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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몰년 미상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기원전 497년 9월 1일 ~ 기원전 496년 8월 29일 | |
기원전 491년 9월 1일 ~ 기원전 490년 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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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귀족 출신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97년 집정관에 당선되어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와 함께 일했다.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포로 로마노에 새로 지어진 사투르누스 신전을 축성하였다.기원전 491년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와 다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 전해에 로마에 기근이 있었고, 그해에 시칠리아에서 상당한 양의 옥수수가 수입되었는데, 이 옥수수를 로마 시민들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첫번째 성산 사건로 인한 긴장이 그나이우스 마르키우스 코리올라누스[1]가 망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디오니시오스는 그가 레길루스 호수 전투동안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였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셈프로니우스가 기원전 487년에 헤르니치와 볼시와의 전쟁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기원전 482년 선거를 위해 기원전 483년 인터렉스로 임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1] 기원전 5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장군이다. 그는 코리올리 포위전 중 용감한 행동에 따라 이름 "코리올라누스"를 받았다. 코리올리를 점령한 이후 곡물 분배에 대한 주장으로 평민들의 격분을 사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망명하였고, 볼스키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어머니, 다른 로마의 여인들의 간청으로 군대를 철수시켜 결국 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그의 운명은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