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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4:38:19

폰티우스 필라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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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프라이펙투스 유다이아
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 | Πόντιος Πιλᾶτος
파일:What-is-truth02.jpg
"Quid est veritas?(Τί στιν αλήθεια;)"
"진리가 무엇인가?" (공동번역요한 18:38)[1]
<colbgcolor=#9F0807> 이름 고전 라틴어 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
교회 라틴어 폰치우스 필라투스
한국어 번역 본티오 빌라도(공동번역성경)
본디오 빌라도(개역개정성경)[2]
본시오 빌라도(가톨릭 성경)
생몰년 미상(? ~ ?)[3]
국적 로마 제국
직업 로마 속령 유다이아(Judaea) 총독(Praefectus)
가족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쿨라(추정)

1. 개요2. 이름3. 직위4. 역사적 기록
4.1. 카이사레아 석판 유물 출토
5. 기독교의 필라투스
5.1. 성경에서의 묘사5.2. 신경에서의 언급
6. 매체에서의 등장7. 기타

[clearfix]

1. 개요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대중적으로 빌라도[4]로마 제국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의 군인이다.

기원후 26년부터 36년까지 유다이아(유대) 속주 총독(프라이펙투스 유다이아, Praefectus Iudaea)이었으며, 재직 중 예수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복음서에서는 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있으며[5], 필라투스는 도리어 예수를 사형시키지 않기 위해 유월절 유대인 죄수 석방 관습까지 거론하며 어떻게든 애썼지만 마지못해 승인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2. 이름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그의 본명이며, 어미가 생략된 폰티오 필라토는 라틴어 대격 표기의 변형이다. 한국어 번역 명칭은 생략형을 주로 음차하여 쓰므로 공동번역 성서에서 '본티오 빌라도', 가톨릭 성경에 '본시오 빌라도', 개신교 성경에 '본디오 빌라도'로 기재되어 있다. 가톨릭의 경우 교회 라틴어에서 단어 중간·모음 앞에 있는 -ti가 치경 파찰음([t̪ː͡s̪i])으로 변이음화된 것을 발음하기 편한 '시'로 음차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본시오'로 표기한다.

폰티우스는 '다섯째'라는 의미로 삼니움족의 부족이름 중 하나이다. 필라투스는 삼니움족의 가문 이름 중 하나라고 한다(출처). 또는 로마의 창인 필룸에서 유래한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원래 그의 조상은 삼니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삼니움 전쟁은 예수가 태어나기 290년 전에 끝났고 진작에 로마에 합병되고 로마에 동화되었으니 삼니움족 출신 같은 건 의미 없고 그냥 로마인이다. 폰티우스는 로마시대에는 꽤 흔하게 쓴 이름으로 키케로의 친구이자 호민관을 지냈고, 카이사르 암살자 중 하나인 폰티우스 아킬라라는 사람도 있었다.

3. 직위

필라투스의 직함은 유다이아(Iudaea) 속주의 총독(Praefectus[6])으로서,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중부 지방을 다스렸다. 본래 이 지역은 헤로데 임금의 사후 4개로 분할된[7] 왕국 중 헤로데 아르켈라오스(Ἡρῴδης Ἀρχέλαος)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폭정으로 AD 6년에 교체되고[8] 로마제국 유다이아 속주가 되어 총독이 파견되었다.[9] 예루살렘 일대는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최고의회에 소속된 사제들 중 "열심당원에게 암살당했다"고 기록된 이들이 있는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필라투스의 직함을 총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의 여부에 대해서 문제 제기가 있다. 필라투스는 유다이아 속주를 관할하지만, 또한 더 큰 속주인 시리아의 총독 밑에 있었는데,[10] 이 때문에 그의 직함을 총독으로 번역하는 게 오역이 아니냐는 것. 일단 라틴어로 쓰자면 필라투스는 Praefectus이고 시리아 총독은 Proconsul(직역하면 '전직 집정관')이므로 구분이 된다. 당시 필라투스의 직함은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 군단장이자 시리아 Proconsul의 수석부관 겸 유다이아 속주의 Praefectus이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도, 성경의 저자들도 속주 총독들의 직함 구분을 엄밀히 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필라투스의 직함을 엄밀하지 못하게 Procurator라고 전하며, 루가 복음서에서는 시리아 총독과 유다이아 총독 모두 ἡγεμον(헤게몬)[11]으로 적는다.

