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 |||
출생 | 생년 미상 | ||
로마 왕국 로마 | |||
사망 | 몰년 미상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501년 9월 1일 ~ 기원전 500년 8월 29일 |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498년 9월 1일 ~ 기원전 497년 8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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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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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자 로마 최초의 독재관.2. 생애
공화국 초기의 로마에 살던 에트루리아 가문 출신으로 형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는 두 차례 집정관을 역임한 적이 있다.그는 기원전 501년, 포스투무스 코미니우스 아우룬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동안, 로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는 근방의 젊은 사비니족들의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전 해에 사비니족들을 패배시켰고, 전쟁이 재점화될 조짐이 보였다. 거기에다 라틴족과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투스쿨룸의 왕자이자 로마의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사위인 옥타비아누스 마밀리우스가 타르퀴니우스을 왕좌에 복귀시키기 위해 라티움의 30개 도시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로원은 집정관들에게 독재자를 지명하도록 지시했고, 코미니우스는 그의 동료인 라르키우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기병장관으로 스푸리우스 카시우스 베켈리누스를 지명했다.
첫 독재관의 등장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로마에 사절을 파견한 사비니족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고 전쟁이 선포되었지만, 양측은 서로 싸우기를 꺼렸고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남은 재임 기간 동안, 라르키우스는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옛 동맹을 유지하고 새로운 동맹을 얻기 위해 여러 라틴 도시들과 협상을 벌였으며, 이듬해 집정관 선거를 주재했다. 그는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독재관직을 내려놓았고, 미래의 독재관들에게 선례를 남겼다.
기원전 498년, 라르키우스는 퀸투스 클로엘리우스 시쿨루스와 함께 두 번째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 해에는 라틴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96년에 지명된 독재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는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 로마군을 승리로 이끌었고, 라르키우스는 피데나이를 점령했다. 그리스 역사가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그 후, 그는 카피톨리누스 언덕 기슭에 사투르누스 신전을 헌정했다고 한다.
기원전 494년에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서, 평민들의 빚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를 주창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그는 그 해 일어난 첫번째 성산 사건에서, 평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보내진 사절 중 하나였다.
기원전 493년에는 기원전 501년에 같이 집정관을 역임했었던 집정관 코미니우스의 레가투스로 복무했다. 그리고 로마 장군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코리올라누스[1]가 코리올리 포위전에서 그의 용맹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1] 기원전 5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장군. 그는 코리올리 포위전 중 용감한 행동에 따라 이름 "코리올라누스"를 받았다. 코리올리를 점령한 이후 곡물 분배에 대한 주장으로 평민들의 격분을 사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망명하였고, 볼스키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어머니, 다른 로마의 여인들의 간청으로 군대를 철수시켜 결국 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그의 운명은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