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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가몬 왕국 5대 군주 Ἄτταλος Β΄ | 아탈로스 2세 | ||
제호 | 한국어 | 아탈로스 2세 |
그리스어 | Ἄτταλος Β΄ | |
영어 | Attalus II | |
존호 | 바실레프스 | |
생몰 년도 | 기원전 220년 ~ 기원전 138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58년 ~ 기원전 1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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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가몬 왕국 5대 군주. 형 에우메네스 2세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즉위 후 페르가몬의 문화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2. 생애
기원전 220년 아탈로스 1세와 아폴로니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에우메네스 2세, 동생으로 필레타이로스, 아테나이오스가 있었다. 그는 기원전 197년 왕위에 오른 형의 믿음직한 조언자이자 외교관으로서 맹활약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로마 공화국의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형의 뜻에 따라 로마로 가서 여러 원로원 중진들과 인맥을 쌓고 로마의 여론이 페르가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안티오코스 3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군이 헬레스폰트를 건너와 그리스를 집어삼키려 하니 속히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로마는 이 덕분에 안티오코스 3세에 대비해 준비를 착실히 해둘 수 있었고, 에우메네스 2세와 아탈로스 2세에게 동맹자로서 신의를 지켜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이후 형이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로마군과 함께 싸우는 동안, 그는 페르가몬으로 돌아와 국정을 관리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셀레우코스 4세가 페르가몬을 공격해오자, 그는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페르가몬 성채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셀레우코스 4세는 페르가몬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고전하다가 로마군이 소아시아로 넘어가자 부친의 명령을 따라 철수하여 본대와 합류했다. 기원전 190년 12월에 벌어진 마그네시아 전투에 참가한 아탈로스는 2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전투에서 맹활약해 로마-페르가몬 연합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88년 아파메아 조약을 체결하고 헬레스폰트에서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소아시아 일대를 포기했다. 원로원은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리카오니아 전체, 프리기아, 무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시필루스, 카리아 지방, 마이안드로스 강 유역에 걸치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옛 소아시아 영토를 페르가몬 왕국에 대부분 넘겼다. 이로서 페르가몬 왕국은 소아시아 최강국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이끄는 로마군이 갈라티아로 쳐들어가자, 그는 남동생 아테나이오스와 함께 보병 1,000명, 기병 500명을 이끌고 로마군을 도왔다.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올림포스 산 전투에서 용기와 불굴의 의지로 켈트군을 상대로 활약해 승리에 기여했다고한다. 또한 로마군의 사절 역할도 해 갈라티아가 로마에 복종하는 데 기여했다. 그 후 로마로 파견되어 페르가몬의 이권을 수호하고 로마와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기원전 180년,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1세가 페르가몬의 영역을 위협하자, 에우메네스 2세는 그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 상황을 보고하고 중재를 요청했다. 로마는 폰토스에 사절을 보내 침략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파르나케스 1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크리토스 장군에게 1만 병력을 맡겨 소아시아를 약탈하게 했다. 180년 봄, 파르나케스 1세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약탈했다. 에우메네스와 아탈로스 2세는 반격에 나서 파르나소스에서 에우메네스의 장인 카파도키아 왕 아리아라테스 4세와 힘을 합쳐 폰토스 왕국과 대항했다. 중간에 로마가 중재하려 했지만, 파르나케스 1세가 협상을 거부해서 무산되었다. 전쟁은 기원전 179년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수세에 몰린 파르나케스 1세는 평화 협상에 응했고, 시노페와 일부 식민도시를 제외하고 그가 정복한 대다수 영토를 반환하기로 했다. 또한 파플라고니아와 티온에서 철수했고, 인질을 석방하고 탈영병을 넘겨줬고, 전쟁 배상금도 지불하기로 했다.
기원전 173년,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에 직접 방문하여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 왕이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자 군대를 대폭 키우고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있으며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현혹해 로마에 대항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그런데 에우메네스는 조국으로 돌아가던 중 델포이에 들러 아폴로 신에게 제사를 드리다가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그는 아이기나에서 어렵게 회복됐지만, 오랫동안 상태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 페르가몬에서 형을 대신해 국정을 맡고 있던 아탈로스는 형이 죽었다는 뜬소문을 전해듣고 형수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가 회복된 후 귀국하자, 그는 왕좌를 곧바로 형에게 넘겼다. 에우메네스는 그가 자신을 대신하려고 서두른다고 꾸짖었지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로마와 마케도니아가 전쟁을 벌였는데, 로마군이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걸 본 에우메네스는 페르세우스와 손을 잡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페르세우스를 의심해 진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로마인들은 낌새를 눈치채고 그가 동맹을 끊으려고 눈치를 살핀다고 여겨 비난의 목소리를 높혔다. 기원전 167년, 원로원은 이탈리아에 찾아온 그가 로마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고 한겨울에 가능한 한 빨리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반면 아탈로스 2세가 원로원에서 언제든지 연설할 수 있도록 해줬다.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참패한 페르세우스가 로마군에 항복하면서 전쟁이 종결된 뒤, 에우메네스는 로마에 승리를 축하하면서 갈라티아의 켈트인들이 페르가몬을 침략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하고자 아탈로스를 사절로 보냈다.
