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라틴어: Publius Servilius Isauricus | |
생몰년도 | 기원전 94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조부) 카이킬리아 메텔라(조모)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아버지) 유니아 프리마(아내) 세르빌리아(딸)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8년 |
전임 |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
동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
후임 |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1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
동기 |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
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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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해적과 이사우리아인 토벌에 큰 공을 세웠고 원로원 중진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의 아들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대표적인 카이사르파 인사로 활약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한동안 '해방자파'를 지지했지만 나중에 제2차 삼두정치의 지지자로 돌아섰다.2. 생애
세르빌리우스 가문은 본래 알바롱가에서 기원한 6개의 귀족 가문[1] 중 하나로 파트리키에 속한다. 하지만 이사우리쿠스는 귀족 가문이면서도 제2차 포에니 전쟁 전후로 플레브스(평민)가 되는 것을 선택한 지파의 후손이다. 조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는 기원전 120년대에 마케도니아에서 총독으로 활동했으며, 조모 카이킬리아 메텔라는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딸이다. 그리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는 기원전 7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78년부터 74년까지 해적과 이사우리아인 토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원로원 중진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머니의 신상명세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역사가들은 각 직위의 최소 연령을 설정한 술라의 법을 근거로 삼아, 출생년도가 기원전 94년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당히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8년 첫번째 집정관을 맡았을 때, 법무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는 그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채찍으로 맞았는데 오늘 자신에게 똑같은 짓을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기원전 60년경에 재무관을 맡았으며, 소 카토의 조카와 결혼하고 카토의 여러 사업을 지원했으며, 카토와 함께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빚을 지고 있던 그리스 도시 시키온을 변호하기도 했다. 기원전 56년 아버지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친구 마르쿠스 파보니우스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복위를 위해 이집트에 무력을 행사하려는 폼페이우스의 주장에 반대하며, 3명의 사절단을 이집트에 보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기원전 54년 카토와 함께 법무관을 역임했고, 갈리아 총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라인강을 도하해 갈리아로 들어와서 평화 협상을 하던 게르만족의 사절을 구금하고 기습해 살육을 자행한 것을 지탄하며, 그를 게르만인들에게 넘기거나 로마로 소환하여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협상 도중 게르만족이 무단 공격하여 74명의 기병을 죽였으니 교섭은 끝났으며, 따라서 카이사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반박하였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주장이 관철되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죄를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알로브로게스 족을 무찌른 집정관 가이우스 폼티누스가 개선식을 거행할 준비를 했을 때, 그의 병사들이 무단으로 로마 시에 들어온 점을 지적하며 개선식을 거행하지 못하게 하려 했으나 원로원과 다른 법무관들이 호응해주지 않아 실패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의외로 카토를 따라가지 않고 카이사르의 편이 되었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한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나, 로마 시와 이탈리아를 저버리고 해외로 망명한 폼페이우스와 옵티마테스 파에게 반감을 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초대를 받고 카이사르와 대면했을 때 해외로 망명한 귀족들과 평화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으며, 카이사르가 발칸 반도에서 폼페이우스와 싸울 때 로마에 있었다.
그러던 중 법무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가 모든 채무를 무효로 하는 급진적인 법안을 제시하는 바람에 혼란이 야기되자, 그는 루푸스의 직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한 원로원의 뜻에 따라 루푸스를 포럼에서 내쫓으려 했다. 루푸스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자, 그는 채찍을 들어 루푸스를 내리쳤다. 루푸스는 결국 자리를 피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채찍을 얻어맞더니 나한테 똑같은 짓을 한다"라고 조롱했다. 그 후 루푸스는 로마를 떠나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와 동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완벽하게 무찔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카이사르가 1년간 독재관을 역임할 수 있게 했다.
기원전 46년부터 44년까지 아시아 총독을 맡아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졌던 이 일대가 안정되도록 힘썼다. 기원전 44년 여름 로마로 귀환한 그는 카이사르파와 '해방자파'간의 극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을 때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2]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자신의 처남인 점을 고려하여 해방자파 편에 서서, 카이사르파에게 숙청당할 위기에 몰린 그들을 키케로와 함께 지켰다. 또한 키케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함께 19살의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을 맡고 원로원 의원이 되는 걸 지지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축출하려는 계략이었다.
기원전 43년 3월 20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안토니우스와 화해할 것을 권하는 서한을 원로원에 보냈을 때, 키케로와 함께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해 4월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여 갈리아로 피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열자고 제안했다. 또한 시리아로 파견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카이사르파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지지했다. 이후 레피두스와 또다른 갈리아 총독인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안토니우스의 편이 되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 여름 집정관을 맡을 때 원로원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의 딸 세르빌리아와 약혼했다.
기원전 43년 말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의 딸인 클로디아 풀크라와 결혼하기 위해 세르빌리아와의 약혼을 파기하자, 그는 세르빌리아를 레피두스의 아들과 결혼시키고 자신은 삼두정치파로 돌아섰다.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기원전 41년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후손
딸 세르빌리아의 후손을 통해, 코그노멘 '이사우리쿠스'를 이은 후손이 최소 서기 2세기까지 활동했다. 그 인물은 로만 브리튼 지방에서 족적이 확인된 장군이자 집정관 퀸투스 안토니우스 이사우리쿠스이다.퀸투스 안토니우스 이사우리쿠스를 통해,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일가가 딸 세르빌리아의 후손들을 통해 본인 가문을 유지했음도 19세기 영국 요크 목욕탕 비문을 통해 확인됐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때 제6군단 빅트릭스 군단장, 집정관을 지냈던 로마 귀족으로, 서기 2세기 당시 상당한 권세가로 레가투스(군단장) 시절일 당시 황제 공식 대리인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친구였고, 그의 치세기 아래에서 집정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3]
그는 로만 브리튼에서 중요 유물로 많이 소개 중인, 1839년에 발굴된 요크 목욕탕 근처 포르투나 제단 비문을 세웠다. 이 비문에 따르면, 퀸투스 안토니우스 이사우리쿠스는 현직 군단장이자 황제 공식 대리인으로서 아내 소시아 룬키아[4]와 함께 여신 포르투나에게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면서 제단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