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년~BC 241년)3.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년~BC 201년)4. 제3차 포에니 전쟁(BC 149년~BC 146년)5. 그 후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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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후 또 너희 튀리아여! 영원히 그의 핏줄 모두에
곡한 미움을 버리지 말라! 너희는 내 주검 앞에 이를
중히 약속하라! 저들과의 평화는 일절 없으리라!
학살이 이제든 언제든 아무 때나 무력을 갖출 때에
교한 내 무덤에서 누군가 생겨나 원수를 갚을 것,
사람이 불과 칼을 들어 달다냐[1] 백성을 쫓아갈 것이니,[2]
랑크스 해안이 해안에 대립하고, 바다가 바다에 맞서
해마다 원컨대 무기에 무기로 당대도 후손도 싸우라!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이네이아스에게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내린 저주[3]
곡한 미움을 버리지 말라! 너희는 내 주검 앞에 이를
중히 약속하라! 저들과의 평화는 일절 없으리라!
학살이 이제든 언제든 아무 때나 무력을 갖출 때에
교한 내 무덤에서 누군가 생겨나 원수를 갚을 것,
사람이 불과 칼을 들어 달다냐[1] 백성을 쫓아갈 것이니,[2]
랑크스 해안이 해안에 대립하고, 바다가 바다에 맞서
해마다 원컨대 무기에 무기로 당대도 후손도 싸우라!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이네이아스에게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내린 저주[3]
Bellum Punicum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공화국이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이므로[4] '페니키아 전쟁'으로 번역할 수 있다. 영어로는 퓨닉 워(Punic War)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얻었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는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는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최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년~BC 241년)
자세한 내용은 제1차 포에니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3.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년~BC 201년)
자세한 내용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여기에는 간단히 서술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정치력인 영향력을 많이 잃은 하밀카르 바르카는 자원해서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던 그는 이주 8년째에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니, 그 뒤를 사위인 하스드루발이 이어받아 7년간 통치했다. 이 시기에 로마는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진출을 경계하여 하스드루발과 접촉해 에브로강을 경계로 더 이상 세력을 뻗지 않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하밀카르 바르카의 장남인 27세 젊은이 한니발 바르카가 이어받았다. 당시 로마는 사군툼이라는 명목상의 동맹국(사실상 속국)을 내세워 에브로강 서쪽으로 진출해 카르타고를 압박했고, 결국 한니발은 집권 2년에 사군툼에서 카르타고계 시민 및 친카르타고파 인사들이 살해당한 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사군툼을 포위했다.
이때 로마는 사군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북이탈리아에서 갈리아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중이라 당장 군단을 파병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대신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절들은 한니발로부터 철수하겠다는 대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로마 사절들은 직접 카르타고 본국으로 가서 한니발을 사군툼에서 철수시키든지 아니면 로마와 전쟁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들은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고, 이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 포고를 했다. 한니발은 로마가 선전 포고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군툼을 점령한 다음 그곳 주민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렸다.
로마 원로원은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주어 스페인 원정을 결정했지만,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앉아서 기다리기는커녕 군대를 편성하여 북상했고, 이에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에 맞서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마살리아(현재 마르세유)에 주둔하며 한니발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로 진입한다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군을 감행했다. 역사상 최초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은 로마군의 허를 완전히 찌르는 데 성공했다.
놀란 로마는 마살리아의 스키피오와 또 다른 집정관이자 시칠리아에 주둔 중이던 셈프로니우스를 급하게 소환해 한니발를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 트레비아강 부근에서 로마 추격군을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울 정도로 격파해 버렸다. 덕분에 한니발은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치만 보고 있었던 북부 갈리아 부족을 새로운 지원 세력으로 만들어 이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며 군사력을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트레비아 전투).
