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Scire leges non hoc est verba earum tenere, sed vim ac potestatem.
법률을 안다는 것은 법률의 문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효력과 권능을 이해하는 것이다.[1]
Digesta 1.3.17. Celsus libro XXVI digestorum.
학설휘찬 제1권 제3장 제17절. 켈수스 『학설집』 제26권 발췌.
법률을 안다는 것은 법률의 문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효력과 권능을 이해하는 것이다.[1]
Digesta 1.3.17. Celsus libro XXVI digestorum.
학설휘찬 제1권 제3장 제17절. 켈수스 『학설집』 제26권 발췌.
로마법 대전(로마法大全, 라틴어: Corpus Iuris Civilis)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으로 로마 제국 권역 내의 판례법 및 학설을 집대성하여 정리, 분열과 일탈 없이 온전하게 로마 제국의 법로써 작동하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편집하여 정리된 법적 문서의 모음을 말한다.
로마법 대전은 "법적 권위를 가진 문서의 모음"으로써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 하에 여러 권위 "주체"를 합작시켜 하나의 권위로써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진 일종의 "권위 뭉치"와 비슷한 것이지만, 하나로 통합된 "권위"가 성립됨에 따라 해 로마 제국 내에서 서로 다른 서적과 구전되는 관습으로 두루뭉실하게 법이 적용되는 것이 아닌, 로마 제국 자체라는 통합된 권위 하에서 법이 적용되도록 하였으며, 그에 따라 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 로마법 대전을 하나의 법전으로 삼아 법이 집행될 수 있게 되었다.
고전 시대로부터 누적되온 각종 로마법과 황제의 칙령 등 법적 권위를 가진 "조항"들을 총망라하여 하나의 법적 권위로 결집시킨 것이 로마법 대전으로, 집필된 이례 동로마 제국에 법을 논하기 위해 참고하는 기준이자 "법" 그 자체로써 권위를 행사하였다.
7세기 이슬람의 침공 등의 혼란을 겪으며 후대의 제국 실정에 맞게 에클로가 등의 법령집이 발간되기도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이 중흥기에 들어선 9세기에는 바실리카 법전이 편찬되어 로마법 대전을 잇게 된다.
로마법 대전은 '현대적 법전'이 등장하기 이전 전근대 법적 문서중 가장 진보되고 신뢰받는 문서이다.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집전된 프랑스 민법, 그리고, (프랑스 민법의 물리적 전파의 영향과, 동시에 그에 대한 반발이 집합되어 집전된) 독일 민법의 등장으로 현대적 대륙법계 법전이 보편화되어 지금의 인류 문명이 아는 바로 그 "법전"의 형태를 이루게 된다.
2. 구성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법전을 공포할 당시에는 공포시기도 각자 다 달랐고, 하나의 책으로 묶이지도 않았었다. '로마법 대전'이라는 하나의 책 개념으로 묶은 사람은 디오뉘시우스 고토프레두스(Dionysius Gothofredus)[2]로, 교회법을 집대성한 '교회법 대전'(Corpus Iuris Canonici)에 대응하여 붙인 이름이다.[3]로마법대전은 크게 법학제요(法學提要, Institutiones),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4], 칙법휘찬(勅法彙纂, Codex), 신칙법집(新勅法集, Novellae)으로 구분한다.[5]
2.1. 법학제요(Institutiones)
Institutions of Elements[6] 서기 533년 11월 21일 공포.트리비아노스, 테오필로스, 도로테우스에 의해 로마법 입문 교재로써 집필되었다.
3분의 2 가량이 가이우스가 저술한 법학제요(Gai Institutiones)[7]와 일용법서(res cottidianae)를 인용한 것으로, 가이우스의 저술 자체가 "법을 설명한 권위"로써 신뢰 받기 때문에, 곧 서술 자체로 "법적 권위"를 인정 받기 때문에, 이를 착실히 검증, 인용, 편집하여 가르친 법학 제요는 그 자체가 법률로써 작용하는 권위를 가졌다.
