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드루발 기스코 𐤏𐤆𐤓𐤁𐤏𐤋 𐤁𐤍 𐤂𐤓𐤎𐤊𐤍 Hasdrubal Gisco[1] | Azrubaʿal Géskōn | |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 미상 |
미상 | |
사망 | 기원전 202년 |
북아프리카 | |
국적 | 카르타고 |
가족 | 딸 소포니스바 |
지위 |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사령관 |
참전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베티스 고지의 전투 -일리파 전투 -우티카 전투 -바그라다스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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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 이베리아 반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와 연합하여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형제와 대적한 끝에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전사시키고 로마군을 대파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연이어 패배해 이베리아 반도를 내줬고,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공했을 때 맞서다가 계속 패하다 결국 자결했다.2. 생애
카르타고에서 영향력 있는 기스코 집안 출신으로 추정되며, 딸 소포니스바는 누미디아 마실리 부족의 왕자 마시니사와 약혼했다. 기원전 214년, 카르타고 정부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구원 요청을 받고 그에게 대군을 맡겨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그는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와 함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형제와 대적했다.그러나 그는 바르카 형제와 사이가 안 좋았다. 한 번은 두 형제가 일리투르기스 시에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를 포위하고, 푸블리우스를 구하러 달려온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를 언덕에 몰아세웠다. 그러나 도중에 합세한 그와 마찰이 벌어지면서 통합된 지휘를 하지 못했고, 세 장수는 각기 다른 진영을 세우면서 개별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그나이우스는 이 틈을 타 일리투르기스에 특공대를 보내 형과 연락을 취했다. 다음날 스키피오 형제는 카르타고군을 협공하였고, 카르타고군은 대패했다. 이후 세 장수는 문다 전투와 아브링가 전투에서도 연이어 패배했다. 하지만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로마군이 공세를 멈추면서, 세 장수들은 히스파니아의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연이은 승리로 지배지가 넓어지면서 한정된 병력으로 다 지키기 어렵게 되자, 스키피오 형제는 기원전 211년 2만 명의 켈티베리아인을 용병으로 새로 고용했다.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2만여 로마군을 이끌고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치기로 했고,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1만여 로마군에 2만의 켈티베리아인 용병을 합한 3만여 명으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치기로 했다. 그러나 켈티베리아인 용병들이 하스드루발 바르카에게 매수되어 집단 이탈해 버리고, 기스코의 사위인 마시니사의 대활약, 연이은 불운 등이 겹치면서 결국 스키피오 형제는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로마군은 궤멸되어 겨우 8천 명만이 에브로 강 북쪽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잔여 로마군을 마저 섬멸하러 출진했다. 두 지휘관을 모두 죽였으니 남은 로마군은 지리멸렬할 거라 여기고 방심했으나, 로마군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를 새 지휘관으로 선출한 뒤 그의 지도하에 재정비를 완료했다. 마르키우스는 적군이 무질서하게 행진하는 걸 확인하고, 장병들을 이끌고 요격하였다. 적이 뜻밖에도 조직적으로 공격해오자, 카르타고군은 깜짝 놀라 물러났다. 로마군은 경애하는 지휘관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거세게 몰아붙였고, 결국 카르타고군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르키우스가 추격 중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거나 장병들이 너무 멀리 쫓아갔다가 위험에 처했을 것이라고 한다.
마르키우스는 뒤이어 정찰병을 보내 기스코가 세운 진영을 살펴보게 해, 적진의 경계가 허술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의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그날 밤 야습을 감행했다. 이미 사기가 꺾인 카르타고군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패주했고, 로마군은 적진을 점거한 뒤 물자를 전부 챙겨서 에브로 강 건너편의 본영으로 가져갔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의심하지만, 카르타고군이 이후로 수적으로 적을 압도함에도 불구하고 에브로 강 건너편의 로마군을 섬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원전 210년 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원군을 이끌고 에브로 강 북쪽의 로마군과 합세했을 때, 그는 루시타니아에서 이베리아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었고,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사군툼 인근에서 로마군의 남하를 대비하고 있었으며, 마고 바르카는 카스툴로 근처에 포진했다. 스키피오는 이 세 장수를 각개격파하겠다고 선언하고 출진했지만, 실제로는 함대에 병력을 싣고 이베리아 카르타고 식민지의 중심지인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해 2일만에 점령했다.(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세 장수는 이 소식에 경악했지만, 스키피오의 온화 정책에 감명받은 이베리아 부족들이 대거 가세하자 함부로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카르타고 노바 근처로 이동하여 스키피오가 더 이상 세력을 뻗치지 못하도록 견제했고, 그는 주변 도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이 곧 오니 이탈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고 바르카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함께 용병을 소집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기원전 208년, 스키피오가 바이쿨라 언덕에 주둔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군대를 공격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그와 동생 마고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려 했지만, 전세가 기울자 주력군을 수습하여 철수했다.(바이쿨라 전투) 며칠 후 전장에 도착한 그와 마고 바르카는 로마군이 이미 언덕을 장악한 걸 보고 전투를 회피했다. 그들은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3만 장병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세할 테니, 두 사람은 히스파니아에 남아서 스키피오와 전투를 지속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로마군이 점거한 피레네 산맥의 동쪽 고개를 피해 서쪽 고개를 건너 크게 우회하여 알프스로 진격했다. 그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베티스 계곡으로 이동했고, 마고는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로 향했다.
