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라틴어: Lucius Aurelius Oreste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조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아버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57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동기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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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163년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와 함께 동방으로 파견되어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세를 살펴보고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 왕국간의 분쟁을 중재했다. 이후 시리아로 가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기원전 188년에 체결된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을 준수하는 지 살펴보고, 협약에서 정한 제한 조건에 따라 셀레우코스 함대를 불태우고 전투 코끼리를 처치했다. 이에 제국 시민들은 강한 적의를 품었다. 기원전 162년,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라오디케아 시 체육관에서 열린 행사를 참관하던 중 렙티누스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고, 그와 루크레티우스는 급히 로마로 돌아갔다.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 간의 직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60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157년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가 집정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기원전 148년 아카이아 동맹이 로마가 마케도니아 전역을 속주로 삼은 것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를 적대했다. 이에 원로원은 아카이아 동맹에 경고하고 아카이아와 스파르타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그와 다른 두 명을 사절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중재에 실패했고, 로마에 돌아온 뒤 아카이아인들이 자신들을 거의 죽일 뻔했다고 보고했다.
기원전 146년, 그는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와 함께 아카이아 전쟁을 치르기 위해 출정한 로마군에 레가투스로서 동행했다. 그는 이스트미아 지협에 주둔하며 아군의 보급을 담당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는 기원전 12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