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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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4대 군주 Seleucus II Callinicus 셀레우코스 2세 | ||||
<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265년 | |||
미상 | ||||
사망 | 기원전 225년 12월 | |||
미상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246년 7월 ~ 기원전 225년 12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제호 |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 Seleucus II Callinicus | ||
가족 | 안티오코스 2세(아버지) 라오디케 1세(어머니) 라오디케 2세(부인) 안티오키스(장녀)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장남)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 |||
참전 | 시리아 전쟁 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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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4대 군주. 재위 내내 어머니 라오디케 1세의 전횡으로 촉발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2. 생애
265년경 안티오코스 2세와 라오디케 1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동생으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있었다. 그는 시조 셀레우코스 1세와 아파마의 직계 후손인 안드로마코스의 딸 라오디케 2세와 결혼하여 안티오키스, 셀레우코스 3세, 그리고 안티오코스 3세를 낳았다. 안티오코스 2세는 시리아 전쟁의 상황이 갈수록 좋지 않게 흘러가고 제국 동방에서 파르티아와 박트리아가 독립하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그의 딸 베레니케를 새 아내로 삼기로 했다. 그는 라오디케 1세와 이혼하면서도, 그녀가 일리온, 카리아, 키지쿠스 등 아나톨리아 전역의 다양한 지역에서 토지를 소유하도록 했고, 면세 해택도 줬다. 이후 베레니케는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셀레우코스는 아직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아기 안티오코스가 성장하면 그의 입지는 갈수록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았다.그러던 기원전 246년 7월, 안티오코스 2세는 소아시아의 영지를 관리하던 라오디케 1세와 재회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당대부터 라오디케 1세가 자기 아들인 셀레우코스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전 남편을 암살했다는 강한 의심을 받았다. 그 후 라오디케 1세는 장남 셀레우코스를 '셀레우코스 2세'로 선포하고 소아시아에서 거병했다. 베레니케는 오빠였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1]에게 구원을 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출진하여 시리아로 행진했다. 그러나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누이 베레니케와 어린 외조카 안티오코스가 이미 라오디케 1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격노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기로 작정했다.
기원전 246년에서 245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이오니아,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 원정하여 여러 해안 도시를 공략하거나 복속시켰다. 에페소스 총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육군은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의 지휘하에 시리아를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 셀레우키아를 거쳐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안티오키아까지 함락시켰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셀레우코스 2세가 도망친 바빌론을 향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진격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리스어로 쓴 승전비에는 그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엘람, 페르시아, 메디아, 그리고 박트리아까지 정복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이집트에서 운반해온 모든 신성한 물건들"을 되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과장이지만, 이집트군이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까지 위협한 것은 사실이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제 멸망을 목전에 두는 듯했지만,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해군이 안드로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해군을 격파하고 키를라데스 제도를 함락시켰고, 상이집트의 테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회군하면서 가까스로 멸망을 모면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4년, 셀레우코스 2세는 반격에 나서 안티오키아를 탈환했고 기원전 242년 시리아 북부의 내륙 지대를 탈환했으며, 다마스쿠스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휴전을 제의했고, 기원전 241년 양국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2]
그러나 기원전 241년, 소아시아의 왕으로 삼아뒀던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기원전 246년경 어머니 라오디케 1세의 부추김에 따라 형에게 소아시아의 소유권을 요구했다. 바빌론을 잃을 위기에 몰려 있었던 셀레우코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은 셀레우코스 2세는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기원전 240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갈라티아의 켈트족과 동맹을 맺고 앙카라 인근에서 셀레우코스 2세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히에락스는 켈트족을 물리친 후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결국 셀레우코스 2세는 현실을 인정하여 기원전 236년, 히에락스와 화평을 맺고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모든 소아시아 영토를 할양했다.
형제간의 내전이 벌어진 사이, 제국 각지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기원전 238년,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는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실상 왕으로 군림하다가 유목민족인 파르니족의 지도자 아르사케스 1세의 공격으로 피살되었다. 기원전 237년, 아르사케스 1세는 헤카톰필로스를 함락하여 새 수도로 삼고, 그 주변의 영토들을 공략했다. 셀레우코스 2세는 파르니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제 동방 영토를 되찾을 힘이 없다는 게 확인되자, 박트리아에 군림하던 디오도토스 2세는 자신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으로 선포하고 기원전 235년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한편, 소아시아에서는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의 위세가 나날이 쇠락했다.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는 히에락스를 상대로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28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히에락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를 차지하길 희망하면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2세는 원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있었고, 바빌로니아에서 히에락스를 몰아냈다. 히에락스는 소아시아로 도망친 뒤, 다시 트라키아로 도주했다가 기원전 227년 켈트족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2세의 치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25년 12월 말에서 낙마하여 죽어버린 것이다. 그 후 장남 셀레우코스 3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