대륙법 체계에서 학설휘찬과 함께 두 기둥을 이루는 것이 법학제요일 정도로 중요하다. 법학을 가르치기 위한 책인 법학제요과 학설휘찬과 함께 동일한 법[8]임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었음에서 법학제요와 학설휘찬 모두 엄청난 권위와 신뢰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2. 학설휘찬(Digesta)
533년 12월 16일 공포.로마법학자들의 학설집이다. 그 때까지 전해진 법학자들의 문헌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으로서[9], 학설유집(學說類集)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로마법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현대적인 법전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성문법이라해도 하나의 "책"에 법 조항을 체워넣어 출판하는 방식으로 법이 전파되지 않고, 여러모로 두루뭉실하게 전해져오곤 했다. 이에 따라 통합된 권위 하에서 법이 공포되더라도 지역별로 일탈이 발생하기 십상에, 이미 그동안 쌓여온 법을 다 추적해서 문장을 고쳐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하는 권위에 손을 대는 행위로써, 법적 지위를 가진 "문장" 에 대한 무결성 훼손이 될 수 있으며, 이건 엄밀히는 "법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에 가까운고로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즉, 신뢰할 수 있는 법학자들의 문헌들을 신뢰할 수 있는 권위 하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해 진위를 검증하여 인용하면 바로 그게 곧 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장 신뢰 받는 권위를 가진 법학자들의 문헌을, 가장 강력한 권위[10]하에서 가장 신뢰 받는 권위를 가진 당대 법학자들이 검증 후 발췌하여 정리한 학설 휘찬은 학설집이지만 그 자체로 법전의 권위를 가졌으며 실질적으로 하나의 법전으로 취급된다.
실제 내용을 보면, 지금의 연습서(사례집) 비슷한 내용이 가장 많으나, 그 밖에도 지금의 교과서, 주석서, 판례평석과 비슷한 것들도 볼 수 있다. 학설휘찬에 사용된 문장들은, 법률문장이라고 할 때 흔히들 연상하는 것과 달리, 미사여구나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매우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11]
학설휘찬 각 장 제목은이 글 또는 이 글에서 번역해두었다.
2.3. 칙법휘찬(Codex)
초본 서기 529년에 공포, 개정본 서기 534년 11월 16일 공포.로마 제국 황제의 칙령은 그 자체로 "법"이므로 당연히 "법적 권위"를 가진다. 이렇게 "법"으로 작용하는 "칙령" 곧 칙법을 정리하여 묶은 것이 Codex Justinianus, 소위 칙법휘찬이다. 이로써 "로마 제국의 권위 하에 검증된 칙령 법"들의 목록으로써 "이 책을 살피는 것"으로 칙법을 따르고 집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529년에 처음 공포되었으나 몇가지 영 좋지 않은 문제가 발견되어 개정본이 534년에 공포되었다. 529년에 처음 공포한 칙법휘찬을 특별히 구 칙법휘찬(Codex Vetus)이라 부르며, 칙법휘찬(Codex)라고 하면 보통 534년에 공포한 개정 칙법휘찬을 의미한다. 개정 칙법휘찬과는 달리, 구 칙법휘찬의 경우에는 현재 단편만 전해지고 있다.