사두정치 ~ 테오도시우스 1세[12] 시대의 로마사를 이야기할 때 정제와 부제를 가리지 않고 이해가 쉽도록 모조리 황제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를 보면 무작정 오역이라 몰아붙이긴 힘들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과 당대 사람들도 총독 직함의 구분을 엄격히 하지 않았는데,[13] 성경의 원문을[14] 벗어나서까지 독자를 헷갈리게 번역할 필요는 없다.

4. 역사적 기록

로마인임에도 정작 성경 외에 그의 신원에 대한 로마 쪽의 기록은 없는 수준이며,[15] 성경 외의 그에 대한 로마의 기록은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에서 네로의 기독교 박해를 설명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예수라는 사람이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처형당했다" 정도로 짧게 언급하는 정도밖에 없다. 오히려 로마 제국식민지였던 유대 지역의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살펴봐야 하는 실정이다.

유대 철학자 필로는 필라투스를 "거칠고 악의가 있으며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필라투스가 부임하고 나서 곧 유대인들을 적대하였다"고 지적한다. 유대 고대사는 당대의 기록 중에 예수와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관해 쓴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그의 행적에 대한 유대인 역사가들의 평가는 좋지 않은데, 필라투스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유혈 진압하는 군사적인 탄압 외에도, 유대교 성전에 로마식 신상(神像)을 달았다가 반발로 철회한다거나, 성전의 자금을 가져다가 로마식 수도관을 건설하는 정책을 세웠다가 유대인들의 항의에 직면하기도 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서기 26년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후임으로 유대 지방에 부임했다. 이 시절 유대 지방은 심심하면 폭동을 일으키는 험지라 로마 제국에서 골치 아픈 지역으로 여겼고,[16] 이전 로마 총독들은 번번이 안정적인 통치에 실패했기에,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는 만만한 인물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때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에 강경책을 쓰자는 세야누스의 추천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임명받았다고 한다. 당시 로마 총독의 임기는 관례적으로 3년이지만 티베리우스가 이례적으로 장기집권을 맡겨 필라투스는 서기 36년까지 10년 동안 유대를 통치했다.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지론 때문이기도 한데, 지방관들을 극히 불신하던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파리'에 비유하며 "상처 부위에 새 파리들이 와서 빨아먹는 거보다, 처음부터 빨아먹던 파리들이 계속 빨아먹는 편이 낫다"[17]면서 필라투스에게 장기간 통치를 보장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세야누스의 예상대로 강경한 정책을 자주 시행했는데, 우선 부임할 때 카이사레아 지역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를 유대 왕국의 수도이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재배치했고, 더불어 유대의 행정 장관 중 처음으로 유대인이 우상으로 여기며 혐오하던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으로 들여왔다가 유대인들의 강경한 반발로 다시 철수시킨 일도 있었다. 더불어 치수공사를 통해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왔는데 이것이 성수 장사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불만을 내비쳤다. 유대인들이 필라투스에게 항의하는 집회를 계속 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해산시켰지만 갈수록 먹히지 않았고, 결국 진압은 유혈사태로 비화되지만 일단은 소요를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그즈음 예수가 처형당한다. 그러나 기록을 토대로 판단해볼 때 필라투스가 유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예수를 처형하는 데 주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로마 제국은 이미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현재 유대교 학자들은 당시 산헤드린 재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경 구절이 산헤드린 공회법정의 재판절차와 권한과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 불일치를 종교권력이 사법절차에 개입하여 정상적인 절차를 망칠 정도로 부패한 결과라고 본다. 사실 기독교측의 주장을 빼더라도 전근대 시절 그 어떤 나라도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엄정한 절차대로 모든 일이 처리되기는 어려웠다. 필라투스가 손을 씻은 것과 유대인들이 적극 처형을 주장한 것이 후대 복음서 성립 시 기독교를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섞여 왜곡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8]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앞서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인에게 반감을 샀고, 통치시기에도 유대인의 풍속으론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 군기나 장비에 있는 황제의 형상을 가려야 하지만 일부러 대놓고 무시했다. 그리고 더군다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두가이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성전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는데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 성전자금은 고아나 과부들의 구휼자금으로 써야만 했다. 그런데도 착복하고 나서 수로작업에 썼다고 변명했다. 그럼에도 수로작업에 들어갈 공사비가 모자라 다시 세금을 걷었다.[19] 이처럼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정직하지도 유화적이지도 않았다. 예수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도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0]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집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 티라타바라는 마을 근방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21]에게 항의한다. 비텔리우스는 필라투스를 10년 동안 있었던 유대 지사에서 해임시키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유대에서의 폭력사태에 대해 답하도록 로마로 보낸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도착할 때, 티베리우스가 죽는다.[22]

