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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01:30:36

아탈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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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가몬 왕국 3대 군주
Ἄτταλος Α΄ | 아탈로스 1세
파일:아탈로스 1세.jpg
제호 한국어 아탈로스 1세
그리스어 Ἄτταλος Α΄
영어 Attalus I
존호 바실레프스
생몰 년도 기원전 269년 ~ 기원전 197년
재위 기간 기원전 241년 ~ 기원전 197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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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가몬 왕국 3대 군주. 갈라티아,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고노스 왕조 등 주변 국가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로마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 페르가몬의 번영을 이끌어낸 명군이다.

2. 생애

기원전 269년 아탈로스와 안티오키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아탈로스는 필레타이로스와 에우메네스의 형제의 아들이며, 어머니 안티오키스는 셀레우코스 1세의 손녀다. 기원전 241년 에우메네스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선왕 에우메네스 1세가 갈라티아에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평화를 보장받은 것과는 달리 무력으로 그들을 물리치기로 했다.
파일:튀르키예 갈라티아.jpg
죽어가는 갈라티아인 조각상

켈트족은 공물을 바치길 거부한 페르가몬을 응징하고자 침공을 단행했지만, 미시아의 카이코스 강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탈로스 1세에게 완패했다. 그는 켈트족의 약탈에 고통받던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로부터 소테르(Soter: 구원자)라는 칭송을 받고 이를 자신의 칭호로 삼았다. 또한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에 기념 동상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인 '죽어가는 갈라티아인' 동상의 복제품이 현재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몇년 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셀레우코스 2세에 맞서 소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켈트 용병들을 대거 고용하여 페르가몬으로 쳐들어갔다. 아탈로스 1세는 아프로디시움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친 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프리기아 전투와 콜로니 호수 전투에서 연이어 격파했다. 그 후 기원전 228년 마안데르 강의 지루인 아르파소스 강 유역의 카리아에서 히에락스의 군대를 최종적으로 물리쳤다. 히에락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바빌로니아로 진군해 셀레우코스 2세의 지위를 가로채려 했지만, 셀레우코스 2세는 그를 격파하여 소아시아로 쫓아냈다. 히에락스는 소아시아에서 트라키아로 이동해 세력을 재건하려 했지만 기원전 227년 켈트족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아탈로스는 히에락스를 상대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모든 셀레우코스 왕조 영토를 장악했다.

기원전 224년, 셀레우코스 3세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삼촌인 안드로마코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파견했다. 아탈로스는 그를 요격하여 생포한 뒤 이집트로 압송했다. 이에 셀레우코스 3세가 친정에 나섰지만, 기원전 223년 4월 또는 6월 켈트족 출신의 아파투리오스와 공모한 장교 니카노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타우루스 산맥 너머의 소아시아 영토의 총독으로 임명된 아카이오스는 2년 안에 페르가몬 왕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모두 되찾았고, 아탈로스를 페르가몬 성채에 가두었다. 그러나 아카이오스는 곧 셀레우코스 제국과 결별하고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바실레프스를 칭했다.

기원전 218년, 아카이오스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대립하느라 자신에게 신경 못 쓰는 틈을 타 세력 재건에 나섰다. 그는 텍토사고스의 켈트 부족의 도움을 받아 포카이아, 콜로포나, 키미, 서머나 등 여러 도시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뒤를 이어 미시아를 공략하고 아피아 평야 지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기원전 217년 아카이오스가 반격에 나서 셀케에서 페르가몬군을 격파하고 리키아와 팜피니아를 정복했다. 아탈로스 1세는 이웃 도시인 람사코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 일리온과 우호 협정을 맺고 켈트족의 정착지를 나눠줌으로써 세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아카이오스를 진압하려는 안티오코스 3세가 사절을 보내 아카이오스를 공동으로 협공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협정을 맺어 시리아 전쟁을 마무리한 뒤 기원전 216년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아카이오스의 근거지인 사르디스를 포위했다. 2년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214년 사르디스를 함락했고, 아카이오스는 야만적인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페르가몬 왕국은 아카이오스의 위협에서 해방되었지만, 셀레우코스 제국이 소아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세력 확장이 억제되었다.