기원전 207년 마고 바르카가 아프리카에서 파견된 한노와 함께 용병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로 상륙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이끄는 1만 로마군이 이들을 기습하여 용병들을 섬멸하고 한노를 체포했다. 마고는 가까스로 추격을 회피해 그의 군대에 합세했다. 스키피오는 여세를 몰아 베티스 남부를 정복하려 했지만, 각 도시에 강력한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어서 일일이 공략하기엔 희생이 많이 따를 거라는 걸 파악하고 타라고나로 철수했다. 이후 그와 마고는 거듭된 패배로 이베리아 부족들의 이반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최후의 한판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206년 봄, 그들은 각지의 도시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끌어모아 일리파에 집결했다. 그들은 언덕에 올라가서 진영을 치고, 스키피오가 오기를 기다렸다. 스키피오 역시 한판 승부로 카르타고군을 이베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길 희망했기에, 그들의 도전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벌어진 일리파 전투에서, 그와 마고는 사력을 다해 스키피오에 맞섰지만 끝내 참패했다. 그는 마고 및 소수의 측근만 거느린 채 카디스 인근 해안에 배를 타고 하데스로 도주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곧 모든 걸 포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갔고, 마고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하는 등 일련의 시도를 해봤지만 끝내 실패한 뒤 카르타고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용병들을 소집하여 이탈리아로 가 큰형 한니발 바르카와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로마군에게 가로막혀 실패하고 중상을 입은 채 제노바에서 농성했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뒤 누미디아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를 직접 찾아가 막대한 선물을 건네며 자신과 협력해 카르타고와 대적하자고 권유했다. 시팍스가 긍정적인 뜻을 표명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그가 직접 나서서 마시니사와 딸 소포니스바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시팍스에게 딸을 바쳤다. 시팍스는 소포니스바와 결혼한 뒤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고, 그와 힘을 합쳐 마시니사를 협공해 누미디아 전체를 석권했다. 마시나사는 아내와 부하, 그리고 영토를 모두 잃고 몇몇 부하만 대동한 채 사막에 숨어 지내다가 기원전 204년 아프리카에 상륙한 스키피오와 합세했다.
스키피오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자, 그는 카르타고 방위군 사령관을 맡아 시팍스와 함께 스키피오를 대적했다. 상륙 후 우티카를 포위하던 스키피오는 3만 보병에 3천 기병을 갖춘 카르타고군과 5만 경보병에 1만 기병을 갖춘 누미디아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위를 풀고 카스트라 코르넬리아 곶에서 수비에 전념했다. 그는 시팍스와 함께 기원전 204-203년 겨울에 별도로 진을 치고 로마군을 봉쇄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두 장수와 협상하는 척 하면서 방심시킨 뒤 야음을 틈타 기습하여 불을 지르자,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이 크게 무너졌다.(우티카 전투)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한 번의 야습으로 4만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누미디아로 도망친 시팍스와 재차 합세한 뒤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스키피오와 대적했으나 또다시 참패했다. 시팍스는 곧 로마군에게 사로잡혔으며, 누미디아는 스키피오의 편에 서서 맹활약한 마시니사의 수중에 들어갔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폴리비오스는 그가 이후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아피아노스는 그의 말로에 대해 서술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카르타고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자 돌아가지 않고 용병과 누미디아 잔여 병력을 이끌고 사막에서 군벌 노릇을 했다. 그러다 한니발 바르카가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스키피오와 대적하게 되었을 때, 원로원으로부터 "사형을 취소할 테니 돌아와서 한니발의 군대와 통합해 적과 맞서라"는 통보를 받고 즉시 돌아갔다. 그러나 도시로 돌아간 그는 연이은 참패로 수많은 시민을 죽게 만든 주제에 무슨 낯으로 돌아왔느냐는 시민들의 질책을 받았고, 급기야 폭도들의 습격을 받자 가족의 묘지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폭도들은 그의 머리를 잘라서 시내를 의기양양하게 행진했다고 한다.
딸 소포니스바의 말로 역시 좋지 않았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시니사는 누미디아를 되찾자마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사로잡힌 시팍스로부터 자신이 로마를 배신한 것은 소포니스바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이며, 그녀는 마시니사더러 카르타고와 손잡으라고 설득할 것이라는 경고를 접한 후 그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에게 소포니스바가 시팍스의 배신에 연루되었으니 로마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며 그녀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마시니사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자신이 그녀를 처리할 테니 말미를 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그 후 마시니사는 충직한 하인에게 독약과 전말을 설명하는 편지를 건넨 후 소포니스바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소포니스바는 하인으로부터 이를 전달받은 직후 독약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