유대인들은 사두가이인, 바리사이인, 열심당원 모두 가리지 않고 필라투스를 증오한 걸로 보인다.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폭동에서도 필라투스는 유대인의 종교를 무시했고, 유대인들은 이런 간섭에 대해서 반감이 컸다.

4.1. 카이사레아 석판 유물 출토

생몰년도나 어디서 나고 어디서 죽었는지도 불명으로, 워낙 기록이 희박한 탓에 한때 기독교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1961년 이스라엘 카이사레아에 있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야외극장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석판이 발견되어 그가 실존 인물임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23]

이 석판은 극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들 중의 하나에서 계단의 층계참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발견될 당시 사람들이 밟고 다녀 이미 돌의 왼쪽 부분이 깎여나간 상태였다.[24] 명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DIS AVGVSTI)S TIBERIÉVM
(...PO)NTIVS PILATVS
(...PRAEF)ECTVS IVDA(EA)E
(...FECIT D)E(DICAVIT)
출처[25]
괄호 부분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깎여나간 부분이다. 깎여나간 부분들도 비슷한 헌정 문구가 새겨진 다른 온전한 유물들의 사례를 참고해서 채워넣을 수 있다. 이를 번역하면,
(존엄하고 신성하신 황)제께 티베리에움을[26]
(폰)티우스 필라투스
유대(의) 총(독)
(헌)정(했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폰티우스 필라투스 본인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바치는 의미로서, 석판을 새겨서 야외극장에 놔뒀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기독교인들이 부른 칭호나 호칭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날 때부터 불린 그의 본명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석판을 헌정했을 리는 없다. 석판의 글씨가 2000년이 지나도록 컴퓨터 폰트처럼 반듯한 것으로 보아 실력있는 석공이 새긴 것이 분명한데, 본인이 만든 게 아니면 누가 돈을 들여서 이런 걸 만들겠느냐는 것. 이걸로 그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도 증명되었다.

5. 기독교의 필라투스

기록이 부실한 점을 보면 크게 별 볼일 없는 인물이 예수를 처형한 것 때문에 현대까지 알려진 것처럼 보인다. 로마 제국의 지방 총독 휘하의 관료는 많았고, 통치권을 행사한 지역 내에서는 유명인사였겠지만,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그냥 흔하디흔한 관료 중 하나였다. 실제 이 당시의 필라투스와 비슷한 급의 인물 가운데서 현대까지 알려진 인물은 거의 없다. 이 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현대까지 인지도가 높으려면 황제 아니면 뭔가 정말로 비범한 군사적·문화적 업적을 세운 사람 정도. 아무리 황제라도 별 업적이 없으면 인지도가 낮은 경우가 많은데, 지방 관료 정도 지위로 현대까지 이름을 알린 건 상대가 다름 아닌 예수였다는 점 하나 덕분이다. 뭐 사실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같은 당대의 황제들도 아무리 유명하다고 하더라도 2000년이 지난 뒤인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예수에 비하면 인지도가 높다고 할 수 없다. 당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살아 있던 당시 로마 황제가 누군지도 연표 따져보기 전엔 잘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예수가 누군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를 죽였다는 오명은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지역들 가운데 예수와 같은 종교 지도자는 흔했고, 필라투스 입장에서는 그저 민중소요나 일으키는 주동자들을 지방 토호들 여론에 따라 처형한 것이다. 당시 민중소요는 드물지 않게 일으났으며, 이에 대한 진압과 지도자의 처형도 비일비재했다. 그 상대가 하필이면 후대에 세계 최대의 신자를 거느리게 된 종교의 신앙 대상이 된 예수였기 때문에, 2천 년이 넘는 지금까지 이름(어떤 면에서는 악명)을 남기게 된 것이다.

