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라틴어: Lucius Arrunt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아티나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볼스키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아들) |
참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년 |
전임 | 루키우스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1] |
동기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 |
후임 | 마르쿠스 롤리우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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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제2차 삼두정치의 숙청을 피해 시칠리아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다가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전향한 뒤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활약했다.2. 생애
아티나 시의 부유한 볼스키 귀족 가문 출신이다.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등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을 상대로 해방자 내전을 치를 때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부자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숙청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아버지 역시 살해당했다. 그는 노예와 추종자들을 무장시킨 뒤 이탈리아 해안으로 탈출한 후 시칠리아로 건너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다.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이 체결되면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던 인사들이 사면받자,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향했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 옥타비아누스의 해군 장성으로 활동했으며,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 때 중앙 편대를 이끌고 안토니우스 휘하 해군 장성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와 맞섰다. 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적장 가이우스 소시우스를 처형하려 했다. 이에 그가 "지금은 비록 적이지만 우리와 같은 동족이며 명망높은 귀족이니 관용을 베풀어주십시오"라며 호소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받아들여 소시우스를 사면했다.
기원전 29년 로마 귀족으로 승격되어 원로원 의원이 되었으며, 기원전 22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7년 루디 새큘라레스(Ludi saeculares: 제사와 연극 공연을 포함한 고대 로마의 종교 축제)를 주관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를 낳았다. 이 인물은 서기 6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우구스투스 말년과 티베리우스 치세 때 정계에서 활약했다. 타키투스는 그를 티베리우스를 대신해서 황제가 될 만한 능력도, 야망도 갖춘 유능한 귀족이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치세 말기에 근위대장 마크로와 갈등을 벌인 끝에 반역죄를 선고받을 위기에 몰리자 자결했다.
[1]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