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Aemilia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86년경 ~ 기원전 130년경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조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양부) 파파리아(어머니)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친형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양형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이복형제 아이밀리아 프리마(누이)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누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아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5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
동기 |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
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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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조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기원전 219년 집정관을 맡아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와 함께 로마의 영토를 약탈한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를 정벌하는 원정을 감행해 데메트리오스를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에게 도망치게 하고 일리리아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기원전 216년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함께 집정관을 맡아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과 맞붙었다가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기원전 182년과 기원전 168년 집정관, 기원전 164년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출진해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마케도니쿠스는 기원전 231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의 딸 파피리아와 결혼해 기원전 186년경 그를 낳았고, 2년 뒤인 기원전 184년경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낳았으며, 이후 장녀 아이밀리아 프라마를 낳았다. 첫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 기원전 182년에 모종의 이유로 파피리아와 이혼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하여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두 아들과 딸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를 얻었다. 마케도니쿠스는 자신의 재산이 많지 않아 네 아들 모두를 출세시키기는 어렵다고 여기고, 장남과 차남을 다른 귀족 가문에 입양시키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손자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입양되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됐다. 그리고 차남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남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입양되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로 바꿨다. 한편, 양형제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가 있었다.
이렇게 두 아들을 로마의 최고 귀족 가문으로 손꼽히는 파비우스 가문, 스키피오 가문으로 입양보낸 뒤, 마케도니쿠스는 남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가문을 잇게 했다. 하지만 그의 계산과 달리, 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은 기원전 167년경 10대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 그는 입양을 하지 않고, 그의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은 공식적으로 단절됐다. 이는 다른 귀족 가문에게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천문학적인 지참금이 필요했고, 그가 입양으로 떠난 두 아들과 사이가 돈독하면서도 이들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다만,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많지 않은 재산은 남은 두 아들에게 균등하게 나누도록 했다. 이때 그의 두 아들은 우애가 돈독한 만큼, 재산을 물려받을 때 서로에게 양보했고, 형보다 부유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형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아버지 재산이 훨씬 많이 가도록 했다. 한편, 마케도니쿠스의 장녀 아이밀리아 프리마는 대 카토의 장남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리키니아누스와 결혼했고, 차녀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아이밀리우스의 부관으로서 활약한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와 결혼했다.
그는 아버지가 기원전 168년 페르세우스 왕과 싸우기 위해 발칸 반도로 출진했을 때 동행했다. 당시 올림푸스 산 인근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고지에 틀어박혀 로마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후 정찰병들이 페레비아를 통과하는 우회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곳은 매우 좁고 험난해서 자칫 적의 급습을 받는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다들 그 길로 가기를 꺼렸는데, 그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처음으로 분견대를 이끌고 그 길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파울루스의 허가를 받은 두 사람은 5천 또는 8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 길로 향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세우스는 밀로에게 12,000명의 병력을 보내 로마군보다 먼저 길목을 장악하게 했다. 이에 두 사람은 강행 돌파하기로 작정했고, 양군은 산봉우리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러던 중 로마군에 고용된 트라키아 용병대가 적의 대열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자, 밀로의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이후 두 사람의 분견대가 평야로 내려오자,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 평원으로 후퇴했다. 이어진 파드나 전투에서, 그는 아버지를 도와 결정적인 승리에 일조했다.
피드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마케도니쿠스는 그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를 로마로 보내 승리 소식을 전했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즉시 아버지에게 돌아왔고, 마케도니아의 도시인 아이기눔과 아그사를 공략하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 이후 나시카 코르쿨룸과 함게 일리리아를 약탈하고 오리쿰에서 다시 아버지와 합세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기원전 167년 마케도니쿠스가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수레를 따라갔다.
이후 10여년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형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아카이아 연맹이 보낸 인질 중 한 명인 폴리비오스의 친구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로 보내졌을 때 폴리비오스가 로마에 남도록 해달라고 법무관을 설득해 관철시켰다는 정도가 전해진다. 그러다 기원전 154년, 그는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와 함께 소아시아에 파견되어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프루시아스 2세와 페르가몬 왕국의 국왕 아탈로스 2세가 전쟁을 끝내고 프루시아스 2세가 페르가몬 왕국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려 했지만, 프루시아스 2세가 끝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기원전 151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했다. 여러 학자들은 그도 형제와 함께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원로원 의원이 기원전 150년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한 원로원의 비밀 결의안을 누설하는 바람에 집정관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와 만나 그 이야기를 했는데, 크라루스가 3년 전 재무관을 맡았지만 아직 원로원 의원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46년 집정관 파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42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49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이때 릴리바이움에서 300명의 카르타고 인질을 인계받은 뒤 로마로 이송했다. 기원전 145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형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덕분에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배정되어 비리아투스가 이끄는 루시타니족을 상대로 루시타니아 전쟁을 치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시기 제3차 포에니 전쟁, 아카이아 전쟁,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병들이 이탈리아에 막 돌아왔지만, 그는 신병만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그가 이끌게 된 부대는 스페인 보조군을 포함하여 보병 15,000명과 기병 2,000명으로 비교적 소규모였으며,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간 뒤 비리아투스가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는 와중에도 전투를 가능한 한 회피하면서 병사드을 훈련시켰고, 소규모 접전에서 최소한의 피해를 보면서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히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가 눈에 띄는 성과를 빨리 거두지 못하자, 로마에서 그가 전직 집정관으로서 원정을 이어가는 것을 허용할 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기원전 144년 집정관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자기들이 루시타니족을 상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원로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대했다.
"나는 두 사람 모두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첫번째 집정관(코타)은 (경력이) 아무것도 없고, 두번째 집정관(갈바)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오."
원로원은 아이밀리아누스의 주장에 따라 파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를 믿어보기로 결의했다. 그후 파비우스는 비리아투스를 상대로 반격에 착수했다. 먼저 비리아투스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고 그의 두 도시를 점령했다. 막시무스는 베코르에서 비리아투스를 추격해 많은 적군을 사살했으나 그를 붙잡지 못했다. 이후 코르도바에서 겨울을 보낸 뒤 퀸투스 폼필리우스 아울루스에게 임페리움을 넘기고 로마로 귀환했다. 아피아노스는 그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이후 비리아투스와 성공적으로 싸운 로마 사령관이었다고 평했다.
기원전 140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인물이 크레타로 파견되어 그곳 두 지역 공동체간의 분쟁을 중재했다. 당시 또다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에서 비리아투스와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인물은 파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일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133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누만티아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때, 그는 레가투스로서 형제를 도왔다. 학자들은 기원전 130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기원전 12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