아탈로스는 일단 우호 관계를 맺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장악한 소아시아 동부는 포기하고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안티고노스 왕조필리포스 5세의 지휘하에 팽창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그들과 대적하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동맹을 맺고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던 기원전 215년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 바르카와 손을 잡고 로마 공화국이 장악하고 있던 일리리아를 노리자, 로마는 이에 대응하여 반 마케도니아 연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엔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엘리스, 메시네와 페르가몬 왕국이 가담했다. 이후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 공화국의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

아탈로스 1세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전한 뒤 반 마케도니아 연맹의 해군 사령관으로 선출되어 마케도니아 해군과 맞서는 로마 함대를 지원했다. 기원전 209년 아이기나에서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를 영접했고, 기원전 208년 봄 갈바와 함께 60척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아이기나에서 렘노스로 항해했다. 아탈로스는 페파레우스를 공격한 뒤, 갈바와 함께 니케아로 건너갔다. 이후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점거하고 있던 우라에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에우보이아로 이동하여 우라에오스를 곧 공략했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가 신속하게 이동하여 아직 방비가 덜 된 페르가몬군을 급습했다. 아탈로스는 많은 병력을 잃고 사로잡힐 뻔했지만 가까스로 배에 몸을 싣고 탈출했다.

갈바는 뒤이어 칼키스를 공략하려 했지만 적의 방비가 생각보다 강하자 로크리스의 항구 도시인 키노스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비티니아인들이 페르가몬을 공격하는 바람에 아탈로스가 철수하자, 갈바는 할 수 없이 아이기나로 돌아갔다. 그 후 갈바는 로마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받지 못했기에 더이상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로마와 페르가몬 연합 함대의 압력에서 해방된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에 총력을 기울였고, 결국 아이톨리아 동맹은 마케도니아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로마 역시 한니발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익하다고 여겨 기원전 205년 마케도니아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탈로스 1세 역시 평화에 동의하여 협약에 서명했다.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평화 협약 후, 로마 공화국은 종교적 문제에 직면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유성우가 쏟아지는 걸 불길한 징조로 여긴 시민들이 심히 동요하고 있었다. 원로원은 시빌라의 예언서를 확인해보고 "프리기아의 이다 산과 연관된 대모신 마그나 아이디아를 로마로 가져온다면, 로마를 침략한 외국인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구절을 확인했다. 한니발과의 전쟁을 빨리 마무리짓고 싶었던 원로원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를 비롯한 사절단을 델포이 신전에 보내 이와 관련된 신탁을 받아내게 했다.

라이비누스 일행은 페르가몬의 협력을 받으라는 신탁을 받고 곧바로 페르가몬에 향했고, 아탈로스는 이들을 성대하게 환영하고 페시눈다스로 인도했다. 그는 그곳에서 지역 주민들이 "신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신성한 돌을 넘겨줬고, 로마인들은 즉시 이 돌을 로마로 가져가서 유피테르 신전에 안치했다. 이후 이 돌은 '마그나 마테르(Magna Mater)'로 알려지며 숭배 대상이 되었다.

기원전 201년 봄, 필리포스 5세가 사모스를 공략하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이집트 함대를 노획했다. 이후 키오스로 진군하여 포위했고, 로도스 섬을 약탈하는 해적들을 지원하고 크레타인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로도스 선박을 괴롭히게 했다. 아탈로스는 이러한 필리포스 5세의 팽창 정책에 위협을 느꼈고, 로도스와 동맹을 맺고 있기도 했기에 마케도니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기원전 201년 키소스 해안의 외해에서 마케도니아 함대와 페르가몬-로도스-키오스 연합 함대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함대 92척이 파괴되고 7척이 노획된 반면, 페르가몬 함대는 3척이 침몰하고 1척이 포획되었으며, 로도스 함대는 3척만 잃었다. 여기에 마케도니아의 선원 3,000명과 노젓는 사람 6,000명이 전사했고, 2,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리하여 마케도니아 함대는 궤멸되었다.

그러나 전투를 끝내고 귀환하던 로도스 해군이 소아시아 연안의 라디스 섬과 밀레투스 섬 사이의 해협을 건너던 중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을 받고 완패하면서, 마케도니아 육군이 소아시아로 건너가는 걸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필리포스 5세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페르가몬 주변 지대를 모조리 파괴하고 페르가몬 성채를 포위 공격했다. 아탈로스는 안티오코스 3세가 구원군을 보내주길 희망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필리포스 5세와 밀약[1]을 맺었기에 곤경에 처한 페르가몬을 전혀 돕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탈로스 1세는 아테네로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일찍이 페르가몬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마케도니아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아테네 시민들은 기꺼이 그를 위해 마케도니아와 싸우기로 했다. 또한 로마에 사절을 보내 필리포스 5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며 그를 물리쳐달라고 호소했다. 로마는 막심한 인력 피해를 낸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필리포스 5세가 로마의 철수 요구를 무시하고 침략을 계속 이어가자 기원전 200년 필리포스 5세에게 선전포고하고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단행했다. 로마가 전쟁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탈로스는 즉시 아테네에서 출발하여 아이기나에 정박하고 있던 페르가몬 함대와 합세했다.

