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기원전 715년 | 기원전 509년 | 기원전 449년 | 기원전 4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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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라틴어: Gnaeus Domitius Ahenobarb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39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증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동생)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장남)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차남)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6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동기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후임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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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오래된 평민 씨족인 도미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여러 지파 중 개인이름으로 루키우스를 선호해 물려 사용한 아헤노바르부스 가 사람이다. 도미티우스 씨족은 모든 지파들이 개인이름으로 그나이우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사람들은 씨족 가문 전통대로 이 개인이름과 함께 루키우스를 사용했고, 이 개인이름을 그나이우스와 함께 대대로 아들 중 한명에게 물려줬다.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한 사람이 신성한 모습의 쌍둥이 청년을 만나서 그들에게 뺨을 어루만져지자 수염이 붉게 변했다. 이 인물은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빨간 수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그의 후손들에게 통칭이 되었다고 한다.증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기원전 192년에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62년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을 맡아 친로마 성향의 부족 아이두이 족에게 해를 입힌 알로브로게스 족과을 상대로 빈달리움 전투에서 알로브로게스 족을 격파했다. 그 후 기원전 121년 신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와 함께 알로브로게스 족-아르베르니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그보다 높은 직위인 파비우스를 더 높게 평가해 두 사람이 개선식을 거행할 때 파비우스에게는 개선문을 수여했지만 도미티우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118년 식민도시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나르본)를 건설했으며,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연결하는 도로인 도미티아 가도를 건설했고, 기원전 115년 감찰관으로서 원로원 의원 32명을 추방했다. 동생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9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96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에 근무했는데, 제2차 노예 전쟁 직후 시칠리아에서 노예들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한 노예가 사냥용 창으로 멧돼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그 노예를 십자가형에 처해, 너무 잔혹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일로 정치적 입지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고, 기원전 94년 집정관을 맡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내전 때 술라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 마리우스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피살되었다.
학자들은 로마 행정관의 법적 취임 가능 연령 제한을 설정한 빌리우스 아닐리스 법과 집정관을 맡은 때를 고려해 그가 기원전 139년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고고학자들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이름이 표기된 데나리온 동전이 기원전 2세기 말과 1세기 초에 대거 출현한 것을 볼 때, 그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동전 주조관을 맡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다만 그 시기는 고대 문헌에 나와 있지 않다. 프리드리히 뮌처는 기원전 109년에서 104년 사이일 거라 추정했고, 그레고리 섬너는 기원전 118년일 것이라 추정했다.
기원전 104년 호민관을 맡은 그는 킴브리 전쟁에서 패배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로마의 자긍심에 상처를 준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실라누스는 탄탄한 집안 배경에 힘입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편, 그 해에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사망하면서 고위급 사제단의 일원인 아우구르가 비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그 자리를 계승할 거라 예싸앴다. 그러나 당시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다른 사람을 택했다. 이후 아헤노바르부스는 주요 사제단의 새로운 구성원을 폰티펙스 막시무스 개인이 아니라 민회에서 선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103년 달마티쿠스가 사마앟자, 사람들은 그를 폰티펙스 막시무스로 선출했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추종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 모인 귀족 무리에 함께 했다. 기원전 99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96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92년, 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동료 감찰관과 함께 라틴어로 웅변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반포했다. 이 칙령은 수에토니우스의 저서 <문법과 수사학>에 일부 보존되었다.
'라틴 수사학'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과목을 시작한 사람들이 세운 학교에 젊은이들이 가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우리 조상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학교에 갈 것인지를 정했다. 조상의 관습과 성질에 반하여 만들어진 혁신은 잘못되고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학교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학교를 다니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것이 우리에게 반갑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라수스와 아헤노바르부스는 젊은이들이 라틴 학교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으며 그곳에서 받는 교육은 피상적이라며 금지령을 정당화했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정치적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당대 최고의 거물이었지만 기원전 90년대에는 몰락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아마도 라틴 교육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고, 크라수스 등은 제2의 마리우스가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면 아예 라틴 교육 시스템을 봉쇄해야 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조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처음에는 한뜻으로 행동했던 두 감찰관은 곧 서로간의 성격 차이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아헤노바르부스는 우울하고 엄격한 성격인데 반해, 크라수스는 세련되고 다소 경박하며 남을 조롱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크라수스가 자기 집을 호화롭게 장식하면서 6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쏟아붓자, 아헤노바르부스는 그를 나약함과 낭비의 상징이라고 비난했다. 크라수스는 이에 대해 "그의 혀는 철로 만들어졌고, 심장이 납으로 만들어졌으니, 수염이 구리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놀랄 것이 없다"고 조롱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아헤노바르부스가 다시 "크라수스가 얼마 전에 죽은 곰치를 위해 애도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주장하자, 크라수스는 "그는 세 아내를 묻고도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으니 체력이 정말로 없는 모양이다"라고 대꾸했다. 키케로는 포로 로마노에서 행해진 어떤 연설도 이 정도로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 평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91년 마르시인 지도자 퀸투스 포페디우스 실로가 자신이 속한 종족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 10,000명의 무장한 이탈리아인을 대동한 채 로마로 진격했다. '가이우스 도미티우스'는 단독으로 실로를 찾아가서 "그런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말고 원로원에 호소하라. 강압 대신 청원서를 제출한다면, 원로원은 그대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시민권을 부여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로가 이를 받아들여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조국을 구했다고 한다. 도미티우스 가문은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96년 집정관이자 기원전 92년 감찰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밝힌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89년경의 폭티펙스 막시무스는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였으므로 그 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는 세 번 결혼했고 모든 아내보다 오래 살았다고 전해지나 아내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낳았다. 그나이우스는 일찍 사망했고, 루키우스는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정계에서 활약했지만 카이사르의 내전 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편에 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맞서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편 그의 먼 후손 중 내손, 즉 증손자의 손자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네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