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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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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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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모든 이교 관습, 문화, 전통 등을 근절함으로써 모든 신민이 기독교 아래에서 통합되게 하고자 시행한 일련의 정책.

2. 배경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로마 황제들은 자발적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국가 정책에 기독교 진흥을 반드시 반영했다. 그 결과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밀라노 칙령 후 70년이 지난 380년대에는 제국 인구의 50% 이상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고 조상들이 믿던 신들을 계속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으며, 사회 지도층 내에서도 이런 인물들이 많았다.

379년 1월 19일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동방 황제로 선출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니케아파 신자였고 모든 제국 신민이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발칸 반도를 휘젓는 고트족 토벌에 전념하는 상황에서 이교도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사원이나 이교도 조각상을 유용한 공공 자원으로 보존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이교도인 에우톨미우스 타티아누스를 아이깁투스(이집트) 치안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능력있는 이교도들을 중용했다. 여기에 지난날 기독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던 이교 신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희생제 금지령을 내리거나 짐승의 내장을 꺼내 점을 치는 등 미신 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권고' 수준에 그쳤다.

테오도시우스가 집권 초기에 초점을 맞춘 대상은 이교도가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 암약하는 이단을 정죄하는 것이었다. 380년 2월27일 그라티아누스와 함께 삼위일체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어리석은 미치광이"로 규정하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니케아파가 아닌 모든 기독교, 특히 아리우스파를 억압하고 그가 다스리는 동방 영토 전역에 니케아 정교회를 세우는 데 사력을 다했다.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 신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서 제국 내에 그의 정통성을 시험하는 반란이 종종 일어났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 정책을 밀어붙였다.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역시 남편의 뜻을 받들어 공개적으로 병자, 고아(특히 소녀), 과부,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들에게 정통 교리를 설파하고 아리우스파를 배척하라고 가르쳤다.

반면에,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이교 관습을 억압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로마부터가 로마 다신교의 온상지였고, 서방에서의 기독교의 위세는 동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인 만큼 이교도들의 힘을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라티아누스는 모든 미신적 관습을 금지하고 마녀 및 마술사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오랜 세월 로마의 신들을 모시던 최고 신관, 즉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에서 물러난 뒤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로원에 설치되었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을 폐쇄했으며, 로마 건국 때부터 줄곧 함께 했던 베스타 신전의 해체를 시작했다. 382년, 그라티아누스는 이교도 사제들이 재산을 물려주는 걸 금지했고 모든 이교도 사제들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했다. 또한 모든 이교도 사원들과 성소들은 정부에 의해 몰수되며 그들의 수입은 황실 재산으로 전용된다고 선언했다. 오랜 세월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정책에 큰 충격을 받았고, 원로원은 승리의 제단을 재건하고 베스타 신전을 복구시켜 달라고 청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 관료들도 제국의 분란을 염려해 황제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라티아누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급기야 교회법을 따르지 않는 관료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383년, 브리타니아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그라티아누스의 이교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대거 가담했고, 그라티아누스는 결국 반란군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발렌티니아누스 2세 마저 축출하려던 막시무스에게 전령을 보내 그가 이탈리아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용인해준다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막시무스의 지위를 인정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막시무스는 384년 평화 조약을 체결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 서부에서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자신은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황제로 공인되었다. 이후 막시무스는 이교도들을 온건하게 대하는 정책을 실시해 그들의 환심을 샀다. 특히 386년에 사원들과 축제들을 돌보는 것은 이교도들의 독점적인 특권이라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387년, 막시무스는 평화 협약을 위반하고 이탈리아로 진격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축출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에게 선전포고했고, 388년 7월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해 막시무스를 공격했다. 막시무스는 이에 맞서 사브 강 근처의 사스키아에 진영을 두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몇 번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했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에 프랑크 족이 북부 갈리아를 침략하면서 막시무스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달아났으나 적에게 포위되자 항복했고 자비를 간청했지만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 전체의 권력을 손에 쥔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가 이교에 온건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응해 자신을 기독교 수호자로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이교 탄압 정책을 단행했다.

3. 전개

389년, 테오도시우스는 여전히 기독교화되지 않은 이교도들의 축일은 축일로 인정받을 수 없으니 근무일로 삼겠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391년에는 피를 바치는 제사의 금지를 재차 강조하며 "아무도 성소에 가거나, 사원을 거닐거나,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경배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서방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391년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조언에 따라 이교도 사원들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그라티아누스가 파괴했던 승리의 제단을 복원해달라는 원로원의 요청을 거부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일대를 관장하던 마테르누스 시네기우스 총독은 군인들을 동원해 그 일대의 사원들을 파괴하거나 폐쇄했다. 아파메아의 총독 마르켈루스는 이를 본받아 아파메아 시의 제우스 사원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것은 사원들을 공공 장소로서 보존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이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그들을 처벌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에 기독교도들은 이교도들을 공격해도 황제가 용인할 거라고 여기고 이교 성소, 신전들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특히 391년애 아이깁투스 속주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반 이교도 폭동이 일어나 여러 신전이 파괴되었으며, 세라피스 신을 모사한 흉상이 전부 파괴되고 그 자리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392년, 테오도시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교도 희생이나 숭배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표했다. 그는 궁정 관리들과 치안관들이 불로 라레스(Lares)를, 포도주로 게니우스(Genius)를, 향으로 페나테스(Penates)를 경배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만약 사원에 들어간 자가 있다면, 초범일 경우 금 15파운드의 벌금을 지불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위반할 경우 종교 재판에 회부했다. 여기에 모든 형태의 점성술을 금지했으며, 마니교인들이 유언장을 작성하거나 유산을 얻을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을 잡는 즉시 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하게 했다.

