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라틴어: Publius Cornelius Lentulus Spinther | |
생몰년도 | 기원전 101년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아들)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7년 |
전임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
동기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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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지만 탑수스 전투 후 아프리카에서 살해되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씨족의 일원이지만, 아버지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라는 것 외에는 기원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동 시대에 활동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의 아들인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두 사람이 친형제이거나 이복 형제였을 것이라 추정한다.그러나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으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의 아들이 키케로에 보낸 편지에는 루키우스 렌툴루스의 이름을 그대로 언급하기만 한 걸 보면 가까운 혈연 관계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그노멘인 스핀테르는 어느 연극에서 같은 이름의 배역과 똑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역사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직의 나이 제한을 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을 근거로 그가 기원전 101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74년에 주화 주조를 담당한 인물이 그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다른 기록에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가 그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기원전 70년에 재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63년 조영관을 맡아 호화로운 경기를 조직하여 시민들을 즐겁게 했고, 집정관 키케로를 지원하여 카틸리나 음모를 분쇄하는 데 기여했다. 이때 카틸리나의 공모자로 지목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는 조사 과정에서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는데, 이는 친족이었던 그를 풀어주려는 스핀타르의 의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0년 법무관을 맡아 아폴로를 기리는 경기를 조직했으며, 연극 무대를 은장식으로 장식했다. 당대 사람들은 이를 전례없는 사치로 여겼다. 기원전 59년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을 맡았으며,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로마 다신교 사제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기원전 59년 10월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다 체포된 루키우스 베티우스로부터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아서 무사했다. 기원전 58년 로마로 귀환한 뒤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평민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와 함께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 직후 원로원에 키케로를 복귀시킬 것을 청원했고, 마침 전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마찰을 빛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클로디우스를 견제하고자 키케로를 불러들이기로 마음먹으면서 성사되었다. 또한 그는 키케로의 집을 재건하고 토지를 반환하게 했다. 키케로는 로마로 돌아온 뒤 여러 연설과 편지에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이와 더불어 식량난에 시달리는 로마를 구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5년간 비상 권한을 부여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난 뒤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최근에 로마 속주로 편입된 키프로스도 함께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이 섬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했으며, 기원전 55년 초에 로마에 복종하길 원하지 않은 반군과 지역 부족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해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다. 한편 기원전 56년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파라오로 복귀하는 방법에 관한 토론에 참여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3명의 사절을 이집트로 보내 복귀를 주선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기원전 54년 말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빚을 너무 많이 지는 바람에 거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폼페이우스의 편에 서서 아스쿨룸에 주둔한 10개 코호트를 지휘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접근해오자 병사들이 대거 카이사르에 가담하는 바람에 저항도 못하고 도망쳤고, 품페이우스의 부관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루푸스와 만나 그에게 지휘권을 맡긴 뒤 코르피니움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합류했다. 하지만 코르피니움의 장병들 역시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코르피니움 공방전), 그는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인도되었지만 곧 풀려났다. 이후 푸테올리에 머물면서 앞으로 어찌 할 지 고민했다. 폼페이우스의 명분에 여전히 동조했지만, 자비와 관대함을 보여준 카이사르에게 감사를 느꼈다. 장기간 고민하던 그는 결국 발칸 반도로 가서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메텔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카이사르를 처단한 뒤 공석이 될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위를 누가 가질지를 놓고 욕설까지 퍼부으며 격렬하게 논쟁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여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로도스로 망명했지만 항구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기원전 47년 초에는 그가 로도스에 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그는 탑수스 전투 직후인 기원전 46년경 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를 따르는 무리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결국 이혼했다고 한다. 이 아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들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를 두었는데,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해방자파 군대에 가담하여 그들을 위해 동전을 주조했다. 필리피 전투 이후 옥타비아누스에게 체포된 뒤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