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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00:39:47

게로니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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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1. 개요



기원전 217년 가을,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모이셰스의 게로니움 언덕에서 맞붙은 전투.

2. 배경

기원전 217년 6월, 고대 로마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기원전 218년 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연이어 패한 데 이어, 이 해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고 로마군이 궤멸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또다른 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파견한 4천 기병대는 움브리아에서 마하르발이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대의 습격으로 전멸했다. 결국 원로원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기병장관(부독재관)에 선임했다.

파비우스는 독재관에 선임된 뒤, 세르비우스 성벽을 수리하고 신들에게 로마를 지켜달라고 기원하는 제사를 벌여서 시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또한 미누키우스에게 2개의 로마 군단과 2개의 라틴 동맹군, 그리고 보조 기병부대를 모집하는 역할을 맡겼으며, 라틴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성벽이 없는 마을을 포기하고 수비하기 용이한 요새로 주민들을 피신시켜라. 그리고 모든 농경지를 갈아엎고 우물에 독을 타고 온 마을에 불을 질러서, 적이 어떤 것도 얻지 못하게 하라."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한니발이 로마를 향해 진군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자, 파비우스는 세르빌리우스의 군대에 라틴움으로 가서 켈트족의 남하를 저지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미누키우스가 새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의 뒤를 쫓았다.

한편,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를 치른 뒤 군대를 며칠간 휴식시킨 후 캄파니아 일대를 약탈한 뒤 유유히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다가 아르피 부근에서 파비우스 휘하의 로마군이 따라잡아 6마일 떨어진 아이카에에 진을 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파비우스의 진영 가까이 와서 회전을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파비우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파비우스는 훗날 파비우스 전략으로 널리 알려질 전술을 단행했다. 그는 한니발의 뒤를 계속 따라가면서 고지를 선점하면서도, 한니발이 어떤 종류의 도발을 하든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분견대를 종종 파견하여 물자를 모으려는 한니발의 병사들을 습격했다. 또, 한니발의 진군로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안전한 성채로 이동시켰으며, 카르타고군이 미처 파괴하지 않은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더라도 절대로 구원하지 않았고, 한니발이 성채를 포위해도 견제만 할 뿐 직접적인 교전을 하지 않았다.

한니발이 서쪽으로 진군하여 삼나움을 거쳐 베네벤토로 이동해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했지만, 로마군은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갈 뿐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베노시아 시를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던 중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자신의 편에 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푸아로 이동하고자 했다. 그는 안내인에게 카푸아로 진군할 때 거쳐야 하는 카누시움으로 자신들을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안내인이 페니키아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카누시움이 아닌 카실리눔으로 안내해 버렸다. 한니발은 카실리눔 남쪽의 비옥한 평원인 아게르 팔레르누스에 자리를 잡고 여름 내내 주변 일대에 약탈 부대를 파견해 소, 곡물, 보급품, 포로를 확보했다.

파비우스는 이 때를 틈타 아게르 팔레르누스 주변의 모든 길목을 차단했다. 그는 먼저 카실리눔에 수비대를 증원하고 거기로 가는 다리를 봉쇄하게 했다. 또한 미누키우스에게 분견대를 맡겨 평원의 북쪽 길목에 진을 쳐서 라티나 가도와 아피아 가도를 모두 사수하게 했으며, 주력 부대를 미누키우스 분견대의 서쪽에 있는 마시쿠스 산 인근에 배치했다. 4,000명의 부대는 칼리쿨라 산을 지나 알리페 근처 평원의 동쪽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차단했으며, 평원 남쪽에도 각 부대가 길목을 틀어막았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아게르 팔레르누스 평원에서 모든 통로가 차단되어, 장차 말라죽을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과연 그답게 기발한 책략을 구사해,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포위망을 가볍게 돌파하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파비우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매우 불안정해졌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포위망을 세워놓고도 적이 빠져나가는 걸 막지 못한 그에게 불만을 터트렸고, 한니발 때문에 재산을 잃은 부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한니발은 다른 곳은 실컷 약탈하고도 파비우스의 영지를 일부러 놔두었고, 이 때문에 파비우스가 한니발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파비우스는 로마로 가서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한편, 파비우스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던 기병장관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을 쫓아가다가 모이셰스의 게로니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운 적의 맞은편인 리리눔 평원에 새 숙영지를 세웠다. 그가 병사들을 시켜 카르타고 약탈자들을 공격하게 하자, 한니발은 이에 대응해 3분의 2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 진영 근처로 이동하여 임시 진영을 건설하고, 2,000명의 누미디아 창병들과 함께 로마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점거했다. 하지만 기병들은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미누키우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그 언덕을 장악했다.

