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조시무스 (영어: Zosimus, 그리스어: Ζώσιμο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코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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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제국에 보기드문 이교도로서 로마 제국의 역사를 기록했다.2. 생애
전반적인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그리스 문체를 능숙하게 사용한 것을 볼 때 유복한 집안에서 교육을 잘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시무스'라는 이름은 고대 세계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았지만, 아스칼론과 가자에서 몇몇 '조시미(Zosimi)'가 알려졌다. 그도 이와 비슷한 지역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9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에 따르면, 조시무스는 코메스 신분으로 황제를 섬겼다고 한다. 이는 그가 베레투스(현재의 베이루트)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법률 학교를 다녔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3. 새로운 역사( Ἱστορία Νέα)
조시무스의 저서 <새로운 역사>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시기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가 에우스타티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통치를 기술할 때 조시무스의 저서 '새로운 역사'를 참고했다. 동로마 역사가들은 대체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황제의 통치에 대해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프로코피우스 제외), 에우스타티우스는 유스티누스 1세 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조시무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시대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498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도입했던 세금 크리사르기론(chrysargyron)을 폐지했는데, 과거 시제로 이것에 대해 언급했다. 이를 통해 그가 498년 이후에 <새로운 역사>를 집필했음을 알 수 있으며, 유스티누스 1세가 즉위한 518년 이전에 출간되었을 것이다.<새로운 역사>는 그리스어로 집필되었으며, 총 6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아우구스투스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이르는 초기 로마 황제들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했다.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갈레리우스의 즉위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까지의 기간을 좀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제5권과 6권은 프리스쿠스 아탈루스가 물러난 395년부터 410년 사이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그는 좀더 쓰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제 6권은 아쉽게도 로마 시가 알라리크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끝나버린다.
첫 단락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폴리비오스의 <역사>와 완전히 상반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폴리비오스는 로마 제국의 부흥에 관해 서술했지만, 그는 로마의 쇠퇴를 다룬다는 것이다. 야만족이 제국 서부를 점령하고, 제국이 점점 불행해지고 있으니, 제국은 이미 멸망의 길로 가고 있으며 장래에 무너지고 말 거라고 봤다. 그가 보기에 로마의 몰락은 선한 신들을 거스른 데서 예견되어 있었다. 선한 신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정의롭고 고결할 때 호의적인데, 그들을 배제해버렸으니 재앙이 닥쳤다는 것이다. 특히 제5권에서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알기 쉽게 설명하건데,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이 현재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한 첫번째 원인이었다.
또한 그는 수도자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수도자들은 합법적인 결혼을 배제해 많은 도시와 마을을 미혼 남성으로 채운 자들이며, 전쟁이나 다른 일에 봉사할 수 없다. 이 자들은 광대한 땅을 손에 넣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을 구실로 (중략) 다른 모든 사람을 거지로 전락시켰다.
제5권의 끝단락에서 알라리크가 평화 조건을 제시했지만 로마 당국이 황제의 이름으로 야만인 지도자와 절대 조약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 대목을 기술하며 냉소적인 평을 내렸다.
만약 그들의 맹세가 신에게 비롯된 것이었다면, 그들은 신의 은총에 의지하여 맹세를 풀어달라면서 용서를 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맹세를 어기는 건 전혀 합법적이지 않았다.
학문이 번성하고 신들이 존경받는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때는 신들이 보호해주셔서 제국이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을 저버렸으니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단정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황제들의 결점과 범죄를 맹렬히 비난했다. 가령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는 아들 크리스푸스와 아내 파우스타를 잔혹하게 죽인 후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기술하면서, 오직 기독교만이 콘스탄티누스가 필요로 했던 용서를 베풀 수 있다고 빈정거렸다. 이러다보니 그가 후기 로마 제국의 역사를 실제보다 훨씬 암울하게 왜곡한 면이 많다며, 신뢰성에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3세기와 4세기 로마 제국의 역사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가 국교로 굳어진 시대의 보기드문 이교도 로마인으로서, 기독교적인 관점에 치우친 다른 역사가들과는 색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군인 황제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료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대의 중요한 문헌 자료로 취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