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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곱 언덕 |
1. 개요
캄피돌리오 언덕(라틴어: Mons Capitolinus, 이탈리아어: Campidoglio)은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비미날레 언덕에 이어 2번째로 면적이 좁은 언덕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유피테르 신전이 세워진 장소로 유명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기획한 캄피돌리오 광장과 궁전들이 세워졌다.2. 지리
테베레 강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높이는 아라콜리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서 해발 48m,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해발 35.9m이다. 고지는 북쪽 정상 아륵스(Arx)와 남쪽 정상 카피톨리움(Capitolium)으로 나뉘며, 고지 사이를 가르는 협곡은 아실룸(Asylum)으로 일컬어진다. 테베레강, 로마의 평평한 지역인 벨라브로, 포로 로마노에서 언덕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이 매우 가파르지만, 캄포 마르치오 광장을 향한 언덕의 경사는 덜 가팔라서 정상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고지의 면적이 협소하고 경사가 가장 가팔라서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피신하고 농성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3. 역사
3.1. 청동기 시대 ~ 로마 왕국 시대
고고학자들은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인 산토모보노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을 토대로,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300년경부터 인간이 이 언덕에 거주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왕국의 건국자 로물루스는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아륵스 고지와 카피톨리움 고지 사이의 협곡인 아실룸에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을 피신시켜두곤 했다고 한다. 퀴리날레 언덕에 정착한 사비니족과 팔라티노 언덕에 새롭게 자리잡은 로마인들은 이 언덕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양측이 화해하고 로마 왕국에 편입되면서,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자연히 로마 왕국의 영역이 되었다.전승에 따르면, 퀴리날레 언덕에 정착한 사비니족과 팔라티노 언덕에 새롭게 자리잡은 로마인들은 이 언덕의 지배권을 놓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한 번은 테르페아라는 여인이 사비니 전사가 왼팔에 차고 있던 금팔찌를 갖고 싶은 욕망에 야밤에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지휘하는 사비니 전사들에게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로마 요새 성문을 열어줬다. 그러나 사비니족은 그녀를 비루하다고 여겨 왼팔에 들고 있던 방패를 그녀에게 한꺼번에 던져서 쳐죽이고 시신을 카피톨리누스 언덕 남쪽 절벽에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이후 로마에서는 조국에 대한 반역을 저지른 자들을 테르페아 절벽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던져 죽이는 전통이 생겼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따르면, 로마 왕국 제5대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 외곽에 사는 사비니인들과 전쟁을 벌였을 때 유피테르에게 전쟁에서 이기게 해준다면 신전을 봉헌하겠다고 기원했다.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프리스쿠스는 약속대로 유피테르 신전의 기반이 될 테라스 공사를 실시했다. 그러던 중 에트루리아 전사 아울루스 빕사니우스(Aulus Vipsanius)의 머리(caput)가 발견되자, 이를 기리기 위해 '카피톨리누스(Capitolinus)'라는 명칭이 언덕의 이름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꼭대기에 세워진 유피테르 신전은 로마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3.2. 로마 공화국 시대
기원전 460년, 사비니 출신의 아피우스 에르도니우스가 노예 및 탈영병들 4500명을 무장시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점령한 뒤 로마의 주인이 되려 했다.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가 이끄는 로마군이 이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그 결과 포플리콜라는 살해되었지만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고, 에르도니우스는 생포 후 포플리콜라의 죽음에 분노한 로마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로마 장군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개선식을 거행할 때 카피톨리누스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유피테르 신전에서 희생제를 반드시 거행했다. 유피테르 신전은 로마의 긴 역사 동안 수많은 복원과 재건축을 거듭했다.기원전 390년 브렌누스가 알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한 뒤 로마 약탈을 단행했을 때, 일부 로마 시민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올라가 저항했다. 켈트족은 여러차례 언덕으로 올라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그러던 중 켈트족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정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탈길을 확인했다. 그들은 새벽녘에 이 길을 따라 언덕으로 잠입했다. 리비우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이 성벽 앞까지 접근했을 때 보초병들은 졸고 있었고, 개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거위들이 시끄럽게 짖어대자 잠에서 깬 로마 병사들이 긴급 상황이 벌어졌음을 깨닫고 서둘러 달려가서 갈리아인들을 격파했다고 한다. 그 후 로마인들은 거위를 신성시했고, 그때 울지 않은 책임을 물어 그 날을 개를 때리는 날로 정했다고 한다. 또한 로마인들은 주노 여신이 거위를 통해 갈리아족의 침입을 경고했으리라 믿고, 유피테르 신전 아래에 주노 신전을 별도로 세웠다. 여기에 마르스를 모시는 신전과 미네르바를 모시는 신전, 그리고 비르투스(Virtus) 신전이 후대에 추가로 세워졌다.
