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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2:04

데르토사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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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정세
3.1. 이탈리아3.2. 사르데냐3.3. 아프리카3.4. 스페인
4. 전조5. 병력6. 배치7. 전투
7.1. 첫 번째 단계7.2. 두 번째 단계7.3. 세 번째 단계
8. 그 이후9. 전술적 의미10. 결말11. 전략적 중요성

1. 개요

데르토사 전투는 이베리아 전투라고도 알려져 있는 전투로, 기원전 215년에 에브로강 남쪽의 데르토사에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거의 같은 규모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고대 전투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망치와 모루 전술이 어설프게 구사되었을 때 어떤 참사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 격의 전투로,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모루가 갖는 중요성, 그리고 이를 구사하는 지휘관 역량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투이다.

2. 배경

한니발이 사군툼을 점령하자(사군툼 공방전) 스페인을 담당하게 된 기원전 218년 로마 집정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행군로를 따라 갈리아로 이동하였으나 한니발의 알프스를 넘자 북이탈리아로 돌아온다. 이때 푸블리우스는 자신의 병력을 자신의 친형이자 전직 집정관(기원전 222년) 출신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맡겨 스페인으로 향하게 한 뒤 자신은 북이탈리아 지역의 병력을 인수한다.

이후 벌어진 트레비아 전투에서 패배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그의 이탈리아 내의 병력을 모두 동료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에게 넘긴 뒤 자신은 로마 원로원에게서 새로 받은 병력과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와 자신의 형과 합류한다. 그 뒤 그나이우스는 육군을, 푸블리우스는 해군을 담당하여 스페인의 지도자이자 이곳의 카르타고군의 총대장인 하스드루발 바르카[1]와 스페인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

동생보다 먼저 도착하여 군사활동을 시작한 그나이우스는 에브로 강 북쪽에서 벌어진 키사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페인에서의 로마 세력의 입지를 다졌다. 하스드루발은 이들을 요격하러 나왔으나 그의 부하인 히밀코 휘하의 함대가 에브로 강 전투에서 로마군의 기습을 받고 패배하자 후퇴한다.

이후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원로원에게 4천 보병, 5백 기병의 원조를 받은 뒤 카르타고 원로원의 훈령을 받았는데, 즉시 스페인을 비우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같이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하스드루발이 어떤 군사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이 소문은 스페인 부족들에게 널리 퍼졌고, 카르타고군이 곧 스페인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원로원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대체할 만한 강한 육군과 유능한 사령관을 보내달라 하였고 이에 카르타고 본국은 히밀코에게 많은 수의 선단과 병력을 주어 스페인에 보낸다.

스페인에 도착한 히밀코는 육군을 정박한 선단과 함께 머물게한 뒤 자신의 호위기병만 대동하여 하스드루발을 만났고, 그를 통해 카르타고의 이탈리아 침공 의지가 굳건한 걸 확인한 하스드루발은 자금을 모은 뒤 북상하여 에브로 강을 건넌다.

3. 정세

3.1. 이탈리아

칸나이 전투 이후 캄파니아, 삼니움, 루카니아, 아풀리아, 그리고 브루티움의 많은 도시들이 카르타고 편으로 붙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6부터 215년까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 이유는 로마 해군을 약화시키는 한편 카르타고 본국과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네아폴리스, 쿠마이, 놀라 등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한다.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는 루카니아와 브루티움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한노에게 군대를 맡기고 카르타고 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카르타고로 향한다.

로마인들은 여러 군단을 편성한뒤 한니발과의 전투를 피하고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병력만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로마군의 주병력은 독재관으로 선출된 율리우스 페라 휘하에 로마가 위치한 주인 라티움의 남부에 머물고 있었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과 놀라에서 싸워 이 도시를 지켜냈고 그 이후로는 네아폴리스로 가 이 도시 역시 지켜낸다.

기병장관이었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다른 군단을 가지고 루카니아를 지키고 있었다. 또 다른 군단은 이탈리아 북부에 머물면서 갈리아 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3.2. 사르데냐

사르데냐 섬에 머물던 로마 군단은 전염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법무관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사르데냐 섬의 주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로마 군단을 치료해야 했다. 이에 주민들의 심한 반발을 샀고 사르데냐 원주민들의 족장이었던 함프시코라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카르타고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3.3. 아프리카

카르타고는 1만 5천의 보병과 1,200의 기병 그리고 20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된 병력을 편성하여 마고에게 주었다. 이 병력은 60여 대에 달하는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동시에 사르데냐 섬에서의 구원요청을 받자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편성되어 '대머리'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Bald)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사르데냐 섬에 상륙할 것이었다.

