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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6 18:33:18

드레파나 해전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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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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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49년 아드헤르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해군이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이끄는 로마 해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해전.

2. 상세

기원전 251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를 탈환하기 위해 14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앞세운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파노르무스 전투) 카르타고는 이 패전으로 인해 급격히 위축되어 시칠리아 섬 서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릴리바이움으로 대거 철수했다. 로마 정부는 이제 전쟁을 끝낼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기원전 250년부터 릴리바이움 공략에 착수했다.(릴리바이움 공방전)

릴리바이움은 과거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에 진출했을 때 첫 번째 거점으로 삼은 곳이었고, 그리스계인 시라쿠사를 상대로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면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때도 끝까지 붙들고 있을 정도로 카르타고에게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오랜 세월 방어 시설을 증축하고 성벽을 쌓았기에, 기원전 240년대에는 시칠리아 섬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했다. 로마군은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을 통해 터득한 공성술을 총동원해 릴리바이움을 공격했지만, 방어력이 워낙 탄탄한 데다가 이곳만큼은 절대로 잃을 수 없다고 여긴 카르타고군이 히밀코 장군의 지휘하에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오랜 공세에도 피해만 누적될 뿐 좀처럼 공략될 기미가 없자, 로마군은 도시를 봉쇄하여 적을 굶겨죽이기로 했다. 하지만 릴리바이움은 항구도시라서 바다를 봉쇄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고, 인근의 드레파나 항구에 카르타고 함대가 집결해 있어서 섣불리 해상 봉쇄를 시도할 수 없었다. 이에 기원전 249년의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드레파나의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자정에 123척의 함대를 이끌며 드레파나 항구로 출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수에토니우스 등 로마 역사가들의 저서에 따르면, 풀케르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했다. 그런데 닭들이 좀처럼 모이를 쪼아먹지 않아 병사들이 불안해 하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
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포에니 전쟁에 관한 주요 사료인 폴리비오스의 《역사》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는 점이 의심된다며 후대의 로마 역사가들이 패배의 책임을 신들에게 불경을 저지른 풀케르에게 전적으로 몰기 위해 이 일화를 지어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웬만한 패장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는 로마 정부가 그만은 법정에 소환해 책임을 물은 것을 볼 때 실제로 이런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풀케르의 선두 함대는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에 드레파나 항구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전에 척후선을 통해 적선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아드헤르발은 100척 내지 130척으로 구성된 전 함대에 항구를 떠나 바다로 항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중앙 대열에 있었던 풀케르는 적의 움직임을 뒤늦게 확인하고 전 함대에 항해를 중단한 후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로마 함대는 야밤에 이동하느라 대열이 흐트러졌고 항해술이 여전히 미숙했기 때문에 어떤 함선은 앞서가려 하고, 어떤 함선은 멈추려고 하다가 서로 뒤엉키고, 심지어 충돌하기까지 하는 등 대혼란에 휩싸였다.

아드헤르발은 혼란에 빠진 로마군의 선봉 함대를 그대로 지나쳐서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다가 드레파나 시와 2개의 작은 섬 사이를 통과해 넓은 바다에 도착한 후 로마군이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남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해 로마 함대와 평행한 전선을 형성했다. 그 후 일부 함대를 로마군의 후방으로 이동시켜서 도주로를 차단한 뒤 총공격을 감행했다. 로마 함대는 순식간에 측면과 후방을 공격당했고, 많은 선박이 공격을 받아 침몰하거나 좌초했고, 일부 선원과 군인들은 공포에 질려 바다로 몸을 던졌다. 풀케르는 참패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30척만 챙겨 겨우 빠져나갔고, 나머지 전선들(93척)은 침몰하거나 나포당했다.

아드헤르발은 드레파나 해전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뒤 70척의 퀸퀘레메를 이끌고 온 카르탈로에게 30척을 추가해준 뒤 릴리바이움을 포위한 로마군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카르탈로는 즉시 릴리바이움 해상으로 출격해 여러 로마 선박을 파괴한 뒤 소수의 전함들이 호위하는 80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로마 수송부대를 막아섰다. 로마 수송부대는 전함들이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전멸하는 동안 판티아스 항구로 피신한 뒤 카르탈로의 카르타고 함대와 대치했다. 그러다가 풀케르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가 이끄는 120척의 로마 전함들이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르탈로는 두 함대 사이의 어느 해안에 정박했다.

풀루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로마군을 구하기 위해 판티아스로 이동하지 않았고, 판티아스에 주둔한 수송 함대 역시 풀루스와 합류하길 꺼렸다. 그러던 중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카르탈로는 즉시 동쪽으로 항해했다. 카르탈로가 떠나자 그제야 판티아스로 향한 풀루스는 수송 함대와 합세한 뒤 릴리바이움으로 이동했지만, 카마리나 인근에서 폭풍우를 만나 풀루스가 탄 기함을 포함한 2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이 파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풀루스는 새 점술을 소홀히 해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같은 참변을 입었으며, 함대를 잃은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풀루스는 폭풍을 피해 릴리바이움을 포위한 로마군과 합세한 뒤 시라쿠사에서 육로를 통해 군대를 위한 보급품을 가져오게 한 후 에릭스 시를 점령하고 아켈로스를 요새화했다고 한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풀루스는 카르타고군에게 생포된 뒤 기원전 247년 포로 교환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지만, 로마로 돌아온 뒤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고 한다. 이렇듯 고대 사료에서 여러 상반된 기록이 혼재하지만, 이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풀케르는 로마로 돌아온 뒤 풀루스가 부재한 상황에서 상황을 수습할 독재관을 지명하라는 원로원의 지시를 받고 자신의 전령이자 해방노예의 아들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글리키아를 독재관으로 지명했고, 글리키아는 풀케르를 독재관으로 추대한 뒤 기병장관을 맡았다. 이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이 풀케르를 비난했고, 기원전 248년 호민관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등의 고발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큰 벌금이 부과되자 자살했다. 여기에 풀케르의 여동생인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
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드레파나 해전에서 승리한 후, 카르타고 함대는 기원전 248년부터 이탈리아 해안을 연이어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은 위축되어 릴리바이움을 향한 공세를 적극적으로 벌이지 못하고, 카르타고군과 대치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 정부에 의해 시칠리아로 파견된 하밀카르 바르카가 파노르무스 인근의 헤렉테 산을 거점으로 삼고,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면서 시칠리아 주둔 로마군은 궁지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