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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6 18:22:31

릴리바이움 공방전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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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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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50~241년, 로마군이 시칠리아 최후의 카르타고 요새인 릴리바이움(현재 마르살라)을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상세

시칠리아에서 튀니지와 가장 가까운 해변에 자리잡은 릴리바이움은 고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서부에 진출한 이래 카르타고가 가장 중요시하는 요충지였다. 이곳은 제조 상품의 서부 지중해 무역 중심지였으며,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 세력과 카르타고 본토 사이의 전략적 항구 역할을 착실히 수행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중요한 곳을 지키기 위해 높이 10m, 두께 7m에 달하는 성벽을 건설하고 첫번째 벽에서 10m 떨어진 두번째 벽을 추가로 세웠고, 깊이 20m, 너미 30m에 달하는 해자를 여러 개 팠으며, 서로 연결된 항구 3개를 건설했다.

카르타고가 동부 시칠리아의 맹주 시라쿠사와 오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릴리바이움이 간혹 포위되곤 했지만 거뜬히 버텨냈으며, 에페이로스 왕국의 국왕 피로스 1세가 쳐들어왔을 때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대다수 도시를 상실했지만 릴리바이움 만큼은 끝까지 사수했다. 이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릴리바이움은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군의 근거지로 기능해 카르타고가 20여 년간 시칠리아에서 버티는 기반이 되어줬다.

기원전 251년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시칠리아의 대다수 도시들로부터 복종 서약을 받아낸 뒤 아직도 카르타고의 손아귀에 있는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오늘날 트라파니)를 공략하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250년 두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에게 4개 로마 군단병과 4개 이탈리아 동맹시 보조 군단, 200척의 전선과 해군 분견대를 맡겨 릴리바이움 공략에 투입했다. 이에 맞서는 히밀코 휘하 릴리바이움 수비대는 7,000명의 보병과 700명의 기병이었으며, 대부분 그리스인과 켈트인으로 구성된 용병대였다.

로마군은 릴리바이움에 도착한 뒤 2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세운 후 투석기, 공성추 등 수많은 공성 병기를 제작하고 릴리바이움 요새의 남동쪽 측면을 공격하여 해자를 메우고 외벽의 탑 6개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에 땅굴을 파서 성 내부로 들어가려 했지만 카르타고군이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땅굴을 파서 로마군의 공사를 훼방놓는 바람에 실패했다. 또한 로마군의 약탈과 학살을 피해 릴리바이움으로 도주한 민간인들은 매일 밤 성벽과 탑의 손상을 복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평원에서 맞붙었을 때 입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으며, 질병, 썩은 고기가 포함된 열악한 식량으로 인해 고통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군의 연이은 공세에 수비대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용병들 사이에서 "이럴 바에 로마군에게 투항하자"라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일부 갈리아 용병들은 아예 실천에 옮기려 했지만, 알렉손(Ἀλέξων)이라는 이름의 그리스 용병이 이 사실을 히밀코에게 보고했고, 히밀코가 주모자들만 처형하고 나머지 병사들에게 급료를 두둑이 주며 차후에 승리하면 더 많은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군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후 로마군의 공성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50척의 카르타고 전함이 아이가테스 제도에 집결했다. 그들은 해상을 봉쇄한 로마 전함들을 예의주시하다가 강한 서풍이 불자 적이 반응하기 전에 릴리바이움 항구로 빠르게 이동한 뒤 수비대에게 대량의 보급품과 지원군을 전달했다. 지원군 규모는 4,000에셔 10,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히밀코는 야밤을 틈타 요새를 포위한 로마군을 습격해 공성 무기들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필사적인 전투를 치른 끝에, 카르타고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요새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적이 해상에서 추가 보급하지 못하도록 바위를 실은 배 15척을 항구 앞바다에 침몰시켰지만, 카르타고 해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상 보급을 꾸준히 이어갔다. 이에 목재로 제방을 쌓아서 항구 입구를 막으려 했지만 풍랑이 심해서 이 역시 실패했다. 카르타고 해군은 작지만 빠른 배를 적절하게 활용해 로마군의 해상 봉쇄를 잘 피해갔는데, 특히 로도스의 한니발은 한 척의 작은 갤리선을 이끌고 덩치 큰 로마 함선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릴리바이움 수비대를 지원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인물은 넓은 바다로 나간 뒤 돌연 멈추고는 노를 들어올려 로마군에게 보였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니 어서 나를 잡아보라"는 도발이었지만, 로마인 중 누구도 감히 그를 쫓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잇따른 도발에 열받은 로마 해군이 철저하게 경비하는 바람에 결국 잡혀버렸고, 그의 전함은 훗날 로마 당국이 새 함선을 건조할 때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249년, 새 집정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해상 봉쇄를 완수하기 위해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드레파나 항구를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드레파나 해전에서 아드헤르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해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 후 아드헤르발은 70척의 퀸퀘레메를 이끌고 온 카르탈로에게 30척을 추가해준 뒤 릴리바이움을 포위한 로마군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카르탈로는 즉시 릴리바이움 해상으로 출격해 여러 로마 선박을 파괴한 뒤 소수의 전함들이 호위하는 80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로마 수송부대를 막아섰다. 로마 수송부대는 전함들이 최후까지 분전하다 전멸하는 동안 판티아스 항구로 피신한 뒤 카르탈로의 적 함대와 대치했다. 그러다가 풀케르의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가 이끄는 120척의 로마 전함들이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르탈로는 두 함대 사이의 어느 해안에 정박했다.