그러나 원로원은 배신을 고려한 것으로 의심받는 에우메네스를 돕기를 꺼렸고, 아탈로스의 친구와 지인들은 그에게 에우메네스의 이익을 위해 원로원에 출석하지 말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말하라고 권했다. 에우메네스는 첩보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매우 신뢰하는 스트라스투스를 로마로 파견했다. 스트라스투스는 아탈로스와 만나 "지금 두 사람이 나라를 공동 통치하고 동등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왕은 건강이 좋지 않아 곧 후계자가 선택될 예정인데, 당신이 유력하다. 그러니 쓸데없는 야심을 버리고 왕에게 협조하라"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갈라티아의 위협은 형제들을 왕국 없이 남겨둘 위험이 있으니 이 시점에서 내전을 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덧붙였다. 아탈로스는 그 말에 설득되어 원로원에 형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원로원은 용병대를 보내주기로 했고, 페르가몬은 기원전 166년 용병대의 힘에 힘입어 갈라티아군의 침략을 격퇴하고 위기에서 벗어났다.
기원전 158년 에우메네스 2세가 자연사했다. 그와 스트라토니케 왕비의 아들 아탈로스 3세는 왕위를 계승할 만큼 나이가 차지 않았고, 아탈로스가 로마 정계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었기에, 왕위는 자연히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형수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했고, 기원전 153년 형의 아들 아탈로스 3세를 후계자로 지정했고 로마 역시 동의했다. 이렇듯 그는 형 에우메네스 2세 생전에도 충실한 조언자로서 활약했고 사후에도 형의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의 필라델포스(Φιλάδελφος)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기원전 159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데메트리오스 1세가 카파도키아를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역으로 삼으려고 아리아라테스 왕을 시해하고 오르페르네스를 카파도키아 왕으로 내세우자, 이에 경계심을 품고 기원전 156년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지원해 데메트리오스 1세에 대적하게 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3년간 내전을 치른 끝에 데메트리오스 1세를 꺾고 셀레우코스 왕위에 올랐고, 페르가몬 왕국은 그 과정에서 카파도키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기원전 156년,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2세가 페르가몬으로 쳐들어가서 아탈로스를 격파하고 니케포리움으로 진군해 많은 성역을 파괴하고 아스클레피오스 동상을 비롯한 여러 조각상을 노획했다. 이후 엘레아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아르테미스 신전과 아폴론 신전을 파괴한 뒤 비티니아로 돌아가다가 굶주림과 이질에 시달려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아탈로스는 동생 아테나이오스를 로마로 보내 원로원에 비티니아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로마는 비티니아에 사절을 보내 페르가몬에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프루시아스 2세는 이를 무시하고 기원전 155년 페르가몬과 카파도키아를 침략했다. 이에 분노한 원로원은 10명의 사절을 재차 비티니아에 보내 전쟁을 끝내고 아탈로스에게 피해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경고했다. 한편 아탈로스는 비티니아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5세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4세와 연합하여 대규모 병력을 구축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프루시아스 2세는 10명의 사절들이 페르가몬 편만 든다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로마는 비티니아와의 동맹을 파기하기로 했다.
로마 사절들은 아탈로스에게 비티니아를 일단 침략하지 말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라고 조언한 뒤, 아테네를 시켜 헬레스폰트 일대의 친 비티니아 도시들을 파괴하게 했다. 이제 로마와의 전쟁이 임박하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프루시아스 2세는 협상을 제안했다. 원로원은 아탈로스와 프루시아스 2세에게 평화 협약을 동시에 제의했다. 여기에는 프루시아스 2세가 아탈로스에게 20척의 배를 헌납하고 20년간 500달란트를 지불하며,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양자는 이에 동의했고, 비티니아와 페르가몬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기원전 151년, 프루시아스 2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페르가몬에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이 지나치게 많다며 줄여달라고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비티니아 사절단은 아들 니코메데스를 죽이라는 프루시아스 2세의 밀명을 받았다. 하지만 니코메데스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페르가몬으로 망명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기원전 149년, 아탈로스는 니코메데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비티니아를 공격했다. 비티니아 주민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귀순했고, 프루시아스 2세는 부하 500명만 이끌고 니케아 요새에 숨은 채 로마가 개입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로마는 아탈로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했기에,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권고만 할 뿐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고, 프루시아스 2세는 니코메디아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려 했다가 그곳 주민들이 성문을 열고 귀순하자 제우스 신전으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니코메데스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니코메데스는 니코메데스 2세로서 비티니아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아탈로스는 팜필리아의 아탈리아 시를 건립했으며 코리코스 시를 강력한 성벽으로 요새화했다고 한다. 또한 이오니아의 에페소스 항구의 규모를 키웠으며, 기원전 189년 형이 자신과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필라델피아(오늘날 알라셰히르)가 융성하도록 많은 지원을 해줬다. 이와 동시에, 디오니소스 신 숭배를 장려했으며,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 버금가는 도서관을 페르가몬에 세우고 극장 등 문화 시설을 건립했다. 여기에 예술과 과학을 후원하고 새로운 종류의 자수법을 발명했다.
기원전 138년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조카 아탈로스 3세가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