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라틴어: Gaius Antonius Hybrid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형제) 대 안토니아(장녀) 소 안토니아(차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3년 |
전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동기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
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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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헤라클레스의 아들 중 한 명인 안톤을 시조로 삼은 노빌레스 가문인 안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고 나라에 긴급한 일이 생길 때 이와 연관된 구절을 찾아본 뒤 원로원에 보고하는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를 역임한 티투스 안토니우스 메렌다, 기원전 422년 집정 무관을 역임한 퀸투스 안토니우스 메렌다, 기원전 333년 삼니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독재관으로 발탁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휘하의 기병장관을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1]를 자신의 역사서에 언급했다. 이렇듯 역사가 오래됐지만 기원전 2세기까지 집정관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않았기에 로마 귀족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그러다 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대에 이르러 안토니우스 가문의 가세는 급성장했다. 그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전 시대 최고의 웅변가로 손꼽힐 정도로 탁월한 웅변술을 갖췄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서 맹활약했다. 기원전 99년 집정관에 올랐고, 기원전 97년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간의 내란이 벌어졌을 때 술라를 따랐다가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한 뒤 피살되어 수급이 포로 로마노에 전시되었다.
형제로 법무관과 크레타 총독을 맡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가 있었고, 조카는 그 유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다. 아버지가 마리우스파에게 살해당했을 때 형제와 함께 그리스로 피신한 뒤 술라의 군대에 가담했다. 기원전 84년 그리스에서 기병대를 지휘하며 각지의 도시와 성소를 약탈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이후 술라와 함께 로마로 돌아간 후 술라의 내전에 참가해 승리에 일조했고, 숙청 대상자들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뜯어내 부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열린 축제 때 마부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나중에 연설 중 하나에서 그를 마부(quadrigarius) 라고 불렀다.
기원전 76년 정치 경력을 막 시작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그리스에서 심각한 수탈을 벌인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호민관 한 명이 "법정에서 로마 시민이 그리스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불법이다"라고 주장하며 거부권을 행사한 덕분에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70년 감찰관 루키우스 겔리우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가 원로원 의원 64명을 제명할 때 함께 제명되었다. 제명 사유는 "속주민을 약탈하고 법원의 판결을 거부했으며, 자신이 짊어진 많은 부채를 다른 사람의 소유로 이전했다"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나중에 이 결정을 "아름답고 정당하다"고 호평했다.
하지만 그는 제명 후에도 정치 경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68년 이전에 조영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66년 법무관에 선임되면서 원로원에 복귀할 수 있었다. 기원전 64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그가 상대한 후보는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사케르도투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키케로,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그리고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와 카틸리나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지원을 받으며 함께 행동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대중 연설에서 안토니우스를 강도, 검투사, 마부, 그리스 강도라고 비난했고, 그는 이에 대응해 키케로가 보잘것없는 신참자라고 조롱했다.
투표 결과, 그는 키케로보다 뒤쳐지고 카틸리나보다 약간 앞선 2위를 차지하면서 키케로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63년 1월 1일에 취임한 그는 선거 때와는 달리 키케로와 협력했다. 그는 연초에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배분받았고, 키케로는 마케도니아 속주를 배정받았다. 키케로는 로마에 머물기를 원했고, 그는 부유한 마케도니아를 원했다. 이에 두 사람은 논의 끝에 임지를 교환했고, 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키케로의 모든 사업에 대한 지원과 마케도니아 수입의 일부를 이전하기로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국가를 구원하고 선을 이루도록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배우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이후 카틸리나가 집정관 선거에 재차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음모를 꾸몄다. 당시 그가 카틸리나와 모종의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이에 대해 소문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카틸리나에게 전력으로 협력하지도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는 그가 음모에 가담했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그저 카틸리나와 키케로 중 누가 이길 지를 가만히 지켜보고 승자의 편에 서려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63년 11월, 카틸리나는 지지자 가이우스 만리우스가 군대를 모으고 있던 에트루리아로 도피했다. 카틸리나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혔고, 그는 만리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군대의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반란군은 사료에 따라 7,000 ~ 20,000명이었다고 전해지나, 대부분 무장이 빈약했다고 한다. 카틸리나는 토벌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피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저지하자 피스토리아 인근에서 안토니우스와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동포를 해쳤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는지 전투 전날에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고 있던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이후 기원전 62년 1월에 피스토리아 전투에서 카틸리나 반란군은 궤멸되었고 카틸리나와 만리우스는 전사했다. 안토니우스는 카틸리나의 수급을 베어 로마로 보내 자신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을 불식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토벌군 역시 큰 손실을 입었고, 로마 시민들은 이 전투를 그다지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기에 개선식은 열리지 않았다.