로마는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군단을 내어주었고 이들은 각각의 군단을 이끌며 한니발이 남하할 서쪽과 동쪽의 가도를 봉쇄했다. 한니발은 이 두 가도 중 하나를 골라 남하하는 대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 사이의 가운데 늪지대를 통과하기로 결정한 후, 3박 4일간 휴식도 수면도 없는 초강행군을 벌여 이 늪지대를 로마군이 눈치채기 전에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합류한) 갈리아군과 대부분의 전투 코끼리들을 잃고 한니발 자신도 한쪽 눈이 완전히 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행군의 결과,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아무런 피해 없이 진입해 지리적인 이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다 할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한니발군은 거리낌 없이 약탈을 벌이고 농지를 불태우면서 돌아다녔다. 로마 평민층의 지지를 얻던 플라미니우스는 지지층의 호소에 응답하기 위해 한니발군을 빠르게 전멸시켜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한니발은 이러한 심리를 역이용해 트라시메노 호수에 기지를 세워 주둔한 척한 뒤 추격해 온 플라미니우스의 군단을 매복 작전으로 궤멸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했다(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이 승전 덕분에 한니발군은 이탈리아 남부까지 방해물 없이 진격할 수 있었고, 로마 원로원은 지구 전법론자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군단을 맡겼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집정관 선거에서 적극론자인 바로를 선출했다. 새로운 집정관인 바로와 파울루스는 무려 8만 6천 명에 달하는 로마 군단을 조직했다.
한편 한니발은 그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탈리아 남부로 남하하여 로마군의 군량 보관소가 있는 칸나이에 진입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대군을 이끌고 칸나이에서 한니발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전쟁사에 남을 기발한 기병, 보병 간의 유기적인 조합으로 로마군을 포위하여 그들을 섬멸해 버렸는데 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위 섬멸전으로 평가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을 설명하는 교범에는 백이면 백, 칸나이 전투를 예시로 들 정도이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의 병력은 5만 명 남짓으로 로마군보다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2배에 가까운 적군을 오히려 거꾸로 포위해서 전멸시켜 버렸다. 전투 결과 약 5만 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포로로 잡힌 로마군과는 달리 한니발의 피해는 사상자 5천 명 남짓에 불과한, 일방적인 대승리였다.
칸나이 전투의 여파는 엄청나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고, 로마 동맹시의 제2인자였던 캄파니아의 카푸아와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계 폴리스의 맹주 격이던 타렌툼 등 남이탈리아 방면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 편에 붙기 시작했으며, 시칠리아섬의 강국인 시라쿠사도 로마와 동맹을 끊고, 카르타고에 붙었다. 칸나이 전투 문서로.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이 군사적 천재이며 그를 상대로는 대규모 회전으로 승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뼈저리게 느낀 로마는 더 이상 한니발과 정면으로 회전을 벌이는 것은 포기하고, 파비우스가 주장한 대로 지구 전법, 즉 게릴라 전법 + 초토화 전법을 쓰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당시 지중해의 초강대국이며 상비군만도 10만 명 - 잠재적인 가용 병력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명- 에 달하는 로마가 원정군이라 보급도 안 되고 병력 충원도 어려운 3만 명인 한니발 군대에 맞서려고 자기 땅을 불태우며 파괴하는 청야 전술을 썼다는 것이다.