이후 한니발이 약탈자들을 재차 보내 식량을 구하도록 하자, 로마군은 경보병과 기병을 파견해 약탈자들을 습격하여 다수를 죽였고, 미누키우스 자신은 보병을 이끌고 카르타고 임시 진영으로 진군했다. 한니발은 이에 맞서 보병대를 이끌고 교전했다가, 상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진영으로 후퇴했다. 미누키우스는 이를 추격했다가 한니발의 부하 하스두르발이 이끄는 4,000명의 약탈자들이 한니발과 합세하자 철수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날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6,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로마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 한니발은 여기서 소모전을 벌이는 건 의미없다고 판단하고 게로니움의 본진으로 후퇴했다. 미누키우스는 즉시 버려진 카르타고 진영을 점령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고 교전을 벌인 것에 분노하여 그를 처벌하려 했지만, "적을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둔 부하를 옹졸한 자존심 때문에 처벌하려 든다"라고 여긴 원로원이 막으면서 무산되었다. 여기에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등이 미누키우스에게 독재관의 권한을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한 게 관철되면서, 파비우스와 미누키우스는 동등한 군권을 갖고 각각 2개 군단을 맡게 되었다.

파비우스는 군대로 복귀한 뒤 미누키우스에게 한니발과 섣불리 싸우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미누키우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차후에 회전을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자 했다. 한니발은 그런 그의 심리를 읽고, 미누키우스의 군대를 유인하여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카르타고 진영과 로마 진영 사이의 땅은 평평한 편이었고, 나무 한 그루 없고 돌무더기가 가득한 척박한 땅이었다. 그리고 양 진영 중간에는 낮은 능선이 었었고, 언덕 뒤편과 옆에는 음푹 패인 땅이 있었다. 한니발은 보병 5,000명과 기병 500명을 선발해, 전투 전날 밤에 200~300명씩 움푹 패인 땅에 숨어 있으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카르타고 경보병 분견대를 로마군이 보이는 언덕에 몰래 파견했다. 이후 언덕에 적이 포진한 걸 본 미누키우스가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게로니움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미누키우스는 언덕에 포진한 적 경보병대를 발견하고, 벨라테스 부대를 파견해 적군을 쫓아내게 했다. 그러자 더 많은 카르타고군이 몰려와서 언덕 수비를 보강했고, 미누키우스는 로마와 라틴 동맹 기병대를 파견해 아군을 돕게 했다. 한니발은 즉시 누미디아 기병대와 이베리아 중기병대를 파견해 이들과 교전했다. 아군 기병대가 적 기병대에게 점차 밀리는 상황이 전개되자, 미누키우스는 2개 로마 군단과 2개 라틴 동맹 군단을 총동원하여 언덕을 향해 진격했다.

미누키우스가 이끄는 로마 보병대가 언덕에 도착해 비탈길을 오르고 있을 때, 로마 기병은 격파되어 사방으로 흩어졌고, 가혹한 압박을 받고 있던 벨리테스 부대 역시 물러나서 군단병과 합류했다. 그 과정에서 로마군의 전투 대형은 흐트러졌다. 그래도 미누키우스는 군단병의 강력한 전투력이라면 적군을 쉽게 이길 거라 여겼다. 그러나 로마군이 비탈길을 중간쯤 오르고 있을 때, 움푹 패인 땅에 숨어있던 카르타고군이 돌연 나타나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습격했다. 여기에 언덕 위에 포진한 보병대가 공세를 퍼부으면서, 미누키우스 휘하 로마군은 사방이 포위당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한편, 전투가 개시되었을 때 군단을 소집한 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파비우스는 즉시 2개 로마 군단과 2개 라틴 동맹 군단을 이끌고 아군을 구하고자 출진했다. 그는 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던 아군을 수습하면서 언덕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한니발은 격전을 치르고 있는 장병들이 파비우스의 로마군과 다시 맞붙는 건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포위망을 풀고 철수했다. 파비우스 역시 한니발을 추격하지 않고 미누키우스의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진영으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게로니움 전투는 막을 내렸다. 양측의 사상자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카르타고군의 손실은 미미하고 미누키우스 휘하 로마군의 사상자는 막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이후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누키우스는 전투가 끝난 뒤 파비우스 앞에 부복하여 "나의 아버지여"라고 외치며 감사를 표했고, 파비우스도 미누키우스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휘하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미누키우스는 지휘권을 내려놓고 파비우스의 기병대장으로서의 소임만 맡았다. 이후 양자는 겨울 숙영지로 들어갔고,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이렇다할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

기원전 217년 12월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기가 끝나자, 로마 당국은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기를 연장하지 않기로 하고 파비우스 전략을 파기했다. 이후 새 집정관에 선임된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로마 역사상 최대 병력을 소집하여 한니발을 끝장내려 하지만,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