브렌누스의 로마 약탈 이후,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방어 시설은 중앙 경사로에 대응하는 성벽으로 강화되어 요새 역할을 수행했다. 이 성벽에는 일련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포로 로마노 쪽으로 열리는 포르타 카피톨리니( porta Capitolini)였고, 다른 하나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도로 축의 반대편에 열리는 포르타 카툴라리아( porta Catularia)였으며, 세번째 문은 테르페아 계곡 옆에 있는 포닉스 칼푸르니우스(Fornix Calpurnius) 아치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설은 기원전 367년 세르비우스 성벽이 완공된 후 요새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신자들이 언덕에서 신성한 의식을 거행할 때 반드시 통과하는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기원전 192년경 아실룸에 에트루리아 기원의 로마 신인 베이보이스(Vejovis)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이 유적지는 현재 카피톨리니 미술관 지하에 묻혀 있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유피테르 신전 근처에서 민회를 열던 중 귀족들의 폭동으로 피살되었다. 이때 그는 캄푸스 마르티우스로 내려가는 계단 꼭대기에서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나중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 계단 부근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83년 로마에서 화재가 발생해 유피테르 신전을 포함한 카피톨리누스 언덕 전체가 파괴되었다. 기원전 78년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는 소실된 유피테르 신전을 재건하고 물 지붕을 금도금한 청동으로 덮었다. 공사는 기원전 69년까지 이어졌으며, 원로원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 '카피톨리누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루타티우스가 세운 유피테르 신전은 그 규모가 파르테논 신전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3.3. 로마 제국 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당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해방자'를 자처한 이들은 한동안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가 검투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농성했다. 이후 로마 제국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마르스 울토르 신에게 헌정된 작은 신전을 세웠다. 네 황제의 해 시기인 69년 12월, 비텔리우스를 추종하는 로마군과 베스파시아누스를 추종하는 로마군이 시가전을 벌였을 때, 카피톨리누스 언덕 전체가 불탔고 유피테르 신전과 기념물들이 파괴되었다. 내전의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시 복원 사업을 단행해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했다.80년,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에서 발생한 화재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확산되면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81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재건 사업을 실시했고, 12명의 주요 신과 신격화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황제의 신전을 언덕 경사면에 추가로 세웠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트라야누스 포럼 건설을 위해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 사이를 연결하던 경사로가 절단되었고, 카피톨리누스 언덕 동쪽 경사면의 절단 부분은 틈새가 있는 벽돌 외관으로 정돈되었다.
이후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로마 다신교 의식을 거행하는 중심지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한편 카피톨리누스 언덕 기슭(오늘날 아라코엘리 광장)에는 로마 평민들이 거주했던 아파트 건물인 인술라(Insula)가 있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 건물은 높이가 언덕까지 합해 30m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원래 최소 5층으로 지어졌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적에서는 4층만 확인되었다. 학자들은 1층은 주변 거리를 향한 상점으로 구성되었으며, 소유자는 사다리를 사용해 바로 위의 거주 공간에 접근했다고 추정한다. 또한 카피톨리누스 언덕에는 국가 기록보관소인 타불라리움(Tabularium)도 있었다.
3.4. 중세 시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캄피돌리오 언덕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된 뒤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얼마 안 되는 주민들은 캄포 마르치오 지역에 거주했다. 피렌체의 귀족 가문이었던 코르시 가문은 티불라리움 유적 위에 요새화된 거주지를 세우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 버려졌다. 그러다 1144년 교황과 귀족에 대항하는 시민들이 이 언덕을 장악한 뒤, 코르시 가문의 옛 거주지를 본부로 삼고 명칭을 세나토리오 궁전(Palazzo Senatorio)으로 변경했다. 1145년, 교황 루치오 2세는 자신을 타도하고 로마를 지배하려 드는 시민들을 토벌하기 위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민병대를 이끌고 세나토리오 궁전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했고, 일부 추기경이 살해되었다. 루치오 2세 본인도 요새 수비대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고 산 그레오 알 팔라티노 수도원으로 이송된 후 이틀 뒤인 1145년 2월 15일에 사망했다. 그 후 캄피돌리오 언덕은 시민 저항 운동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1363년, 로마 시는 로마 원로원이 행정을 도맡고 로마 귀족 출신의 관리인 2명이 도움을 주는 체제로 전환했다. 이후 공동 목적을 위해 원로원 궁전 앞에 작은 광장이 세워졌고, 14세기 중반에는 광장 남쪽 끝에 길드 재판소가 건설되었다. 14~15세기의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니콜라오 5세는 원로원 궁전 주변에 탑을 세우고 성벽으로 둘러싸는 식으로 요새화했다. 15세기에는 3명으로 늘어난 관리인이 기거하는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이 세워졌다. 이렇듯 카피톨리누스는 중세 후기에 활기를 되찾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캄포 마르치오 광장으로 이어지는 경사면만 거주했고, 언덕의 남쪽 부분은 버려졌고 고대 유적 사이에 채소밭이 조성되었다.
3.5. 르네상스 시대
153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거진반 황폐화되어 염소를 방목하는 데 쓰이기나 하는 캄피돌리오 언덕의 몰골을 보다 못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캄피돌리오 언덕의 외관을 보기 좋게 해줄 광장을 세워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로마의 위용을 과시하고 싶어 했기에 이 공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의뢰에 따라 캄피돌리오 언덕의 상황을 쭉 살펴본 뒤, 언덕 북쪽 경사면에 세나토리오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만 있고 남쪽 경사면은 방치된 것에 주목하고, 균형과 대칭을 위해 콘세르바토리 궁전 맞은편에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을 세운 뒤 세 건물을 잇는 광장을 언덕 중앙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광장의 형태는 사다리꼴로 잡았고,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을 옮겨 놨다.광장 입구에는 포로 로마노에서 가져온 카스토르와 폴룩스 조각상을 배치했고, 전체적으로 로마 풍의 조각상들을 설치했다. 또한 누오보 궁전에는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는 기둥인 거대 오더(Giant order)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언덕으로 올라오는 계단인 코르도나타(Cordonata)는 위로 갈수록 폭을 넓게 만들어 아래쪽에서 보면 가파르지만 위쪽에서는 완만하게 보이는 착시 효과를 연출했다. 계단간의 간격이 상당히 넓은데, 일설에는 카를 5세가 말을 타고 캄피돌리오 광장까지 올라오도록 하기 위한 설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오로 3세가 1549년에 사망하면서 공사는 지지부진했고, 미켈란젤로는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564년에 사망했다. 광장 공사는 미켈란젤로의 제자들이 계속 이어갔고 1654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