3.4. 스페인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그의 함대가 에브로 강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수비적인 자세로 일관하였다.

기원전 217년 그는 보스타르에게 군사를 주어 에브로 강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보스타르는 로마군이 강을 건너자 곧 후퇴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 측에 붙은 스페인 부족장 아빌릭스의 거짓 정보에 속아 사군툼에 머물고 있던 이베리아 인질들을 로마군에게 빼앗겼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르카 가문이 지배하던 스페인 영토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하스드루발은 곧 카르타고로부터 도착한 4천 명의 보병과 5백의 기병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부터 지체없이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에게서 받은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곧 그의 동생인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8천 명의 추가 병력과 함께 합류하였다. 푸블리우스가 스페인 담당 집정관 자격의 임페리움을 갖고 있었으나 그나이우스와 함께 공동으로 지휘하기로 하였다.

이들 형제는 해군을 공격적으로 운용하여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한 뒤 스페인의 항구도시들을 약탈한다. 또한 스페인 부족들로 구성된 보조병을 뽑고 에브로 강 북쪽의 스페인 부족들을 로마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이후 에브로 강 남쪽의 스페인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카르타고의 바르카 가문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키게 부추겼다.

4. 전조

기원전 215년 이전 하스드루발은 거듭된 패배로 인한 병력 손실과 로마인의 도착으로 인해 들끓던 스페인 부족의 반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본국에 필사적인 요청을 하여 4천 명의 보병과 5백 기병의 원조를 제공받는다.

하스드루발은 이후 타르테시라는 부족과 전쟁을 치른다. 그들과의 전투에서 우세함은커녕 수세에 몰린 하스드루발은 일부러 카르타고군의 전리품으로 가득 채운 캠프를 점령하게 놔둔 뒤 그곳을 기습하는 책략으로 타르테시군을 전멸시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타고 본국은 하스드루발에게 이탈리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하스드루발은 자신을 대체할 사령관과 군대를 보내달라 요청한다. 이에 카르타고 본국이 군대와 사령관을 파견하자 그는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를 향한 행군을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들은 스키피오 형제는 하스드루발의 진군을 막아야하는데 전력을 쏟기로 합의한 뒤 하스드루발을 유인하기 위해 카르타고와 동맹 마을인 이베라를 포위한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그대로 로마군을 지나친 뒤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던 마을 데르토사를 포위한다.

이 소식을 들은 스키피오 형제는 포위를 풀고 하스드루발와 싸우기 위해 접근하였다. 이로서 하스드루발은 전략상의 우위를 점하였는데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도록 로마인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 군은 이베라와 데르토사 두 마을의 사이에서 마주쳤다. 5일에 걸친 소규모 전투 끝에 이들 장군들은 그들의 병력을 이끌고 회전을 벌인다.

5. 병력

로마 보병은 두 로마 군단병(레기온)이 1만 명과 1만 8000명의 동맹시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기병은 600명의 로마 기병과 1800명의 이탈리아 중기병으로 편성되었다. 이 밖에 로마인들은 2천 명의 보병과 4백 명의 중기병을 스페인 부족들에게서 뽑았다.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보병은 1만 5천 명의 리비아 창병과 1천 명의 리구리아 용병, 그리고 8천 명의 스페인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카르타고 기병은 450명의 리비아 기병과 1200명의 스페인 중기병, 그리고 2300명의 누미디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그 외에 카르타고군은 20마리의 전투 코끼리와 1천 명의 발레아레스(스페인과 이탈리아 사이의 바다에 위치한 제도) 투석병을 포함하고 있었다.