5.1. 성경에서의 묘사

τί ἐστιν ἀλήθεια;[27]
QUID EST VERITAS?
진리가 무엇인가?
요한의 복음서 18장 38절, 공동번역성서
예수를 심문하면서 한 말이다. 이에 예수는 묵묵부답으로 대응한다.
그 다음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
ἰδοὺ ὁ ἄνθρωπος.
ECCE HOMO![28]
자, 이 사람이다.
요한의 복음서 19장 5절, 공동번역성서
매질 후 가시나무 관과 자주색(황제의 용포) 옷을 입혀 내보낸 후 다시 한 번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무죄를 알리면서 호소하는 말이다.

예수는 본래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어 유대 지방 최고 의회(성전)에 출두했는데, 현지인 의회에서는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었고 로마인들은 여사제와 간통한 정도가 아닌 바에야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일이 드물어서 성직자들은 예수를 국가반역죄로 몰아 총독부로 보냈다. 성경에 따르면, 필라투스는 예수의 여러 차례 무죄를 확인했으나 끝내 대제사장 카야파 파벌들에게 떠밀려 예수의 사형집행을 방관했다.[29]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마태오 복음 21장에서 26장의 판본별 표기]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개역개정판
총독이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놓아달라는 말이냐?" 하고 묻자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소리질렀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예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자 모두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빌라도가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 가며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공동번역
총독이 그들에게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대답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가톨릭 성경
Respondens autem praeses ait illis: "Quem vultis vobis de duobus dimittam?". At illi dixerunt: "Barabbam!".
Dicit illis Pilatus: "Quid igitur faciam de Iesu, qui dicitur Christus?". Dicunt omnes: "Crucifigatur!".
Ait autem: "Quid enim mali fecit?". At illi magis clamabant dicentes: "Crucifigatur!".
Videns autem Pilatus quia nihil proficeret, sed magis tumultus fieret, accepta aqua, lavit manus coram turba dicens: "Innocens ego sum a sanguine hoc; vos videritis!".
Et respondens universus populus dixit: "Sanguis eius super nos et super filios nostros".
Tunc dimisit illis Barabbam; Iesum autem flagellatum tradidit, ut crucifigeretur.
불가타
"Which of the two do you want me to release to you?" asked the governor. "Barabbas," they answered.
"What shall I do, then, with Jesus who is called Christ?" Pilate asked. They all answered, "Crucify him!"
"Why? What crime has he committed?" asked Pilate. But they shouted all the louder, "Crucify him!"
When Pilate saw that he was getting nowhere, but that instead an uproar was starting, he took water and washed his hands in front of the crowd. "I am innocent of this man's blood," he said. "It is your responsibility!"
All the people answered, "Let his blood be on us and on our children!"
Then he released Barabbas to them. But he had Jesus flogged, and handed him over to be crucified.
NIV

신약성경의 마태오의 복음서마르코의 복음서에서 필라투스는 바라빠[30]를 처형하느냐 예수를 처형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예수를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의견에 떠밀려서 대충 예수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하고,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며 손을 씻은 비굴하고 교활한 법조인 정도로 묘사된다. 다만 비굴하다기에도 억울한 면이 있는데 사실상 저기서 "예수 대신에 바라바가 지은 죄가 더 많으니 바라바를 죽여야 맞소" 라고 한마디라도 했었다간 폭동 진압 도중 성난 군중에게 폭행당해 사망하거나, 살아 남더라도 폭동 유발로 인해 자리를 물러나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 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나안 지방의 명절인 유월절에는 광복절 특사 비슷하게 죄수를 1명 풀어주는 전통이 있었다는 배경 설명이 나오는데, 진위 여부를 놓고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 그런 관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오직 신약성경의 4대 복음서에만 등장할 뿐 다른 그리스도교/유대교 관련 전승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선택 자체가 후대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식민 지배로 불만이 누적되어 있을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계 죄수를 명절에 하나 석방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말이 되는 조처이기에 실제로 그런 제도가 있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원래 고대 로마고대 그리스에 존재하던 풍습이라는 이론도 있다. 풍습이란게 수십 수백년을 존속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보다 훨씬 수명이 짧았던 고대인들 입장에서 수년 이상 지속된 행사라면 당연히 의례적인 관습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필라투스는 예수의 처형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임에도 예수가 죽는 것을 방관했다. 속주의 최고 의회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었으므로, 필라투스가 끝까지 거부하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기소되지 않을 수 있었고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편 요한의 복음서 19장에 보면 필라투스가 꽤나 적극적으로 예수를 풀어주려고 힘썼다는 투로 기록되어 있다. 필라투스는 "내가 몇 번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는 죄가 없으니 태형만 하고 풀어줄 것이다"라고 했고, 필라투스의 아내 역시 남편에게 예수의 무고를 증언하며 놓아주기를 권했으나 당시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십자가형을 주청하며 민란이 나려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31] 카야파와 성직자들은 강력하게 필라투스를 압박하여, "만일 그자를 놓아준다면 장관 & 지사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들이 필라투스를 압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의 죄목에 있다. 예수의 죄명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되어있었는데,[32] 이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유대인의 왕을 사칭한 것이 죄라는 이야기이다. 왕을 사칭한 반역자는 사형으로 다스려야 옳다는 것이 유대인의 논지. 그러나 필라투스가 보기에 예수는 신의 아들을 자칭하는 정신질환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33] 필라투스의 관점에서는 죄가 되기 어려웠다.[34]