풀루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아군을 구하기 위해 판티아스로 이동하지 않았고, 판티아스에 주둔한 수송 함대 역시 풀루스와 합류하길 꺼렸다. 그러던 중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카르탈로는 즉시 동쪽으로 항해했다. 카르탈로가 떠나자 그제야 판티아스로 향한 풀루스는 수송 함대와 합세한 뒤 릴리바이움으로 이동했지만, 카마리나 인근에서 폭풍우를 만나 풀루스가 탄 기함을 포함한 2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이 파괴되고 말았다.

기원전 247년 소규모 용병군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한 하밀카르 바르카는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유격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이탈리아 본토 최남부의 로크리와 브룬디시움을 기습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서 북서쪽으로 7마일 떨어진 헤렉테 산(오늘날 몬테 펠레그리노)에 강력한 요새를 세운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로마군 보급부대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로마군은 당연히 그의 존재를 거슬려 했고 헤렉테 산에 몇차례 파견했지만, 하밀카르는 로마군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쳤다. 또한 시칠리아의 카타나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쿠마에까지 해상 공격을 벌였다. 비록 로마군에게 점거된 도시를 한 개도 탈환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상대로 계속 물고 늘어져서 로마군의 자원을 계속 소모시켰다. 그러다가 기원전 244년 로마군에게 포위된 드레파나 인근의 에릭스(현재 몬테 산 줄리아노) 산에 은밀히 이동하여 에릭스 시를 기습하여 공략한 뒤 그곳에 있던 모든 식량과 무기 창고를 파괴한 후 산 정상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산 정상의 로마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전해 적이 진영을 접수하는 것을 막아냈고, 그 사이에 드레파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에릭스 산으로 달려오면서 이번에는 하밀카르의 카르타고군이 역포위될 위기에 몰렸다. 이에 하밀카르는 로마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형이 험준하면서도 해상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로마군과 대치했다. 양자는 3년간 소규모 전투를 연이어 치렀지만 승부를 쉽게 내지 못했다.

이렇듯 소모전이 반복되면서 릴리바이움 공방전은 9년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로마 공화국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하나는 이 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고 카르타고와 협상해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카르타고를 재기 불능으로 삼은 뒤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정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하밀카르를 제압하는 것은 수년간의 소모전이 보여주듯 요원했으니, 남은 길은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해안 도시인 두 요충지를 공략하려면 해상 봉쇄가 필수적이었고, 그러려면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여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쳐야 했다.

당시 로마 해군은 기원전 255년 카마리나 해상 사고와 기원전 253년 파이누르 해상 사고로 인해 막대한 인력과 함대를 상실했고, 뒤이어 기원전 249년 드레파나 해전 참패와 카르타고 해군의 연이은 이탈리아 본토 습격으로 인해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전함이 얼마 되지 않았다. 로마의 이같은 사정을 파악한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가 조만간 협상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원주민 반란과 누미디아 등의 침략에 대처하는데 투입하고 시칠리아에는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으며,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대폭 감축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국고는 이미 바닥났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전쟁에서 승리하면 카르타고에게 부과될 배상금을 받아가는 조건으로 배 한 척을 건조할 자금을 대출받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부유한 시민들은 앞다퉈 사재를 털어 정부에 기부했으며, 돈을 낼 수 없는 시민들은 직접 함선 제작에 뛰어들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약 200척의 퀸퀘레메(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가 건조되었다.

기원전 241년,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카르타고 함대를 상대로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릴리바이움 항구를 봉쇄했다. 카르타고 당국은 로마와는 달리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함대를 새로 건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가면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인력 손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인데다 설령 함대를 일으켜서 싸운들 승산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 정부와 평화 협약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밀카르 바르카는 아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가 버티고 있으니 새 함대를 일으킨다면 이길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에 분개해 협상을 이끌기를 거부했고, 히밀코를 대신해서 릴리바이움 수비를 맡았던 기스코가 하밀카르를 대신해 협상에 임했다. 그 결과 양국은 '루타티우스 협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2. 카르타고는 전쟁 중에 생포한 모든 로마 병사를 돌려보내며, 로마가 생포한 카르타고 병사를 데려오고 싶으면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3. 카르타고는 20년 동안 2,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이 협약이 민회에 상정되었지만, "겨우 이 정도만 받아내려고 전쟁을 지속했느냐"는 반발을 사는 바람에 부결되었다. 이에 원로원은 집정관 카툴루스의 형제이며 차기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를 대표로 삼은 10인 사절단을 시칠리아로 파견해 추가 협상을 벌이게 했다. 기스코는 추가 요구를 즉시 받아들였고, 협약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가까운 여러 섬도 양도한다. 단, 양도해야 하는 섬은 차후에 정한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협약이 맺어지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종식되었고, 릴리바이움은 로마의 식민도시로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