그 후 10년간 로마와 한니발은 전면 대결 없이 지루한 소모전을 계속했다. 한니발은 온갖 계책을 써서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성공할 때마다 전투의 승자는 한니발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절실했고, 다른 카르타고 지휘관들이 하나같이 무능했기 때문에 한니발 외의 카르타고 군대는 연전연패했다. 여기에 카르타고 본국도 계속해서 터지는 반란과 히스파니아 원조 때문에 한니발에게 제대로 보급을 해줄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 해군이 결사적으로 카르타고의 보급선을 저지하면서 한니발을 말려 죽이려고 들었다. 반면 로마군은 본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계속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들이 일치단결해 한니발에 맞서는 무서운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한니발이 노렸던 로마 동맹 체제의 붕괴는 결국 실패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보다도 로마 동맹 체제가 훨씬 견고했던 것과 한니발 외에는 사실상 적수가 없었던 강력한 로마군이 동맹을 유지한 도시를 지지하고, 이반한 도시는 공격하여 다시 로마 세력권에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5] 결국 한니발 군대는 겨우 얻은 이탈리아반도 내 지지 세력도 거의 잃고,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 끝으로 몰렸다.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지원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스페인에서 북이탈리아로 진입하면서, 갈리아 부족들의 지원군까지 포함시켜 5만 명으로 전력을 강화하고 한니발을 향해 남하했다. 그러나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리비우스와 네로 휘하의 로마군 3만 7천 명에게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멸당하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이로써 한니발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대규모 보급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만일 이때 하스드루발이 성공적으로 합류했다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하스드루발의 군재는 형의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니발이 고립되고 전세가 호전되자 로마는 카르타고령 히스파니아를 평정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뒤,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국과 그 동맹국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연전연승하여 결국 누미디아 왕국[6]까지 수중에 넣었다. 궁지에 몰린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에게 귀국 요청을 보냈고, 한니발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반도를 떠나 카르타고로 귀국했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 직전 스키피오를 만나 화친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은 스키피오와 대결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대패했다. 결국 오랫동안 처절한 격전이 연이어 벌어졌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자마 전투 문서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에스파냐를 얻었고 카르타고를 사실상 반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기원전 168년에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역시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한니발에게 당한 충격이 너무나도 엄청났던 로마는 제2의 한니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 카르타고를 철저히 탄압했다.
4. 제3차 포에니 전쟁(BC 149년~BC 146년)
자세한 내용은 제3차 포에니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5. 그 후
포에니 전쟁은 고대 지중해 세계가 그때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대전쟁이었다. 장장 100년 동안 도합 1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해 지중해 세계 전역을 무대로 벌인 가히 고대판 세계 대전이었다. 갈리아족, 이베리아족, 누미디아 왕국, 시칠리아의 도시 국가들과 지중해의 해적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국 같은 기존의 강대국들도 참전하면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질서를 아예 새로 쓴 전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이나 키루스 대제의 페르시아 제국 건설도 큰 전쟁이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대에 포에니 전쟁보다 더 큰 전장은 중국 대륙에서 전국 칠웅이 벌이고 있었던 전국 시대가 유일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는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다. 주요 섬들이 모두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고 전쟁을 거치면서 건설된 거대한 해군력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군력 역시 희대의 명장 한니발을 상대하면서 그의 전략 및 전술을 벤치마킹한 결과, 전쟁 이전에도 이미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조직된 군대로 평가되었던 로마의 육군은 경쟁 국가들의 군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들과 벌이는 전쟁을 보면 2~3배[7]의 적을 너무나도 쉽게 압살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작용도 없지 않았는데 때를 같이하여 여러 정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자기 농장을 경영하던 시민권자들(자영농 중산층)이 대부분 몰락하면서[8] 경영 불량 상태가 된 평민들의 농지는 대지주들에게 넘어갔고, 새로 얻은 비옥한 해외 식민지에서 싼값의 농산물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들어오면서 로마의 자영농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9] 반면 로마 귀족들은 이렇게 몰락한 자영농들의 농장을 헐값에 긁어모았을 뿐만 아니라, 포에니 전쟁 당시에 매입한 전쟁 공채 비용 중 1/3에 해당하는 금액은 공유지를 불하받는 방법으로 돌려받으면서 어마어마한 토지와 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이러한 빈부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를 놓고 엄청난 부를 획득하며 부상한 대지주 귀족 계급과 몰락한 빈농들을 대변하는 민중파 세력들 간의 숙청과 정쟁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인들이 선택한 것이 공화정의 해체와 제정의 성립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포에니 전쟁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10][11][12]
반면 카르타고는 아예 멸망당했다. 로마는 최소한 제정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패배한 상대국을 정복하기보다는 동맹이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이 피지배층의 반감을 덜 사는 훨씬 효율적인 통치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그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안겨준 엄청난 충격과 고통 때문에 로마는 카르타고에겐 이전에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종료 후에도 그야말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명분만 노리다가 끝내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도시도 폐허가 되었다. 로마가 패전국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한 경우는 카르타고를 제외하면 수차례에 걸쳐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킨 유대 왕국, 계속해서 로마에 반기를 들은 코린토스 정도뿐이었다. 결국 한니발 자신은 그 엄청난 능력으로 로마의 최대 적수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나 역으로 자신이 로마에 남긴 충격 때문에 자국의 멸망에 일조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118년에 걸쳐 3번의 전쟁을 겪었고, 마지막 제3차 전쟁도 차포 다 뗀 상황에서 3년이나 로마 정예군의 맹공을 버텨냈던지라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증오는 대단했다. 3년간의 공성전으로 폐허가 다 된 카르타고[13]를 다시 한번 건물 한 칸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부숴버렸고, 남아있는 카르타고 시민들에 대해선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다음 생존자들까지 노예로 팔아버렸다.