그러나 성경 텍스트가 필라투스를 억울한 제3자라고 옹호하는 건 결코 아니다.

실제로 복음서 내부의 몇몇 구절을 보더라도 필라투스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반란 등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진압을 잔악하게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복음서에서도 필라투스가 이스라엘인을 학살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루가의 복음서에 필라투스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많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루가 복음서 13장 1절, 공동번역성서
헤로데[35]와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반목하고 지냈지만 바로 그 날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루가의 복음서 23장 12절, 공동번역성서

무엇보다, 복음서에서 필라투스가 예수의 무죄함을 언급한 건 문맥상 말 그대로 "로마법상 국가반역죄가 없다"라는 의미지, "필라투스는 예수를 변호했다"가 아니다. 예수의 무죄가 로마 공권력의 입을 통해 인정되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여기서 '억울한 제3자 필라투스'라고 독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예수가 무죄라는 걸 알고 있는 필라투스가 졸속 재판으로 무책임하게 사형을 방관했다는 점에서,[36] 복음서가 묘사하는 필라투스는 예수의 유다인 적대자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상당히 악질이라 할 수 있다. 필라투스가 회개했다거나 하는 이런저런 전승들은 있지만, 비평적 성서주석학이 탄생하기 훨씬 전에도 필라투스의 재판에서 예수 죽음 책임의 일정 지분을 물어왔으며, 그렇기에 사도신경에서 "passus sub Pontio Pilato(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라 적은 것이다.

5.2. 신경에서의 언급

crucifixus etiam pro nobis sub Pontio Pilato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가톨릭 번역)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개신교 번역)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성공회 번역)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라틴어 원문에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적지 않고 "sub(아래에서)"라 적고 있다. 한국 가톨릭대한성공회[37]에서는 이러한 원문을 살려 번역하였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의역하였다.

이러한 의역 때문에 개신교의 번역이 오역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sub Pontio Pilato라는 말은 단순한 시대 명시라기보다는 '십자가형'을 판결한 공권력의 책임자로서 필라투스를 무시한 것이므로, 무작정 오역이라 하기는 어렵다. 또한 복음서의 내용으로 보자면, 자초지종이 어찌되었던간에 채찍질의 형벌도 필라투스로부터 내려진 것이고 최종적으로 필라투스가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그러한 번역이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 이외의 자료에서 본다면 필라투스는 우유부단하지도 않고 예수의 재판에 사형을 막아보려고 한 사람은 아니다. 가톨릭에서도 필라투스를 무죄하다 여기지도 않으며 "그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자이기도 하다"[38]는 식으로 당연히 책임을 분명히 한다. 아래 교리서 서술에서 보듯, 예수의 수난은 유다인 지도층이 씌운 누명, 필라투스의 졸속 재판, 비정치적 메시아를 거부하는 백성, 도주하는 제자들 등 죄의 다양성이 드러난 사건이기에, 필라투스의 무책임함도 이러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중에 당신 자비로 죄를 이기시는데, 그 수난을 통해서 죄의 폭력성과 다양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불신, 살인적인 증오,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거부와 조소, 빌라도의 비열함, 병사들의 잔인함, 예수님께는 큰 아픔이었던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도망 따위가 그대로 폭로된다. 그러나 바로 어둠의 시간, 이 세상 권력자의(요한 14,30 참조.) 시간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죄에 대한 용서가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 교리서 1851항

