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라틴어: Lucius Papirius Cursor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조부) 스푸리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아버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아들)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26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
동기 |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술루스 |
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
임기 | 기원전 320년 |
전임 |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
동기 |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
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
임기 | 기원전 319년 |
전임 |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동기 |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
후임 |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
임기 | 기원전 315년 |
전임 | 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 루틸루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동기 |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
후임 |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
임기 | 기원전 313년 |
전임 |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
동기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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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 제2차 삼니움 전쟁에서 맹활약한 인물로, 후대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로부터 가장 완벽한 로마인으로 칭송받았다.2. 생애
로마 공화국 초기인 기원전 4세기부터 기록상에 등장하는 파트리키 가문으로서 만리우스, 술피키우스, 포스투미우스 가문과 함께 정계를 주름잡은 파피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는 기원전 393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그의 아버지로서 언급되었을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기원전 340년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휘하 기병장관을 맡았다. 이때 안티움 시와 전쟁이 벌어졌지만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 전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원전 326년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술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해에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지만, 그가 지휘관으로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325년 삼니움족과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던 집정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중병에 걸리자, 원로원은 그를 독재관으로 선임했다. 그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기병장관으로 세운 뒤 출진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피리우스는 전투를 치르기 전에 닭 점괘를 쳐봤는데 결과가 좋지 않자 '신성한 닭'을 관리하는 사제와 상의한 뒤 신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룰리아누스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말고 숙영지를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정찰병들이 삼니움인들의 경계가 느슨하다고 보고하자, 룰리아누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삼니움 진영으로 진격했다.
로마군은 임브라니움 마을(위치 불명) 인근에서 대규모 삼니움군과 마주쳤다.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기 위해 몇 차례의 기병 돌격을 벌였으나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자,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을 맡고 있던 루키우스 코미니우스가 말에서 재갈을 제거한 뒤 새로운 돌격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룰리아누스가 이를 허락하자, 기병들은 말의 재갈을 제거한 뒤 훨씬 빠른 속도로 돌격했고, 삼니움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리비우스는 이 전투에서 삼니움족 20,000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군법에 따르면, 승리를 거둔 독재관과 기병장관은 전리품을 나눠 가져야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는 독재관 몫으로 돌아갈 전리품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그 후 독재관이 아닌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승리를 보고했다. 이에 격노한 파피리우스는 군대로 돌아와서 룰리아누스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려 했다. 룰리아누스는 가까스로 탈출해 로마로 피신했고, 원로원과 평민 모두가 룰리아누스를 용서해달라고 청원했다. 파피리우스는 룰리아누스를 기필코 죽여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룰리아누스와 그의 아버지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자 명령을 철회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피리우스는 삼니움족을 상대로 2번 더 전투를 치렀다. 룰리아누스에 대한 그의 강압적인 태도와 군법을 혹독하게 적용하는 모습은 병사들의 반감을 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하루에 50 로마 마일 이상을 행진하도록 강요해 "뛰는 자"라는 의미인 '쿠르소르(Curso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또한 기병을 포함한 모든 병사들에게 별다른 맛이 나지 않는 빵을 먹도록 했다. 이에 몇몇 베테랑 기병들이 특권을 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단 한 가지 특권을 주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너희가 말에서 내릴 때 말등을 문질러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
병사들은 이처럼 엄격한 그에게 불만을 품었기에 첫번째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그는 좀더 너그러운 대우와 전리품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고, 병사들은 그제야 전의를 되찾았다. 그 결과 며칠 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확실히 승리했고, 이후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퀴리누스 신전을 건설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이 신전은 그의 아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가 집정관을 맡은 기원전 293년에 건설되었다.기원전 324년에는 집정관이 선출되지 않았고 파피리우스가 독재관으로서 1년 내내 삼니움 전쟁을 이끌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삼니움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이에 삼니움 측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했고, 독재관은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와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를 기원전 323년도 집정관으로 세운 뒤 사임했다. 삼니움과 로마는 이 시기에 1년간 휴전을 맺었지만, 삼니움 귀족 브루툴루스 파피우스가 로마가 제시한 요구 조건을 거부하고 전쟁을 재개하자고 촉구하자 이에 호응한 삼니움 정부가 전쟁을 재개했다.
기원전 321년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두 집정관이 이끌던 로마군 수만 명이 삼니움족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협곡에 갇힌 뒤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멍에 아래를 지나가는 조건하에 풀려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마 시민들은 이 수치스러운 사건에 분노했고, 파피리우스는 수치를 갚아주겠다고 주장해 기원전 320년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아풀리아 지방의 루케리아를 포위 공격해 그곳의 삼니움 수비대가 기아에 시달린 끝에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때 7,000명의 포로를 확보한 뒤 카우디움 협곡 전투 때 인질이 되어버린 로마 장교 및 재무관들과 교환시켰다. 기원전 319년 집정관으로 재선된 그는 삼니움의 편으로 넘어간 도시들을 공략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다른 사료에서는 로마군이 카우디움에서 맺어진 협약을 존중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고, 에드워드 토고 살몬은 로마군이 기원전 316년에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카우디눔 평화 협약을 존중했으며 기원전 321년과 기원전 316년 사이의 로마와 삼니움의 전쟁은 리비우스가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로마가 카우디눔에서 맺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곧바로 재개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며 확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기원전 315년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가 군사 작전을 주도했기 때문에 임기 내내 로마에 남아있었다. 기원전 313년 집정관에 재차 선임되었을 때도 룰리아누스가 독재관으로서 군사 작전을 주도했기 때문에 로마에서만 활동했다. 그러던 기원전 310년, 삼니움족은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를 회피해 북상하여 에트루리아인들과 연합하기로 했다. 루틸루스는 북상하는 적군을 급히 추격해 알려지지 않은 지점에서 따라잡았으나 뒤이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여러 장교를 상실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이에 원로원은 독재관을 세워서 삼니움족을 막기로 하고, 현직 집정관 룰리아누스에게 파피리우스를 독재관으로 세우라고 권고했다. 과거 자신에게 굴욕을 준 파피리우스를 껄끄럽게 여긴 룰리아누스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국가를 위해 개인의 감정을 접으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기원전 309년 독재관에 선임된 파피리우스는 삼니움과의 국경 인근의 볼스키인 마을인 롱구라에서 마르키우스와 합류해 병력을 추스린 뒤 삼니움인을 상대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맞붙어 승리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는 기원전 293년과 27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