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라틴어: Publius Alfenus Var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크레모나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아버지)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9년 |
전임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
동기 |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
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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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문법학자 헤렌니우스 아크로에 따르면, 그는 본래 크레모나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이발사(tonsor) 또는 제화공(sutor)이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로 상경하여 당대 로마 최고의 법학자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제자가 되었고, 훗날 집정관까지 올랐으며, 사망 후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세르비우스 폼포니우스 역시 그가 집정관까지 오른 사실을 거론했지만, 아크로가 밝힌 다른 이야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고위 행정관 사이의 취임 간격을 설정한법에 의거할 때, 그는 기원전 42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이다. 기원전 41년 옥타비아누스가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에 파견된 관료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만투아에서 소규모 농지를 보유하고 있다가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강탈당한 뒤 비참한 처지에 놓인 베르길리우스를 구제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전원시>의 여섯 번째 시를 그에게 바쳤다.
기원전 39년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스승 루푸스의 글을 종합하여 180편에 달하는 법률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다. 서기 2세기 법학자 섹스투스 폼포니우스가 그의 저서를 인용한 걸 보면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으며, 몇몇 로마 학자들의 저서에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진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는 서기 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