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라틴어: Lucius Manlius Vulsō Long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불소(조부)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아버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아들)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불소(아들)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6년 |
전임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
동기 | 퀸투스 카이디키우스→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후임 |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임기 | 기원전 250년 |
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 |
동기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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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80년부터 집정관을 연이어 배출하면서 고대 로마 최강의 귀족 가문으로 손꼽혔던 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일부 학자들은 코그노멘인 불소(Vulsō)가 그들이 에트루리아 도시인 볼시니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푸블리우스, 아울루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기원전 256년 퀸투스 카이디키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카이디키우스는 얼마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 당시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8년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로마군은 시칠리아와 바다에서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를 거뒀지만, 시칠리아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데엔 실패했고 카르타고의 해상 보급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카르타고의 본토인 아프리카로 원정가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결의했다.
불소와 레굴루스는 4만에 달하는 지상군에 330척에 달하는 거대한 함대를 일으켜 아프리카 원정에 착수했다. 카르타고 해군은 이를 사전에 감지하고 시칠리아 남쪽 해안가인 에크노무스 곶에서 350척에 달하는 함대를 집결시켜서 저지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두 집정관은 적이 뛰어난 기동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함대를 쐐기 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기로 했다. 이에 카르타고 지휘관 하밀카르와 한노는 위장된 후퇴로 적의 전투 진형을 무너뜨린 뒤 4개 로마 편대 중 후방에 뒤쳐진 2개 편대를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가까이 오는 적 함선에 코르부스를 내리 꽂아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적선에 승선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한편, 레굴루스와 불소가 이끄는 선두 편대는 후퇴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포획했다. 그러던 중 후방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추격을 중단한 뒤 뱃머리를 돌려 아군 함대를 공격하고 있는 적 함대의 배후를 찔렀다. 불소는 해안 근처에 좌초될 위기에 몰린 3번째 편대를 구했고, 레굴루스는 4번째 편대를 구조했다. 이에 하밀카르와 한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24척을 잃고 적선 30척을 격침시키고 64척을 나포한 두 집정관은 손상된 함선들을 수리한 뒤 아프리카로 항해해 클루페아 해안에 상륙한 뒤 아스피스 시를 포위 공격해 며칠 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인근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막대한 전리품과 27,000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이후 겨울이 다가오자 원로원에 전령을 보내 향후 지침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원로원은 불소에게 대다수 전선과 다수의 육군을 시칠리아로 돌려보내고 레굴루스는 15,000 보병과 500기병과 함께 현지에 남아서 점령지를 지키면서 현지 보급에 힘쓰라고 지시했다. 이는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아프리카에 주둔한 수만 병력에 물자를 지속적으로 보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소는 지시에 따라 시칠리아로 돌아갔고, 레굴루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이어갔으나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완패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기원전 250년,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재차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릴리바이움 공방전을 착수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카르타고 수비대가 악천후를 이용해 성밖으로 뛰쳐나와 공성 무기를 모조리 파괴해버리자, 그는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포위를 이어갔다. 릴리바이움 공방전은 그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도 8년여간 지속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에겐 여러 아들이 있었다. 첫번째 아들은 기원전 218년 법무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이고, 두번째 아들은 기원전 210년 법무관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불소다. 고대 기록에는 이들 두 사람만 그의 아들이라고 밝혔지만, 독일의 고대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기원전 189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와 기원전 197년 법무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기원전 178년 집정관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 형제의 아버지인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역시 그의 아들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기록이 부족하기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