수백 년간 강대국으로 번영한 도시인 만큼 카르타고는 지리적인 이점이 많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가 복구되기까지는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14] 그만한 요충지를 100년간 황무지로 내버려둘 만큼 로마인들의 카르타고에 대한 공포와 증오는 대단했다.
7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번영을 누렸고, 로마와 100년에 걸친 대전쟁을 벌인 강대국이었던 만큼 로마인들도 카르타고의 멸망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던 듯하다. 특히 직접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남긴 술회가 유명하다. 스키피오와 함께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참가했으며 훗날 《포에니 전쟁사》를 저술한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불타는 카르타고시를 바라보며 비애감에 젖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읊으며
"훗날 언젠가 로마도 이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고 말하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5]스키피오는 전쟁 이후 맞닥뜨릴 로마 공화국의 변화를 진지하게 걱정했다기보다는 아마도 '그 강대한 카르타고도 이렇게 되었으니 로마 역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란 단순한 감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이 발언은 결과적으로는 약간 사실이 되었다. 물론 로마 자체는 공화정이 무너진 뒤에도 400여 년[16] 존속했지만 위에서 나왔듯이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로마 공화국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로마 공화국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로마 제국이 똑같은 방식으로 멸망했다.[17] 즉 의도치 않게도 스키피오는 당시 로마의 국체인 공화정 로마의 멸망과 동로마 제국의 최후를 경고한 셈이 되었다.
곁들여서 당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군영에는 훗날 로마 역사에서 유명해지는 그라쿠스 형제의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참전하고 있었다.
6. 여담
1985년 1월에 튀니지의 튀니스 시장이자 명예 카르타고 시장이며, 당시 아랍 연맹의 사무총장이었던 체드리 쿠리빈이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이자 이탈리아 공산당의 일원인 유고 베텔레에게 종전 협정을 제안하였고, 그해 2월 5일에 동시에 문서에 서명하여 종전 협정을 체결하는 이벤트를 선보였다.이 종전 선언의 명분은 카르타고가 항복했지만, 그 이후로도 공식적으로 종전 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외교 문서상의 하자로 연장된 전쟁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치면 포에니 전쟁은 2,131년 만에 종결된 셈이다. 다만 고대에는 이런 식의 종전이나 강화 협정을 맺는다는 개념도 없었던 만큼 로마시와 튀니스시의 우호를 다지기 위한 상징적인 퍼포먼스에 가깝다. 그나마도 이탈리아-튀니지 사이의 국가 간 협정도 아니니 더욱 효력이 없다.
천병희 교수에 따르면 '포이니' 전쟁이 아닌 '포에니' 전쟁으로 표기하는 것은 오류라고 한다. 천병희 교수는 Poeni는 '포이니'로 발음해야 맞으며, Bellum Punicum을 포에니 전쟁으로 번역하는 건 라틴 문법적으로도 오류이고, 당대 로마인들의 지칭 의미와도 동떨어져 있다고 했다. 천병희 교수는 Bellum Punicum을 포에니 전쟁이 아니라 '카르타고 전쟁'으로 번역하는 것을 제안했다.
