폴로니아로 건너간 후 에페이로스와 아타마니아를 거쳐 테살리아로 진군해, 페르가몬 왕국의 국왕 에우메네스 2세의 동맹군과 합류했다.
한편, 페르세우스는 40,000명의 보병, 4,000명의 기병을 소집했으며, 오드뤼사이 왕국의 국왕 코티스에게도 지원군을 받아냈다. 그 후 로마에 넘어간 테살리아 북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크라수스는 일리리아 해안에서 산간 지대를 거쳐 테살리아로 행진했다. 양측은 테살리아의 칼리니코스에서 조우했고, 각자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대치했다. 페르세우스는 숙영지를 건설하고 하루 동안 푹 쉰 뒤 테살리아 남부의 페라이를 습격해 농경지를 약탈함으로써 로마군이 숙영지에서 나와서 전투를 벌이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나오지 않자 분견대를 로마 진영 인근에 접근시켰다. 로마군은 경무장 부대를 파견해 이들과 교전하면서도 여전히 숙영지에 가만히 있었다.
그 후 페르세우스는 며칠 동안 똑같은 시각에 들판으로 나와서 회전을 요구했고, 크라수스가 받아들이지 않자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로마 기병대가 말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들판에 풀어놓은 아침에 느닥없이 기병과 경보병대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크라수스는 급히 기병대를 소집하여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마케도니아군에 소속된 투석병과 투창병 400명은 페르세우스의 지시에 따라 적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던지며 도발했다. 그 후 코티스가 보내준 트라키아 기병대가 좌익에서 이탈리아 기병대를 향해 돌격했고, 페르세우스는 중앙과 우익의 크레타 경보병대와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와 그리스 기병대 및 경보병대를 공격했다. 트라키아 기병들의 압도적인 전투력과 승마술을 당해내지 못한 이탈리아 기병대는 혼란에 빠진 끝에 얼마 못 버티고 패주했고, 로마 및 그리스 부대 역시 갑작스러운 적 공격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퇴각했다.
이때 예비군으로 남아있던 테살리아 기병대가 에우메네스 2세의 페르가몬 군대와 함께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도주하는 로마 및 이탈리아 기병대를 엄호해 그들이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 이후 경보병대까지 구하기 위해 전진하자, 페르세우스는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진영에 대기중이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투입하려 했지만, 크레타인 사령관 에우안다르가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말고 물러나라고 권하자 이에 따라 군대를 숙영지로 되돌리기로 했다. 이날 로마군은 기병 200명과 경보병 2,000명을 상실했는데, 그중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마케도니아군의 손실은 기병 20명, 보병 40명에 불과했다.
칼리니코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크라수스는 수로를 지키기 위해 반대편 강둑으로 숙영지를 옮기자는 에우메네스 2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페르세우스는 전투를 벌이기 위해 평원에 나왔지만 적 진영이 옮겨진 것을 보고 자신이 사전에 적이 이동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해 야습을 가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크라수스는 패배의 원인이 전투 초반에 제대로 싸우지 않고 붕괴된 아이톨리아 부대에 있다고 여기고 가장 먼저 도망친 것으로 간주된 아이톨리아 장교 5명을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다. 반면 예비군으로서 전선을 형성해 아군을 지켜준 테살리아인들에게 큰 보상을 해줬다. 페르세우스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크라수스는 로마에 항복하는 게 아닌 한 협상을 논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페르세우스는 막대한 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협상에 임하도록 유도해봤지만 크라수스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이에 시큐리움으로 철수한 뒤 로마군의 동태를 살폈다.
로마군 장병들이 자기들 곡식을 수확한 뒤 남을 짚을 진영 앞에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페르세우스는 야간에 습격을 가해서 그 짚에 불을 지른다면 로마군 숙영지를 불태워서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야간 기습이 도중에 발각되자 철수했고, 로마인들은 이를 추격해 마케도니아 병사 수십 명을 사살하거나 사로잡았다. 그 후 로마군은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라리사 남동쪽의 크라논으로 이동했다. 페르세우스는 로마군 진영이 내려다봬이는 언덕에 기병과 경보병대를 배치시켜서 적을 도발해봤지만, 로마군이 꿈쩍하지 않자 시큐리움으로 철수했다. 로마군이 뒤이어 팔라나로 이동한 뒤 곡식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다수의 병사를 사방에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때를 틈타 적을 습격하기로 했다.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군은 기병 1,000명과 트라키아 및 크라타 경보병 2,000명을 이끌고 적 수송부대를 습격해 1,000대의 수레와 600명의 적병을 사로잡았다. 뒤이어 로마병 800명으로 구성된 분대를 공격했다. 이들은 언덕으로 올라가서 방패벽을 세워서 원거리 무기를 막을 준비를 갖춘 후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마케도니아군은 언덕을 포위했지만 적의 방비가 강해서 언덕을 올라가기 힘들자 새로 발명된 무기인 케스트로펜돈(κεστροσψνδόνη)을 활용해 적의 방진을 흐트러놓으려 했다. 이 신무기의 공격을 받은 로마군은 많은 사상자를 입고 기력이 쇠약해졌고, 페르세우스는 항복하라고 거듭 요구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크라수스는 누미디아 기병과 전투 코끼리를 포함한 경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서둘러 달려왔고, 로마 군단병들이 그 뒤를 따라왔다.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 중보병대를 서둘러 소집했지만 그들이 제때에 팔랑크스 진형을 갖추기 전에 로마군이 공격을 가했다. 이에 마케도니아군은 퇴각했고,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보병 300명과 기병 24명, 적장 한 명을 사살하고 많은 중보병을 생포했다.
그 후 페르세우스는 테살리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진입하는 진군로가 지나가는 템페 계곡의 입구인 고누스에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한 뒤 마케도니아로 철수했다. 크라수스는 마케도니아군이 테살리아로 재차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누스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자 말로나와 트리폴리스를 포함한 여러 마을을 점거하고 라리사로 귀환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70년 초, 그는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거둔 전공이 별로 없는 것을 만회하고자 보이오티아의 여러 도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수많은 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에 격분한 그리스인들은 페르세우스를 자신들을 지킬 수호자로 여겼고, 많은 이가 마케도니아로 넘어갔다. 여기에 에페이로스 연맹도 로마의 통제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고 여기고 마케도니아 왕의 편에 섰다. 이후 기원전 170년 집정관으로서 현지 사령관으로 부임한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167년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2세와 갈라티아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아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아게라스투스는 기원전 127년 또는 126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