6. 배치

로마군은 병력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치했다. 기병을 양익에, 그리고 보병을 중앙에 두는 방식이었다. 로마와 스페인 기병은 우익에, 동맹시 기병은 좌익에 자리잡았다. 이탈리아 중보병은 양쪽 바깥쪽에 배치되어 양익에 배치된 기병들의 옆에 있었고 로마 군단병(레기온)은 중앙에 위치하였다. 2천 명의 보병은 로마군 캠프에 남아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리비아, 스페인 중기병을 좌익에 배치해 로마/스페인 기병과 마주보게 하였고 누미디아 경기병을 우측에 배치하여 동맹시 기병을 마주보게 하였다. 리비아 중보병으로 구성된 아프리칸 팔랑크스는 보병대의 좌측에, 카르타고 시민군은 보병대의 우측에 배치되어 양익의 기병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앙엔 스페인 보병이 배치되어 로마 군단병을 상대하게 하였다. 코끼리는 열 마리씩 양쪽 기병들의 선두앞에 배치하여 기병들과 함께 싸우도록 하였다. 발리아레스 투석병은 중보병 앞에 위치하여 투석을 하게 하였다. 2천여 정도의 보병은 카르타고군 캠프에 남겨졌다.

7. 전투

7.1. 첫 번째 단계

전투 초기엔 잠깐의 투창, 투석이 있었다. 그 뒤 로마 군단병은 중앙에 위치한 스페인 보병대를 향해 돌격하였다. 로마 군의 중핵을 이루는 군단병인데다 숫자까지 많았으므로(1만vs 8천) 로마 군단병은 금세 스페인 보병대의 전열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스드루발이 의도한 것으로 칸나이 전투에서 그의 형인 한니발이 쓴 전술을 본뜬 것이었다. 코끼리는 양익에서 로마군의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였다. 이 돌격은 효과적이지 못했는데 로마와 동맹시 기병은 코끼리들의 돌격을 이리저리 잘 피했기 때문이었다. 코끼리는 그 이후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이탈리아 보병은 리비아 보병대와 접근해 전투를 시작하였다.

7.2. 두 번째 단계

리비아 중보병은 이탈리아 중보병을 향해 돌진한다. 리비아 보병은 숫자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1만 5천 vs 1만 8천) 이탈리아 중보병을 상대로 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허나 칸나이 전투 때와는 달리 리비아 중보병은 로마군의 측면으로 전진하는데는 실패한다. 또한 카르타고 기병들이 양익에서 숫적인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좌익: 1650 리비아/스페인 기병 vs 1000 로마/스페인 기병, 우익: 2300 누미디아 기병 vs 1800 이탈리아 기병)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 기병을 패주시키는 데 실패한다. 양측의 기병은 처절하게 싸웠고 양측 모두 우세를 점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때 중앙의 스페인 중보병이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고 진형이 붕괴된 이들은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7.3. 세 번째 단계

트레비아 전투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카르타고 중보병이 로마 군단병의 공격에 무너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를 지휘했던 한니발은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이 이유는 로마군의 양익이 무너졌고 또한 마고의 복병이 튀어나와 로마군의 배후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하스드루발은 복병을 배치하지 않았다.

카르타고 기병은 중앙의 보병이 무너진 것을 보고 전투를 멈추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로마 군단병은 스페인 중보병을 잠시 추격한 뒤 되돌아와 양익의 리비아 중보병을 협공한다. 리비아 중보병은 처절하게 싸워 로마 측에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끝내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8. 그 이후

하스드루발은 패배하였고 대부분의 보병을 잃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병과 코끼리는 살아남았다. 이후 로마군은 카르타고 캠프를 점령하여 그곳에 있던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뿔뿔이 흩어진 카르타고군은 신 카르타고(카르타헤나)로 달아났고 로마군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입지를 확보한다.

하스드루발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카르타고는 이탈리아로 상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병력을 스페인으로 보낸다. 이후 카르타고는 에브로 강 북쪽을 다시는 넘보지 못하였고 스페인의 그들의 영토에서 로마와 싸움을 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스키피오 형제는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진격을 하지 않고 기존의 전략을 유지하였다. 즉 카르타고 동맹 부족을 약탈하고, 중립 부족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반란을 선동하며 그들의 점령지를 단단히 굳히는 전략이었다. 이 전투 이후 스키피오 형제는 더 이상의 로마군 증원을 이탈리아로부터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마고 바르카 형제와 또다른 사령관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기원전 212년까지 계속 전투를 벌이게 된다.

9. 전술적 의미

하스드루발은 그의 형인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쓴 전술을 그대로 본떠 로마인들을 상대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이 전술로 엄청난 승리를 거머쥐었던 반면 하스드루발은 오히려 패배를 맛봐야했다. 능력이 안 되니 똑같이 따라했는데도 결과는 정반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다.