6. 매체에서의 등장

7. 기타


[1] 그림은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게(Николай Ге, 1831–1894)의 1890년 유화 작품 〈"진리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빌라도(«Что есть истина?» Христос и Пилат)〉이다.[2] 정교회의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도 이렇게 표기된다.[3] 실존인물이나, 출생 및 사망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에서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것으로 보아 성경에선 기원전 즈음에 출생한 듯.[4] 종파에 따라 본티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 또는 본시오 빌라도 등으로 표기한다.[5] 유대인들도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책임 넘기기에 동의하여 자기들에게 돌린다고 언급 했고.[6] 1961년에 지중해변의 카이사리아에 있는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극장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선 필라투스를 Praefectus라 한다.[7] 3명의 분봉왕(τετρααρχεω)들이 각각 1/4를, 시리아 속주에서 1/4를 상속 받음.[8] 즉 예수가 태어날 당시에는 유다이아 속주가 없었다. 때문에 루카 2장 1-2절에서 당시 통치자로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만 언급할 뿐 유다이아 총독은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 세례자 요한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3장 1절에서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을 때"라고 하여 유다이아 총독을 언급한다.[9] 이후 AD 41~44년에 일시적으로 아그리파스(Ἀγρίππας) 1세가 다스렸다가, AD 44년부터 다시 로마 총독이 다스린다.[10] 시리아 속주는 유다이아 속주보다 규모가 더 컸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중요성 또한 더 높았다. 로마 입장에서는 다마스쿠스에 더 높은 직위의 행정관을 앉히는 것이 현실적인 결정이었다.[11] 헤게모니의 어원이 된 그 단어이며 정확한 뜻은 '이끄는 자'. 군주, 통치자, 총독 등 굉장히 다양하게 해석이 된다.[12] 3C 말 ~ 4C 말로 약 100년, 중간에 콘스탄티누스 왕조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있음.[13] 로마사 연구자나 역덕후가 아니고서야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어차피 피지배민들 입장에서는 Praefectus나 Procurator나 Proconsul이나 모두 로마에서 오신 높으신 분일 뿐이고, 심지어 타키투스 같은 문사(文士)들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다.[14] 시리아 총독이든 유다이아 총독이든 ἡγεμον(헤게몬)이다.[15] 유대 속주의 총독 정도는 오늘날 한국에 비교하면 군수 정도의 위치이다. 현직에 있을 때에야 로마 중앙정계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을 거고 그가 언급된 행정 문서도 제법 있었겠지만, 후대에 전해질 만한 행적이 없다면 당대의 행정용 기록들이 소실되면서 자연히 잊히는 것이다.[16] 예수가 살아있을 때도 젤롯이라 불리는 저항세력이 활동했고, 훗날 예수가 죽은 지 겨우 30년 뒤에 로마와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저항이 심한 지역이었다.[17]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대 고대사》[18]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19] 이 자체는 로마 입장에서 별 문제가 안 된다. 로마 제국에서 지방관은 중앙에 바치도록 지정된 세금 액수를 맞춰 내는 것은 물론 예하 군단이 있을 경우 그 유지비용을 대야 했고 로마 고위층에 뇌물을 바쳐 승진도 하고 자리도 보전하고 일가도 먹여살려야 했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 지방관은 재원 확보를 위해 자체적으로 사업을 하거나 그로도 모자라면 자기 통치지역을 추가로 쥐어짜는 일이 흔했으며, 제국 측에서도 착복이 도를 넘는 수준이거나 반란을 유발해 진압비용이 더 들어가거나 하지 않는 한 굳이 터치하지 않았다.[20]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한 학자가 말하길 그에게 다시 예수에 대해서 물어보면, 오히려 누구냐고 반문했을 것이라 한다. 즉 예수 처형은 그에게 단순 업무 처리에 불과했다는 소리다.[21] 네로 사후 잠시 황제가 되었던 비텔리우스는 이 사람의 아들이다.[22] 티베리우스는 기원후 37년에 죽는다.