그는 로마로부터 소아시아에 가 있는 마케도니아군이 본국에 돌아오는 걸 해상에서 막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수행하고자 아이톨리아 동맹에 사절을 보내 함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와 맺은 평화 협약을 파기하는 걸 망설였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군은 본국으로 신속히 철수하여 트라키아에서 재편성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 장군 필로클리스는 2,000명의 보병과 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아티카를 약탈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마케도니아 함대는 마로니아로 이동했으며, 필리포스 5세 본인은 트라키아에 남아 여러 도시를 잇따라 점령했다. 하지만 필리포스 5세의 공세는 아비도스에서 저지되었고, 아틸로스는 로도스 함대와 함께 아비도스에 상당한 물자를 지원했다. 그러나 아비도스는 끝내 함락되었고, 그곳 수비대와 시민들은 모두 자살했다.

기원전 199년 술피키우스 갈바가 이끄는 로마 함대를 영접한 아틸로스 1세는 키클라데스에 있는 안드로스를 공략했다. 전리품은 로마인들에게 넘어갔고 키칼라데스 제도는 아탈로스에게 넘어갔다. 이후 안드로스로부터 남쪽으로 항행하여 키츠노스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마그네시아 해안의 스키아토스 평원을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했다. 뒤이어 북쪽으로 항해해 멘데까지 이르렀으나 폭풍으로 인해 많은 함대가 손실을 입었다. 이후 잔여 함대를 수습하여 마케도니아 해안을 북쪽으로 따라가며 아칸토스를 약탈하고 전리품을 싣고 에우보이아로 돌아갔다. 갈바와 아탈로스는 헤라클레아로 이동한 뒤 아이톨리아 동맹군 사령관 피리아스와 만났다. 피리아스는 아탈로스에게 1,000명의 병사를 제공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아탈로스는 필리포스 5세가 2년전 페르가몬으로 쳐들어갔을 때 아이톨리아인들이 자신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걸 거부한 일이 있다며 거부했다.

그 후 갈바와 아탈루스는 에우보이아의 오레오스를 공격하기로 하고 20척의 로도스 함대와 합세해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도시가 함락되었고, 아탈로스는 도시를 장악하고 로마군은 포로를 갖기로 합의했다. 그 후 겨울이 다가오자 함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냈지만 엘레우시스 밀교에 참여하기 위해 아티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3세가 페르가몬을 침략하려 들자, 그는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페르가몬을 지키기 위해 원군을 보내거나 셀레우코스군이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즉시 셀레우코스 제국에 사절을 보내 협상에 임했고,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라고 보고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다. 아탈로스는 로마에 감사의 의미로 왕관을 선물로 보냈다.

기원전 198년 봄 23척의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돌아온 그는 로마 함대와 로도스의 20척과 합세한 뒤 에레트리아를 공략하고 상당한 양의 예술 작품을 노획했다. 뒤이어 카리스토스도 공격해 그곳 수비대를 쫓아내고 시민들이 자치적으로 도시를 이끌게 했다. 이리하여 반 마케도니아 연합은 칼키스를 제외한 에우보이아 전역을 장악했다. 아탈로스는 뒤이어 첸크레아로 이동한 뒤 코린토스의 항구인 레차이움을 봉쇄했고, 로마와 손을 잡기로 한 아카이아 연맹군이 육지에서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레차이움은 끝까지 버텼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군이 도착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아탈로스는 피레아스로 이동한 뒤 겨울을 보냈고, 기원전 197년 초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초대를 받고 엘라테이아로 이동했다.

플라미니누스와 아탈로스는 테베에 있는 보이오티아 평의회에 함께 참석한 뒤 보이오티아가 전쟁에서 어느 편을 들 것인지 문의했다. 아탈로스는 보이오티아인들에게 조상들이 그들을 위해 한 많은 일들을 상기시키며, 자신들과 힘을 합쳐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멈추고 쓰러졌고, 신체 절반이 마비되어 버렸다. 현대 역사가들은 뇌졸중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 추정한다. 그는 페르가몬으로 이송된 뒤 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가 벌어질 무렵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72세.

그는 미시아의 시지코스에서 아폴로니다와 결혼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아폴로니다는 귀족이 아니었지만 품위와 예의를 갖춘 칭송받을 만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네 아들 에우메네스 2세, 아탈로스 2세, 필레타이로스, 아테나이오스를 낳았다. 아탈로스 1세가 숨을 거둔 뒤 장남 에우메네스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세 아들은 형의 믿음직한 조언자가 되었다.


[1] 필리포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가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정복하는 걸 돕고, 안티오코스 3세는 필리포스가 키레네, 키클라데스, 이오니아를 정복하는 걸 돕기로 했으며, 양자는 페르가몬의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