392년 5월 15일, 마기스테룸 밀리툼을 맡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와 심한 갈등을 벌이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돌연 사망했다. 아르보가스트는 그가 비엔나 별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공표했지만, 대부분의 당대 기록은 아르보가스트가 직접 황제를 죽였거나 근위대를 매수해 시해하게 했다고 추정한다. 암브로시오는 장례식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사실상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트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암브로시오와 아르보가스트와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일전에 자기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보호자로 삼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인정받기 원했는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한 후 3개월이 지나도록 새 황제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아르보가스트는 반기를 들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오르지 않고 친구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에우게니우스는 서기 392년 8월 22일 황위에 오른 뒤 테오도시우스가 임명했던 제국 내의 행정관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선임했다. 다른 행정관직도 원로원 계급 출신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비리우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이탈리아 근위구장을 맡았고, 아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로마 관구장을 맡았다.

에우게니우스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도였으나, 실제로는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 다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지난날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승리의 제단을 복원했다. 또한 그가 임명한 이교도 행정관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오스티아의 헤라클레스 신전을 재건했으며, 이교도들의 축제를 후원했고, 로마의 베누스 신전의 재헌정을 이끌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는 에우게니우스를 타도하여 기독교를 구하기로 마음먹고, 394년 서방 원정을 단행해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를 처단하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뒤 로마에 입성한 테오도시우스는 원로원을 소집한 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유피테르를 모실 것인지 양자택일하라"고 명령했다. 의원들은 감히 황제의 뜻에 거역하지 못하고 "폐하의 뜻에 따르겠다"라고 화답했다. 그리하여 이교도 의식의 공적 수행을 위해 적립되었던 모든 국가 기금이 회수되었고, 다시는 이교도 의식의 공공 행사나 이교도 사원의 유지 보수를 위해 국고를 쓰지 않는다는 법안을 발표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 법안이 통과된 날 의원 한 명이 자택에서 단검으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고 한다.

4. 결과

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는 그동안 기독교와 공존하던 이교의 입지를 약화시켜 점차 소멸되는 데 기여했다. 18세기 후반 로마 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에드워드 기번은 고대 천재들의 유산이 우상 숭배 파괴라는 명목으로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다며, 기독교로 인해 그리스-로마 문화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엔 이교 박해의 수준이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43건의 문헌 자료에서 사원이 파괴되었다는 언급이 있었지만, 고고학 연구를 통해 확인된 것은 4건에 불과했다.
눈에 띄는 사건만 보고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그보다는 의례를 통해 공공 영역에 존재하던 고대 종교의 역할이 차츰 작아지며 종국에는 사라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이다.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80-81쪽
사실 테오도시우스의 법에서는 이교 사원에 더 이상 국가 기금을 쓰지 않는다는 내용은 있지만 사원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은 내려진 바 없었다. 마테르누스 시네기우스, 마르켈루스 같은 총독들이 개별적으로 파괴를 자행하고, 기독교 폭도들이 이교 사원을 습격해 파괴한 일이 종종 벌어지긴 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상황일 뿐이었고 대부분의 사원은 방치되거나 교회로 개조되었다. 가령 판테온은 '산타 마리아 아드 마티레스' 교회로 개조되었으며, 로마의 이솔라, 산 바실리오, 산 로렌초, 산타 마리아 데 세쿤디체리오, 산 니콜라, 산 세바스티아노 알 팔라티노, 산토 스테파노 델레 카파렐라, 산티카 프란체스코 교회 모두 로마 신들을 섬기던 신전이었다.

한편, 테오도시우스는 사람들이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금지했다. 수학과 천문학 모두 점성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히에로클레스, 요한네스 필로포누스, 심플리키우스, 소 올림피오도루스 등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이후에도 천문 관찰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수학을 가르치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 대한 긴 논평을 썼다.

테오도시우스는 오랜 세월 이어지던 올림피아 제전을 금지한 황제로도 여겨진다. 393년 마지막 대회를 끝으로 어떠한 문헌 기록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올림피아 제전을 금지했다는 걸 명확히 입증할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올림픽 경기가 이후에도 열렀다는 것을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올림피아 제전 경기 중 하나였던 경마 대회가 열리던 날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교 관습을 금지한 황제의 뜻에 따라 제우스 등 이교 신들을 경배하는 의식은 거행되지 않았지만 경기는 계속 열리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리는 전차경주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인기를 상실하고 사라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품었으며, 기독교 저술가들은 그의 치세에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펼친 이교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교도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쇠퇴는 오랜 세월 로마를 수호했던 신들을 저버렸기 때문이라며 기독교인들을 비난했는데,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대표적인 이교 역사가 조시무스는 테오도시우스로부터 100년이 지난 아나스타시우스 1세 치세에 활동했다. 고고학자들은 테오도시우스의 치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6세기에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대부분에서 이교 행사가 공공연히 벌어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교회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자 노력했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에는 수백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