2002년 3월 나남출판사에서 작가 박경리가 발표한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형제가 일제 치하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형이 동생한테 "로마가 카르타고를 불태웠을 때, 네가 말한 도덕과 윤리는 어디에 있었느냐?"라고 일갈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1] Dardania, 트로이가 위치하고 있었던,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반도의 명칭이다. 다른 이름으로 '트로아다'(Τρωάδα)라고도 한다.[2] 트로이 전쟁 때 아이네이아스가 함락된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반도로 건너와 로마의 전신 격인 라비니움을 건설한 신화를 들어 로마는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다.[3]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4권 622-629행, 김남우 번역[4] 라틴어 Poenicia/Poenicus에서 나왔는데,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의 티레에 기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5] 이 시기에 로마와 동맹을 유지한 도시와 배신한 도시의 이유는 제각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일괄적인 서술이 어렵다. 다만 칸나이의 대패를 보고도 대다수의 동맹시가 로마를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칸나이 전투가 일어난 동맹시조차도 그 이후로도 동맹을 유지하며, 인접 지역의 방파제 역할을 했고, 한니발에게 넘어간 도시도 도시 내 친로마파가 다시 로마군을 끌어들여 로마 체제로 복귀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 로마 원로원은 배신한 동맹시에 대해서는 토지를 몰수하는 등의 엄중한 처벌을 집행했다.[6] 한니발 군대의 핵심인 기병의 대부분이 갈리아의 용병들과 누미디아의 기병들이었다.[7] 비록 기록의 신빙성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때로는 10배.[8] 후반에는 무너지지만 로마 제국의 경우, 시민권자만 군인이 될 수 있었다.[9] 그리고 이들은 로마 내전기 동안 유력 정치가의 사병이 되어 그들의 주인을 위해 싸웠다.[10] 아이러니하게도 대귀족들은 공화정을 지키려 했고, 반대로 몰락한 빈농들은 그들의 편이 되어준 그라쿠스 형제나 마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응원하여 결국은 제정이 세워지게 되었다.[11] 애초에 민중들 입장에서는 공화정을 지지할 이유가 없었는데, 공화정을 경영하는 원로원이 로마의 최상류 기득권층이 되어 민중을 위한 모든 변화와 개혁을 거부한 채 그런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며 불법적으로 죽여버렸다. 즉 민중들은 도저히 기존 체제로는 자신들의 삶에 변화가 오지 않으니 기존 체제에 대한 지지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12] 사실 로마의 공화정은 실제로는 귀족 공화정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꽤나 건전한 편으로 평민들도 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상술한 대로 빈부 격차가 늘어났으나 정작 포에니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제대병들에 대한 처우를 제대로 하지 않고 그 늘어난 영토는 원로원 귀족들이 독점함으로써 로마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니발에 지하에서 웃겠다.[13] 카르타고에 소금을 뿌려 식물을 못 자라게 했다는 말도 있다. 《성경》에도 사사기 9:45에도 있을 만큼 과거부터 이용된 방법인데 실제로 이를 행했는지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소금에 절인 이야기는 《캠브리지 고대사》(1930)의 첫 번째판, Bertrand Hallward의 기사에서 학술 문헌에 처음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14]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복구 계획이 세워졌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미뤄졌다.[15] 《로마 전쟁영웅사》(아드리안 골드워디 저, 강유리 옮김, 말글빛냄) p.153.[16] 동로마를 포함할 경우 1,400년[17] 다만 서로마 제국은 카르타고와 전혀 다른 멸망 과정을 거쳤다. 장엄하고 처절한 대전투, 처참한 학살 및 약탈 따위는 없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로 멸망했고, 신성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