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카마세이(Andrea Camassei, 1602 ~ 1649) 작, <루페르칼리아>, 1635.
1. 개요
Lupercalia. 로마 시를 정화하고 여인들의 건강과 다산을 촉진하기 위해 매년 2월 15일에 열린 고대 로마의 축제.
2. 기원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로마를 건국한 뒤 자신과 쌍둥이 형제 레무스가 암늑대에게 양육된 팔라티노 언덕 인근의 '루페르칼레(Lupercale) 동굴 앞에 암늑대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그러던 중 로마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결혼한 남녀를 에스퀼리누스 언덕 기슭에 있는 주노의 신성한 숲으로 행진한 뒤 그곳에서 엎드려 절하며 주노에게 탄원하게 했다.이에 주노는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통해 "여인들이 신성한 염소에 의해 관통되어야 임신할 수 있다"라는 신탁을 내렸다. 다들 이 신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에트루리아의 점쟁이가 염소 한 마리를 잡은 뒤 가죽을 벗겨서 채찍으로 만든 후 여인들의 등을 치라는 거라고 해석했다. 그의 말을 따라 하니 과연 10달 후에 여인들이 아이를 낳았다. 이후 로물루스는 여인들이 루페르칼레 동굴에서 출발해 로마 시가지를 돌며 가죽 채찍을 맞게 했고, 이것이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메르쿠리우스 신과 님프 카르멘타의 아들인 에반드로스가 아르카디아의 팔란티움에서 쫓겨나 이탈리아에 들어온 뒤 아르카디아에서 행해지던 의식을 팔라티노 언덕에 거주하던 현지인들에게 소개했다. 의식에 참가한 이들은 옷을 입지 않고 음부를 판 신을 기리기 위해 치러진 제사에서 희생된 염소의 가족으로 덮은 채 달리기 경주를 했다. 이 의식이 훗날 루페르칼리아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리카이온 축제와 루페르칼리아 축제간의 유사성에 주목한 고대 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추정된다.
'루페르칼리아(Lupercalia)'라는 명칭은 라틴어 용어 'lupa(늑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원과 의미는 모호하다. 유스티누스는 다산의 신 루페르쿠스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기록에는 그런 신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4세기의 이교도 학자 세르비우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대한 논평에서 마르스가 레아 실비아와 성관계를 맺어 임신시킨 장소가 루페르칼(Lupercal)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루페르칼리아라는 명칭의 유래였을 수도 있다.
3. 의례
고대 로마인들은 3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고, 2월은 낡은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2월 15일은 디에스 페브루아투스(Dies Februatus: 정화의 날)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날에 열리는 루페르칼리아 축제는 정화를 위한 의식으로 취급되었다. 이 축제에 참여한 이들이 어느 신을 숭배했는지에 대해 고대 역사가들은 판, 바커스, 주노 등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여러 신들을 제시했으며, 일부 저자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섬기고 로마인들도 2월의 정화를 상징하는 신으로 모신 페브루스(Februus)를 기리기 위해 의식이 행해졌다고 주장했다.루페르칼리아 축제에 사용된 희생동물은 주로 로마인들에게 성욕과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염소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호색한 신 중 하나로 뽑히는 판은 머리에 염소의 뿔이 달려 있고 하반신이 염소의 몸통과 다리로 이뤄졌다고 묘사되었다. 루페르칼리아 축제를 담당하는 사제인 루페르키(Luperci: 늑대의 형제)는 축제 당일에 루페르칼레 동굴 앞에 세워진 늑대 동상 앞에서 염소 및 개를 제물로 바쳐서 제사를 치른 뒤, 자신들의 이마에 염소의 피를 발랐다. 이들은 국부를 염소 가죽만으로 가린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벌거벗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들이 벌거벗은 것은 빠르게 달려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페르키는 루페르키 퀸크티알레스(luperci Quinctiales)와 루페르키 파비아니(luperci Fabiani)로 구분되었다. 퀸크티알레스는 로물루스를 상징했고, 파비아니는 레무스를 상징했다고 전해진다. 루페르키를 맡은 이들은 대개 20세에서 40세 사이의 청년이었다.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소달레스 루페르키(Sodales Luperci)'라고 불리는 고위 사제들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희생 동물의 가죽은 루페리키들이 채찍으로 사용하기 위해 여러 조각으로 절단되었다.
그 후 루페르키들은 희생 동물의 고기를 뜯어먹고 술을 마신 뒤 늑대 가면을 머리에 쓰고 페브룸(februum)이라 불리는 채찍을 든 채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가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주위에 도열한 사람들을 향해 채찍질했다. 그렇게 팔렌티노 언덕을 반시계 방향으로 하루종일 뛰어다니던 루페르키들은 날이 저물 무렵에 콘수스(Consus: 곡식 수확을 관장하는 신)의 제단과 라레스(Lares: 가정과 들판, 다산의 수호신)의 성소를 지나 동굴로 돌아간 후 해산했다고 한다.