기원전 62년 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속주민들을 상대로 재산 강탈, 고리 대금업, 세금 체납 징수 등 온갖 방식으로 수탈했다. 또한 트라키아의 다르다니 족과 모이시아 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크게 패했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그는 이민족이 야습을 감행했을 당시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장교들이 그를 마구 흔들고 고함을 질러댔지만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자, 백인대장과 창녀가 그의 양팔을 붙들고 들어올려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마케도니아 총독이 착취를 심하게 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다는 소문이 로마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기원전 62년 가을, 원로원은 그를 소환하는 문제를 거론했다. 하지만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옹호한 덕분에, 그는 2년 동안 마케도니아에 머물 수 있었다. 기원전 62년 말에서 기원전 61년 초, 키케로는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안토니우스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고 밝혔다. 안토니우스와 임지를 교환한 밀약이 발각되었고, 안토니우스가 보내주기로 했던 돈은 한 푼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아티쿠스에게 "나는 이 정도로 뻔뻔하고 교활하고 느려터진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모든 걸 느리게 처리한다"고 불평했다.
기원전 60년 말 로마로 돌아온 그는 즉시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고발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의 변호를 맡았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와 야합했던 자신 역시 고발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는 피고가 카틸리나 추종자들을 토벌한 공적이 있다면서, 그런 그를 공격한 것은 카틸리나 잔당들의 농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원전 59년 집정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와 밀담을 나눴다는 소문을 들춰냈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응해 키케로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호민관이 되기 위해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키케로는 탁월한 변론가였지만, 안토니우스의 범죄를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시민권을 박탈당한 뒤 로마에서 쫓겨났다. 상당수 로마인은 이에 기뻐했고, 카틸리나의 무덤에 꽃이 쌓였다고 한다. 안토니우스는 카팔로니아 섬에 정착한 뒤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마치 사유재산인 것처럼 섬을 장악하고 새로운 도시를 설립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훗날 히브리다를 변호할 때 썼던 연설문을 출판했는데, 망명지에서 이걸 읽은 히브리다는 "그가 실제로 이렇게 했다면 여기서 물고기나 잡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는 10여 년간 카팔로니아 섬에서 살았다. 카이사르의 2인자로서 이탈리아에서 통치한 조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망명자들을 이탈리아로 불러들였지만, 그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44년 1월 이전에 로마로 복귀하는것을 허락받고 원로원 회의에 출석했다. 기원전 42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기원전 42년으로부터 몇 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두 딸 대 안토니아 히브리다, 소 안토니아 히브리다를 두었다. 대 안토니아 히브리다는 아버지를 고발한 인사들 중 한 명인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의 아내가 되어 기원전 37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를 낳았다. 소 안토니아 히브리다는 사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기원전 47년에 결혼했지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간통하고 있다고 의심한 안토니우스에게 이혼 통보를 받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 안토니아는 소 안토니아의 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안토니아는 스미르나의 대부호인 피토도로스와 결혼해 폰토스 왕국의 여왕 피토도리다를 낳았다.
[1] 그러나 종교 의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 모두 같은 해에 사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