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라틴어: Lucius Aemilius Paull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6년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이탈리아 남부 칸나이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아들)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9년 |
전임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
동기 |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6년 |
전임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1]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동기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2]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3]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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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참패하고 전사했다.2. 생애
고대 로마 2대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귀족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기원전 25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해상에서 카르타고 해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기원전 219년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동맹에 의지하여 로마의 영토를 약탈한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와 싸우기 위해 일리리아로 출진했다. 두 집정관은 디말라 요새를 포위 공격하여 공략한 뒤, 일리리아 해안가의 다른 도시들을 항복시켰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를 파로스에서 바깥으로 유인해 회전에서 물리쳐, 그가 필리포스 5세에게 도망치게 하였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로마군은 일리리아 전역을 정복한 뒤 로마로 귀환했고 개선식을 거행했다. 폴리비오스는 이에 대해 아이밀리우스 혼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명한 사람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지은 익명의 저자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역시 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기원전 218년 집정관 임기가 끝난 뒤, 파울루스와 리비우스는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리비우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정계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카르타고에 대한 공식 선전포고를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된 사절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절단은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한 뒤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현지 부족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하지만 부족들은 로마가 사군툼을 도와주지 않아서 사군툼이 멸망해 버린 일로 로마를 불신했기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절단은 다시 갈리아로 가서 그곳 부족들에게 카르타고군이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설득했지만 역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216년, 로마인들은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등 일련의 패배를 안기며 이탈리아 전역을 횡행하는 한니발 바르카와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평민들은 신속한 승리를 외치는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압도적인 표로 선출했다. 한편 귀족들은 집정관 후보로 나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렌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중에는 한니발을 대적할 만한 자가 없다고 보고, 파울루스에게 출마를 권고했다. 파울루스는 3년 만에 또다시 집정관에 선출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거절했지만, 귀족들의 연이은 설득에 결국 수락했다. 그러자 다른 귀족 집정관 후보들이 전부 사퇴하면서, 그는 수월하게 집정관에 선출될 수 있었다. 두 집정관은 로마 역사상 최대의 군대를 부여받았다. 폴리비오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에게 주어진 병력은 총 87,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92,000명의 군대가 편성되었다고 기술했다. 두 집정관은 격일간 지휘권을 맡으면서 군대를 이끌기로 결의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이 칸나이로 군대를 이동시키자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총독들은 원로원에게 한니발과 교전할 지를 물었다. 원로원은 교전을 벌이지 말고 파울루스와 바로의 군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양군이 서로 접근하여 전초전이 벌어졌고, 로마군이 더 많은 적병을 살상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승리에 고무되어 바로 전면전을 벌이려는 병사들을 진정시켜서, 회전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아우피드 강 계곡에 자리잡은 한니발은 바로가 지휘권을 맡았던 날 도발하여 로마군이 전투를 벌이기 위해 진영에서 나오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는 다르게 서술했다. 로마군은 진군 도중에 식량을 모으고 있던 적병들과 우연히 마주쳐 큰 손실을 입혔지만, 파울루스는 매복을 두려워하여 진군을 막았다. 나중에 식량이 바닥난 한니발은 실제로 병사들을 매복시켰지만, 파울루스가 정찰병을 보내 확인하는 바람에 실패하자 칸나이로 철수하였고, 바로가 지휘권을 맡은 날 아우피드 강 계곡에서 나와 전투를 시작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파울루스는 평원에서 한니발과 싸우면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바로는 이를 무시하고 지휘권을 잡은 날 결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신용하지 않는다. 폴리비오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견을 받고 있었는데, 파울루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친할아버지였다. 이 때문에 파울루스를 비판할 수 없었던 그가 바로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학자들은 칸나이 전투 때 로마군의 전략은 바로 혼자서 기획한 게 아니라 파울루스를 포함해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등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성들도 머리를 함께 맞대어 고안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양군은 칸나이 평원에서 회전을 벌였다.(칸나이 전투) 로마군은 양익의 기병대가 버티는 사이 중앙에 포진한 군단병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여 적을 돌파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진형의 깊이를 높이고 각 부대 사이의 간격을 평소보다 좁혔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이러한 전략을 간파하고 보병대를 초승달 모양으로 정렬해 볼록한 면이 적을 향하게 했다. 동시에 가장 약한 부대인 갈리아 보병이 중앙에 배치되었고, 그 측면에는 한니발과 함께 악전고투하며 정예병으로 육성된 리비아와 이베리아 보병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양익에는 누미디아 기병대와 이베리아 기병대가 포진했다.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아이밀리아누스는 우익 기병대를 지휘하다가 적 투석병이 던진 돌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이후 벌어진 기병전에서 기병대가 허물어지자 중앙 군단병과 합세해 그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중앙 군단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전략에 휘말려 파멸적인 타격을 입고 있을 때 트리부누스 밀리툼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그에게 말을 건네며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지휘관이 필요한 동포를 위해 로마로 어서 피하라고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가서 원로원에게 로마를 요새화하고, 승리한 적들이 올 때까지 방어를 단단히 하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파비우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그대와의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나를 살해당한 병사들과 최후를 맞도록 내버려 두시오. 부디 나를 집정관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아니면 전우를 고발하여 스스로의 결백을 다른 이를 유죄에 빠뜨리며 증명하게 하지 말아주시오."
현대 역사가들은 이 유언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무튼 그는 칸나이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고, 동료 집정관 바로는 패잔병들을 가까스로 수습해 로마로 귀환했다.
그에게는 같은 이름의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있었다. 이중 장남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두 번 집정관에 올랐으며, 훗날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마케도니쿠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둘째 아들은 그가 전사할 당시, 이 무렵 한니발과 전쟁을 벌이면서 참전한 가문 남성들이 많이 죽어 대가 거의 끊길 위기에 처한, 그의 친인척 집안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으로 입양을 갔다. 여기에는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전사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기리고, 자신의 혈연상 친척뻘 조카이기도 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자녀들의 보호자 역할을 위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입양된 차남은 관례에 따라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로 바꿨는데, 차남의 아들이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손자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증손자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이다.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라는 딸도 있었는데, 훗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