남자가 채찍을 맞으면 건강해지고 여자가 맞으면 다산할 수 있다는 관념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다들 피하기는 커녕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많은 고귀한 젊은이들과 행정관들이 벌거벗은 채 도시를 뛰어다녔고, 고귀한 여인들은 채찍을 맞으면 임신한 사람은 순산할 수 있고 불임인 사람은 임신할 수 있다고 믿고 루페리키들 앞에 서서 채찍으로 내리쳐달라며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이때 채찍을 맞아서 흘린 피는 염소의 우유에 적신 양털 조각으로 닦았다.
루페르칼리아는 로마 외에도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 기념되었다. 벨레트리, 팔레스트리나, 님스 등 여러 도시에서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열린 것을 기념하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4. 축제의 변혁과 쇠락
종교학자 아그네스 키르숍 레이크 미카엘(Agnes Kirsopp Lake Michaels, 1909 ~ 1993)은 저서 <페르칼리아의 형태와 해석>에서 루페르칼리아 축제는 기원전 5세기에 2월이 로마 달력이 추가된 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했다. 또한 본래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뜻으로 엄숙하게 치러졌지만, 모종의 시기에 젊은 기혼 여성이 축제 때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성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나중에는 정화 의식보다는 다산 축제의 성격이 더 강조되었고, 외설적인 춤과 노래, 음란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졌다.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페르키 율리아니(Luperci Juliani)를 추가해서 루페르키 전원의 리더를 맡게 했다. 기원전 44년 2월 15일 루페르키 율리아니로 처음 선정된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벌거벗은 온몸에 기름칠을 한 채 거리를 뛰어다니며 채찍질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이에 대해 그가 술 취한 채 나체로 돌아다니며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꼬락서니를 보기 괴로웠다고 비꼬았다.
그렇게 축제를 한창 주도하던 안토니우스는 연단에 앉은 채 행사를 지켜보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씌우며 "백성이 이것을 나를 통해 독재관에게 바칩니다."라고 외쳤다. 일부 군중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지만, 대다수는 침묵했다. 카이사르는 분위기를 읽고 안토니우스에게 왕관을 돌려줬다. 안토니우스가 재차 권유했지만 역시 거절하면서, "유피테르야말로 이 왕관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군중은 이에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카이사르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가 시민들이 카이사르가 왕이 되는 걸 원하는지를 알아보려고 연기한 거라 의심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카이사르 암살 후 벌어진 내전을 수습하고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루페르키들이 유부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강간하는 등 일탈 행위를 벌이는 바람에 공공 도덕이 타락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고대의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으로 돌아가 신들에게 진정으로 경배드리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루페르칼리아의 진행 과정에 손을 댔다. 우선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속한 각 씨족에서 유피테르의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를 뽑아서 축제에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했다. 여기에 수염이 없는 젊은 남성이 루페르키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축제에 참석한 사제들이 개나 염소를 만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리고 루페르키들이 머리에 염소 가면을 쓰는 것 역시 금지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이러한 조치는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루페르칼리아 축제는 이후에도 문란하고 방종한 대표적인 축제로 꼽혔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자리잡은 후에도 이 축제는 계속되었다. 푸리우스 디오니시우스 필로칼루스가 집필한 연대기 및 달력 텍스트인 <354년 크로노그래프>에는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기독교 축제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1년에 모든 비기독교 숭배와 축제를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지만, 로마인들은 이후에도 이 축제를 즐겼다.
494년, 교황 젤라시오 1세는 루페르칼리아 축제를 대표적인 이교 축제이자 문란하고 퇴폐적인 악습이며 전염병 창궐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비난하며, "오직 사악한 폭도들만이 축제에 참가한다"고 단언하며 폐지를 촉구했다. 원로원 의원 안드로마키우스가 이 축제는 로마의 안전과 복지에 필수적이라며 항의하자, 교황은 경멀어린 어투가 담긴 답신을 보냈다.
"이 의식이 건강에 좋다고 본다면 조상의 방식대로 축하하시오. 희극을 아주 잘 할 수 있는 당신은 알몸으로 달리시오."
결국 루페르칼리아는 교황의 뜻대로 금지되었고, 젤라시오 1세는 루페르칼리아 축제를 대체하기 위해 2월 2일에 촛불 행렬이 거행되는 정화 축제를 새로 조직했다. 이 예식은 루가의 복음서 2장 22-39절에서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하면서 예수를 "만국의 빛"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루페르칼리아와 비슷한 축제는 이후에도 수 세기 동안 종종 벌어졌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10세기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