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라틴어: Marcus Aurelius Cott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버지) 루틸리아(어머니)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형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형제) 아우렐리아 코타(사촌)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4년 |
전임 | 루키우스 옥타비우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동기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
후임 |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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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노빌레스 가문인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 그의 아버지로 언급되었지만 그 외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어머니 루틸리아는 기원전 10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누이였다. 형제로 기원전 75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65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있었다. 또한 사촌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있었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히스파니아 총독 '코타'는 기원전 80년 마우레타니아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맞서 싸웠지만 멜라리아 해전에서 패배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 인물에 대해 그 또는 형제 가이우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학계에서는 행정관들의 법적 취임 가능 연령을 설정한 술라의 법에 의거해, 그가 기원전 77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74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해 말, 당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치르고 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군대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이동한 뒤 원로원과 추종자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자신에게 급료와 물자, 병력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는 것을 성토하면서,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가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그와 루쿨루스는 폼페이우스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를 지원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하지만 국고가 부족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개인 재산을 모아서 폼페이우스에게 전달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결전을 치르러 출진했다. 루쿨루스는 킬리키아에서 폰토스 육군을 상대했고, 그는 함대를 이끌었다. 먼저 도착한 그는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칼케돈 인근의 폰토스군을 향해 진격했지만, 막상 적의 압도적인 군세를 보자 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휘하 병력을 이끌고 칼케돈으로 퇴각했다. 그리하여 비티니아를 손쉽게 공략한 미트리다테스는 뒤이어 칼케돈으로 진군하여 코타의 부관 누두스의 로마군을 격파했다. 코타는 70척의 배와 4,000명의 병사를 잃고 패주한 뒤 칼케돈에서 포위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루쿨루스의 장병들은 코타가 그 꼴이 된 것은 자업자득이니 내버려두고 별다른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폰토스로 진격해 약탈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루쿨루스는 이를 거부하고 칼케돈으로 진군했다고 한다. 그 후 루쿨루스의 활약 덕분에 폰토스군이 완패하고 물러나면서 포위가 풀렸다.
그 후 총독으로서 비티니아에 남은 그는 루쿨루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 보코니우스와 함께 미트리다테스 6세가 주둔하고 있던 니코메디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니코메디아가 쉽사리 공략되지 않는 사이,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밀리에 도시를 떠나 수비대를 헤라클레아로 이동시키고 자신은 폰토스로 돌아갔다. 이후 루쿨루스가 소아시아 깊숙이 진군하는 동안, 그는 헤라클레아를 공격했다. 첫번째 공성전이 실패하자, 로마군은 적을 굶겨죽이는 전술로 전환했다. 하지만 해상 봉쇄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지지부진하다가 기원전 71년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가 해군을 이끌고 코타에 합류한 뒤에야 봉쇄가 완료되었다.
기원전 70년 봄 기아에 시달린 헤라클레아 수비대는 항복했다. 트리아리우스가 이끄는 부대가 먼저 진입하여 약탈을 시작하자, 코타의 병사들은 그들을 몰아내고 약탈물을 챙기려 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끼리 내전이 발생하려 하자, 그와 트리아리우스는 이들을 뜯어말려 가까스로 막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코타가 헤라클레아를 완전히 약탈하고 불태우는 동안 트리아리우스가 함락 직전에 도시를 떠난 일부 수비대를 추격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헤라클레아 공략에 성공한 그는 병사들을 루쿨루스에게 보낸 뒤 자신은 바다를 통해 로마로 갔다. 그가 포획한 대부분의 전리품은 폭풍에 휘말려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비티니아에서 막대한 재물을 갈취했기에 부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67년, 그는 호민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로부터 전리품 횡령 혐의로 고발당했다. 재판 결과 유죄가 선고되었고, 원로원 의원 직을 박탈당하고 추방형에 처해졌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