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Allobrogic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1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판니우스 |
동기 |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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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아이밀리우스 씨족 출신이었다가 파비우스 가문으로 입양된 뒤 기원전 145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들이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젊었을 때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원전 135년 재무관 선거에 출마했을 때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자신의 조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덕분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34~133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에 들어가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했다.기원전 129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했다. 그는 아이밀리아누스의 장례식에서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가 쓴 연설문을 직접 읽었다. 기원전 124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23년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했다. 이때 그는 곡물을 가득 실은 선박을 로마로 보냈는데,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파비우스가 로마에만 식량을 보냄으로써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이 로마의 권세를 증오하고 견딜 수 없게 했다고 질책하고, 이 곡물을 모조리 팔아서 챙긴 돈을 지방에 분배하도록 명령했다.
기원전 121년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알로브로게스 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돕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향했다. 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부족인 아르베르니족이 알로브로게스족과 연합하여 로마에 대적하자, 그는 아헤노바르부스와 연합해 기원전 121년 8월 8일 이세르 강 인근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파했다. 그 결과 갈리아 남부 일대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로 개편되었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파비우스는 알로브로게스족에 대한 개선식을, 아헤노바르부스는 아르베르니족에 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개선식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아르베르니 왕 비투이투스를 포함한 수많은 포로를 내세워 민중의 찬사를 받았고, 자신의 동상을 포로 로마노 인근 아치 위에 세웠다.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그보다 높은 직위인 파비우스를 더 높게 평가해 두 사람이 개선식을 거행할 때 파비우스에게는 개선문을 수여했지만 아헤노바르부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베스타 신전 인근 신성한 길에 개선문을 세웠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웅변가에 관하여>에서 시인 루키우스 아키우스가 그를 "품위 없이 말하지 않고 라틴어 그리스어, 문학 모두에 지식이 매우 풍부했다"고 평했다고 밝혔다.
그의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기원전 91년 법무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파비우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명성을 먹칠하는 것을 규탄하고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손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4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