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이 베스타인 게임에 대한 내용은 베리드 스타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로마 신화의 신
Vesta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스티아와 동일시되었다.
베스타라는 신 자체는 고대 로마가 퀴리누스 언덕에서만 놀고 있던 당시부터 있었지만 활동 범위가 고대 그리스와 겹치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신성을 갖는 신들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1.1. 베스타의 무녀
베스타 여사제관 유적 | 베스타 신전 유적 |
Vestal Virgin
고대 로마에서 성스러운 불을 관리하고 여신 숭배 의식을 집전하는 베스타의 무녀는 베스타의 처녀(Virgo Vestalis)로 불리며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불은 단순히 불이 아니라 로마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관리자인 무녀들의 책임도 막중했다. 실수로 불을 꺼뜨리면 사형에 준하는 책형에 처해졌으므로 이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불씨를 지켰다.
무녀의 정원은 18명인데 그 중 3분의 1은 견습생, 다른 3분의 1은 이들을 교육하는 역할이기 때문에(자세한 것은 후술) 실제로 무녀로 활동하는 이들은 6명이었다.[1] 원래는 귀족 중에서만 선발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딸을 보내려는 귀족들이 줄어들면서 평민 중에서도 뽑기 시작했는데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없는 여자아이이고 부모가 로마의 자유시민이며 모두 살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출신이 어떠하든 무녀로 뽑힘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가족과 로마 시민들이 모인 모임에서 후보자 20여 명을 모아 추첨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정했다. 이를 캅치오 의식이라고 하는데 최종 선발 권한은 대제사장에게 있었다.
이들은 뽑힌 뒤 첫 10년간은 베스타 신전의 아트리움 베스타에서 무녀 일을 배웠고(학생) 20년차가 될 때까지는 신성한 불을 꺼트리지 않고 신성한 샘에서 물을 긷고 의식에 사용되는 음식을 준비하고 사원의 성물들을 관리하며 무녀로서의 의식(1년에 최소 9회)을 치렀으며(공무원) 나머지 10년 동안은 갓 무녀가 된 아이들을 가르쳤다(교사).
이들은 반드시 순결을 지켜야 했으며 처녀성을 잃어버리면 무녀와 그 상대인 남자 모두 무거운 형벌에 처해졌는데 실제 사례는 매우 드물어서 1100년 동안 딱 12번 있었다고 한다. 무녀와 관계한 남자는 죽을 때까지 채찍질해 때려죽였으며 무녀 본인은 성 밖 퀴리날레 언덕 위 '악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곳에 생매장당했는데 땅굴을 파 네모진 방을 만들고 화로와 침대, 약간의 물과 식량, 생매장당할 무녀를 넣은 후 문을 닫고 굴 입구 통로를 그대로 메꿔 버리는 것이다. 좁은 방은 그대로 무녀의 무덤이 되었다. 이 형벌을 받은 무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얼마간의 음식과 물로 며칠은 버틸 수 있었겠지만 결국 질식사하거나 그것들이 다 떨어진 뒤 탈수로 갈사했을 것이다. 이렇게 끔찍한 방법을 쓰는 이유는 베스타의 무녀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이며 처벌되기 전에 자결하기도 했다. 실제 성관계에 이르진 않았더라도 무녀들을 조금이라도 유혹하려 드는 남자가 있다면 걸리는 즉시 사형이었다.
이것은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라서 마르스와의 사이에서 고대 로마의 전설적 건국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를 낳은 베스타의 무녀 레아 실비아는 공주와 사촌자매였던 덕에 그 공주 안토의 탄원으로 겨우 죽음은 면하고 투옥되었다고 한다.[2] 투치아(Tuccia)라는 무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누명을 썼을 때 체를 들고 나가 강물을 테베레 강에서 포로 로마노까지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고 퍼오는 기적을 일으켜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슷한 이야기로 무녀 클라우디아 퀸타(Claudia Quinta)는 띠만 사용하여 바지선을 강 위로 성공적으로 끌어 올리는 기적으로 결백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다만 평생 이런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며 나이가 들면 무녀직에서 물러나 생활할 수 있었다. 적게는 6살에서 많게는 10살 때 뽑혀서 30년간 무녀로 지냈다고 하므로 은퇴 시기는 대개 30대 후반이었다. 은퇴한 뒤에는 결혼도 할 수 있었는데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로마의 대사제(폰티펙스 막시무스)가 아버지 역할을 하고 로마 귀족과 결혼을 주선해 주었으며 은퇴한 베스타 무녀와 결혼하는 것은 로마 남자들의 로망이자 영광이었지만 대부분의 무녀들은 은퇴 후에도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엄격한 규율을 요구받은 대신 그만큼 대단히 존중받았다. 당시대 최첨단 난방 및 배관 시스템이 있는 로마 수도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건물에서 늘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 수 있었고, 뛰어난 의사에게 당대 최고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동시대의 평범한 여성들은 상상도 할 수 없던 권리를 여자의 몸으로 가질 수 있었다. 막대한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큰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3] 재산 전부가 무녀 본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유언장을 작성하여 재산을 자신의 마음대로 분배할 수 있었다. 당시는 가부장제가 하늘을 찔러서 여성이 이런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베스타 무녀들의 권리는 분명 큰 특권이었다.
운동 경기나 연극 공연 같은 볼거리에선 언제나 특등석을 배정받았고, 외출할 때는 군인들의 호위를 받고 이륜마차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무녀들이 지나갈 때면 누구라도(심지어 집정관조차도) 길을 비켜 주며 경의를 표해야 했다. 석방과 사면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는데 베스타의 무녀가 만진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중이던 사형수가 베스타의 무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바로 그 자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을 정도다.[4] 또한 황제 다음으로 검투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어, 콜로세움에서 검투 경기가 개최되었을 때 그 자리에 황제가 없었다면 패배한 검투사를 살려줄 수 있는 권리는 베스타 무녀에게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스타의 무녀의 육신은 그 자체로도 신성했기에, 무녀를 다치게 하는 자는 사형을 받았고 무녀가 하는 말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모두에게 신뢰받았기 때문에 법정에서 증언을 요구받을 때 증인 선서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정말 어마어마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여성이 투표를 하거나 공직을 맡을 수 없는 등 공적 생활에서 차단되었던 시기임에도 무녀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천하의 독재자 술라조차도 무녀들이 카이사르를 살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무시할 수 없었고 고위 정치가들은 중요 국가문서나 유언장을 비밀 보장을 위해 베스타 무녀들에게 맡기곤 했다.
포로 로마노에는 베스타 신전과 무녀들이 생활하던 여사제관이 있었다. 로마의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 때 모신 후 국가 로마와 함께한 성화는 천 년 동안 꺼지지 않고 보관되었지만 394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전의 고대 로마 다신교를 금지한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명령으로 꺼졌다.
참고로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악행들 중에 이 베스타의 무녀를 건드린 것도 있다.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원래 있던 레반트 지역에서는 신을 모시는 무녀들과 신도들이 풍요를 기원하고 신의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난교 의식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는데 이 관습을 그대로 베스타의 무녀들에게도 적용시킨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는 바알 등을 숭배하는 레반트 사제들의 이야기지 베스타의 사제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강제로 하게 만든 것이기에 되려 로마 시민들의 공분만 일으켰다.
1.2.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들
- 다키스트 던전 - 성녀(Vestal): 베스타의 무녀 Vestal에서 따왔다.
- 데스티니 차일드 - 베스타
- 라다의 자동차 모델 라다 베스타
- 소행성 베스타
- 파이브 스타 스토리 - 타이카 우주에 베스탈 버진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