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라틴어: Lucius Sempronius Atrat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친아버지)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양아버지) 셈프로니아(이복 누이)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4년 |
전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
동기 |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
후임 |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멤미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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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본래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며 기원전 59년 조영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의 아들이었지만,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양부와 똑같이 개명했다. 이복 누이 셈프로니아는 기원전 36년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의 아내였다.기원전 56년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가 친아버지 베스티아를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줘서 조영관에 당선된 혐의로 고발했지만 무죄가 선고된 뒤, 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루푸스를 나폴리에서 폭동을 조직하고 푸테올리에서 이집트 사절단을 공격하고 사절단 대표 디온을 독살하려 시도한 혐의로 고발했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그를 지원했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루푸스를 지원했다.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퀸틸리아누스에 따르면, 그는 이 재판에서 연설할 때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를 보여 배심원들에게 별다른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별다른 행적은 보이지 않던 그는 필리피 전투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추종자가 되었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의 삼촌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대신하여 고위 사제단인 아우구르(Augur)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원로원에서 유대 국왕이 되기를 희망한 헤로데 대왕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기원전 39년 안토니우스에 의해 헬라스 총독으로 부임했다. 테살리아의 히파타 시에서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이 주조되었다.
기원전 38년 안토니우스가 시칠리아 내전을 치르는 옥타비아누스를 돕기 위해 파견한 함대를 지휘했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의 뒤를 이어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가 얼마 후 사임했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갈등을 벌이자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23년 아프리카 총독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21년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히에로니무스는 그가 서기 7년 80세의 나이에도 죽지 않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겨 자살했다고 기술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