2.4. 신칙법집(Novellae)
신칙법집은 칙법휘찬 이후의 칙법을 모은 칙법전으로, 유스티니아누스가 편찬한 것은 아니다.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어를 주 언어로 사용했기에, 당시 통용되던 그리스어와 제국 공식 언어인 라틴어가 본문에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3. 영향
로마법대전은 대륙법계 법률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예로 프랑스는 로마법을 계수할 때 법학제요 체계를 바탕으로 프랑스 민법전을 편찬했는데 이를 인스티투치오넨 체계라고 한다. 독일은 학설휘찬을 바탕으로 민법전을 만들었고, 이를 판덱텐 체계라고 한다. 독일의 민법을 계수한 일본의 민법을 다시 계수한 대한민국의 민법 역시 판덱텐 체계를 따른다.정작 당대에는 너무 선진적이었기[12] 때문에 법적용에 난항을 격었다. 전국토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법체계는 기존의 현지 사정에 맞쳐서 지배하던 로마의 지방지배와 상이했으므로 여러 지방에서 반발을 초래했다. 특히 고토수복전쟁 이후 점령지에 살던 로마인들의 반발이 가장 심했다. 벨리사리우스 원정을 격렬히 환호했던 로마인들은 로마법대전에 입각해 적용된 수취구조에 저항하였다. 여기서 도시들의 각자도생이 시작되어서 로마인이란 정체성보단 각 도시 정체성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점령한 고토에 한해선 로마법을 일괄적용하지 않겠다는 칙령이 발휘되고 나서야 점령지가 안정화되었고 지지부진하던 고토수복전쟁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1] 지금의 인류가 아는 그 "현대적 법전"의 양식이 아닌 전근대적 법 뭉치(?)임에도 불구하고 로마법 대전이 하나의 법전으로 인식되고 인정되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 로마법 대전의 내용은 이곳저곳에 흩어진 문구들을 모아놓은 것일 뿐이지만, 바로 그 문구들이 법률의 효력과 권능을 올바르게 기술하고 있음을 보편적으로 인정 받기 때문에 로마법 대전은 그 자체로 법전으로 취급되는 것이다.[2] 1549-1622. 프랑스어로는 드니 고드프루아(Denis Godefroy)[3] 여기서의 형용사 civilis(영어: civil)의 의미는 civitas, 즉 '국가공동체로서의 로마'를 의미한다. 후대에 가면 시민공동체라는 의미가 강해지나, 여기서는 로마법을 말하므로 '국가공동체인 로마'라는 의미가 강하다.[4] 본래 명칭은 Digesta seu Pandectae.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Digest or Digest인데, 휘찬(彙纂)이라는 의미를 라틴어식 표현인 Digesta, 그리스어식 라틴어 표현인 Pandectae로 표기한 것이다.[5] `90년도까지는 현승종·조규창 교수의 번역어와 최병조 교수의 번역어가 학계에서 주로 쓰이되, 학자마다 번역어 사용이 많이 다른 등 혼재되어있던 상황이었으나, `00년 이후부터는 이러한 혼재에서 벗어나 사실상 학자들 사이에 번역어가 합의되어 거의 통일된 상태다. institutiones와 digesta의 번역어 역시, 현재 '법학제요', '학설휘찬'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단, 법전으로 쓰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대전 institutiones와 구분하고자, 가이우스, 파울루스 등이 저술한 institutiones 는 '법학통론'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institutiones의 본래 의미는 '입문'이다.[6] 법의 근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들로부터 세워진 "법적 권위의 기둥"을 가르치는 책 쯤으로 이해 가능하다.[7] 법으로 쓰인 유스티니아누스(로마법대전) 법학제요와 구분하고자, 가이우스의 『법학통론』이라고도 번역한다. 2017년에 세창출판사에서 『법학제요』라는 제목으로 최초 한국어 번역을 출판하였다.[8] 무조건적으로 둘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건 물론 엄밀히는 아니며, 간혹 한 쪽에는 인용되지 않은 '법'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두 문서 모두 로마법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 간의 별다른 모순도 없다는 것.[9] 1500권 분량의 고전원작을 1/30 분량으로 축약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축약한 분량이 성경의 곱절 정도 된다.[10] 로마 제국 황제의 명령.[11] 그 반대로, 칙법휘찬은 문장이 복잡한 편이다.[12] 교통과 통신이 로마법대전을 적용하기엔 너무 부족했고, 따라서 지방에 부임하는 관료들의 부패 또한 단속하기 힘들었다. 벨리사리우스도 군납비리로 원정에서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