1) 한니발에겐 뛰어난 정예 부대와 뛰어난 장교들이 있었고, 또한 한니발은 그의 부대를 강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 휘하의 많은 수를 차지했던 스페인 보병은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이들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으면 이탈리아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군대의 사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 한니발에게는 함께 알프스를 넘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1만 6천여의 최정예 중보병이 있었고 이들은 칸나이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8천여의 아프리카 보병대는 양익에 놓인 로마보병의 전진에도 꿈쩍하지 않았으며 이들은 후에 전진하여 로마 보병의 측면을 포위한다. 8천여의 스페인 보병대는 중앙의 갈리아 인들과 포진하여 숫적으로 압도적인 로마군의 맹공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반면 하스드루발에겐 이러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최정예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3) 칸나이에서 기병을 지휘하였던 장교인 하스드루발(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아닌 동명이인)은 상당히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기병은 로마 기병에 돌격하였고 돌격이 끝난 뒤 대형을 짰으며 다시 전투를 치러 로마기병을 격파했고, 다시 대형을 짜 로마 중보병의 배후를 빙 돌아 누미디안 기병과 싸우고 있었던 다른 로마 기병의 배후에 도착하여 이들을 격파하였고 다시 대형을 짜 로마 중보병의 배후에 도착한 뒤 공격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대단히 복잡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병대장은 실수없이 완벽하게 해내 결국 칸나이에서의 완벽한 승리에 큰 공헌을 한다. 하스드루발 바르카에겐 이러한 능력을 가진 장교가 휘하에 없었다.

4) 한니발에겐 기병 숫자에서 압도적인 우위가 있었고(1만 vs 6천) 칸나이에서 이런 우세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에겐 약간의 우세함만 있었고(4천 vs 2천 8백) 따라서 이러한 우세함을 두드러지게 하는데 실패한다.

5) 한니발에겐 칸나이에서 코끼리가 없었으나 하스드루발에겐 20마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코끼리를 제대로 활용하는데 실패한다.

10. 결말

데르토사에서의 패배로 인해 한니발에게 추가 병력을 보급하려는 계획은 실패하고 로마군은 스페인에서의 입지를 더욱 강화한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하스드루발이 보유한 병력의 대다수를 잃게 하였으며 카르타고 본국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보내려고 편성했던 병력을 그의 휘하에 편입시킨다. 스키피오 형제는 스페인에서의 군사활동을 통하여 한니발에게 향하는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이 전투는 한니발의 장기인 포위섬멸 전술이 내포한 위험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동시에 형제라고 해서 동등한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증명됐는데... 진 동생도 카르타고에서 형 다음가는 실력을 가진 장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카르타고 장군들은 막장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형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승리라는 걸 해본 장군이다

11. 전략적 중요성

데르토사 전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2차 포에니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 만일 하스드루발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면 최소한 4개의 부대가 이탈리아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하스드루발, 한니발, 마고, 그리고 한노의 부대이다.

2) 이 전투가 있기 전까지 스페인은 카르타고 본국의 통제가 전혀 미치지 않았던 바르카 가문의 영지였다. 그러나 이 전투 이후 카르타고 정부의 원조를 받음으로써 이 지역도 카르타고 정부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이로써 한니발은 스페인의 자원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머물던 그의 부대를 강화시키는데 방해가 되었다.

3) 로마인들이 이 전투로 스페인 내에 그들의 기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고 이것으로 인해 스페인의 자원을 한니발을 지원하는 데 쓰지 못하게 하였다. 게다가 이탈리아에 상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마고를 스페인으로 향하게 한다.

4) 비록 이 전투 이후 기원전 215년에 한니발이 4천의 누미디아 기병과 40마리의 코끼리를 카르타고 정부로부터 지원받았으나 이것은 1만 7천 명의 카르타고 보병이 훗날 사르데냐 섬에서 전멸당하고 2만 8천 명의 보병이 시칠리아에서 발이 묶이게 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즉 데르토사에서의 패배로 인해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승리함으로써 카르타고가 거머쥔 유리한 입장은 모두 없어지게 된 셈이다.
[1]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으로 한니발이 원정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자 그는 뒤에 남아서 스페인의 방위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