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Lentul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20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시칠리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2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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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고대 사료에서 전해지는 렌툴루스(Lentulus)라는 코그노멘을 가진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327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였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 고위 행정관을 잇따라 맡은 렌툴루스 인사들과 이 인물간의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3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9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기원전 172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페르세우스와 로마간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원로원은 그리스로 사절단을 파견해 반 마케도니아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그는 이 사절단의 일원을 맡아 케팔로니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 해안 지대의 도시국가들을 잇따라 방문한 뒤 겨울이 되기 전에 로마로 귀호나했다. 기원전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아 마케도니아로 향하는 원정군에 가담했다. 보이오티아에서 300명을 이끌고 할리아트 요새를 포위햇지만, 법무관 가이우스 루크레티우스 갈루스의 명령에 따라 포위를 풀어야 했다.
기원전 169년 수석 조영관에 당선된 뒤 동료 조영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함께 표범과 코끼리가 포함된 호화로운 서커스 게임을 개최했다. 기원전 168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원정군에 레가투스로서 가담해 마케도니아에 다시 향했고, 피드나 전투 후 사모트라케에 숨은 페르세우스를 찾아가 항복을 설득했지만 페르세우스가 항복을 거부해서 실패했다. 기원전 165년 로마 시의 사법 재판을 관장하는 법무관에 선임되었고,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캄파니아 지방에서 국유지 중 개인에게 넘어간 토지를 반환받는 정책을 실시했다.
기원전 162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가 대 그라쿠스의 압력에 의해 집정관에서 사임하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게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집정관으로서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156년 동방에 있던 그는 비티니아 왕국의 프루시아스 2세가 페르가몬 왕국을 침공한 일에 관해 원로원에 보고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기원전 125년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되었다. 그 해 또는 이듬해에 아시아 총독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를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했지만 패소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에 대해 아퀼리우스는 분명 범죄를 저질렀지만 뇌물을 받은 판사가 무죄를 선고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21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원로원간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그는 원로원 편을 들었다. 이후 로마 시내에서 벌어진 충돌에 참여해 그라쿠스 파벌을 공격했다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평민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게 되자, 기원전 120년 원로원으로부터 레가투스로 선임되어 시칠리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유피테르의 플라멘이 되었고, 또다른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30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