[23] 발견된 이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24] 이에 대해서 여러 야사가 전해져 오는데, 대체로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뒤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의 주민들에 의해 층계참 중 하나로 대체되어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밟히도록 저주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25] 로마 시대 라틴 문자는 23개로 현대에 쓰는 알파벳 26개보다 적다. U, J, W가 나중에 생긴 글자로 고대 로마 시절에는 U는 V로, J는 I로 표기했고, W도 V에서 파생되었다. 그래서 TIBERIÉUM이 아니라 TIBERIÉVM이고 JUDAEAE가 아니라 IVDAEAE인 것.[26] 건물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단어. "황제 티베리우스께"라는 뜻이 되려면 TIBERIEVM이 아니라 TIBERIVS의 여격인 TIBERIO가 되어야 한다. 다만 건물 이름 자체가 결국은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땄다는 점에서 의미상으로는 티베리우스에게 바친 건물로 보인다.[27] 세미콜론(;)이 아니라 그리스어 물음표(;)이다.[28] 고전 라틴어로 /ˈɛkkɛ ˈhɔmoː/(에케 호모)라 발음되나, 교회 라틴어로는 /ˈettʃe ˈomo/(에체 오모)라고도 한다.[29] 당시 유다이아 속주의 총독은 시리아 총독이 겸직했고, 시리아 총독은 다마스쿠스에 주재하기 때문에 그 대리인으로 총독의 수석부관인 예루살렘 주둔 로마 군단장이 맡았다. 당시 필라투스의 직책은 실질적 정치 권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일종의 임명직 고위공무원이었고,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일부러 사형시키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30] 복음서에 따라 강도살인을 저지른 죄수로 나오기도 하고, 열심당원으로 히브리인 민족주의 혁명가로 나오기도 한다. 어느 쪽이 맞건 간에 공통점은 로마 제국에게 바라빠는 악질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설마 죄인이라는 증거 자료가 아무것도 없는 예수를 죽게 하려고 이런 대흉악범을 석방시키겠냐?'라는 생각으로 바라빠를 들이민 것이라 할 수 있다.[31] 필라투스 입장에서 보면 민란은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속주에서 민란이 일어날 정도의 사태는 황제에게 보고가 올라가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승진은커녕 직장에서 잘리고 본국으로 소환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서에서도 수 차례 언급되지만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이미 충분히 반감을 산 상황이었다.[32] 팻말을 두고 제사장들이 쓸 거면 자칭 왕으로 하라고 하자 필라투스가 한번 썼으면 된 거라고 했다는 부분도 요한복음에만 나온다.[33] 필라투스가 정말로 예수를 정신질환자로 보았다면 그의 행동이 말이 되는데, 역사적으로 적어도 사회적 약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은 어지간하면 피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행이었다.[34] 성경 만화 파워 바이블에서도 필라투스의 독백으로 이 자는 반역할 위인이 되지 못해. 그저 몽상가에 지나지 않아. 이런 자를 죽여봐야 내 손만 더러워지지.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묘사가 실제 역사와 같고 다르고를 떠나서, 필라투스 입장에서 예수는 그냥 헛소리나 늘어놓은 정신병자 내지 사기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35] 이때의 헤로데는 헤로데 안티파스이다.[36] 심지어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고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루가 23장 22절. 공동번역)이라 한 사람이 필라투스이다. 즉, 필라투스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선 무죄한 사람을 매질할 각오가 있었고, 예수가 무죄라는 발언은 필라투스 개인을 억울하다고 옹호하는 구절이 아니라 '로마 공권력을 통한 예수 무죄 인정'이 초점이다. 물론 이는 위에서 빌라도가 말했다시피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라고 말했음에도 군중들이 유죄라고 억지를 부리니까 '아무튼 처벌을 하면 만족하겠느냐' 라는 식으로 성난 군중을 적당히 달래주려고 했던 측면이 있기는 하다.[37] 공동번역성서를 쓰는 대한성공회의 기도서에서는 본티오 빌라도라고 한다. 기도서 개정 이전에는 가톨릭과 동일하게 '본시오 빌라도'라고 썼었다.[38] 《천주교 용어 사전》(최형략. 도서출판 작은예수) '본시오 빌라도' 항목[39] 아리우스는 유다가 귀향을 간절히 원함을 알아 곧 유대로 파견갈 필라투스의 측근 중 한 자리로 넣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애타는 유다는 더 기다릴 수 없다며 개인 자격으로 먼저 떠난다.[40] 흥미롭게도 1961년 영화 왕중왕에서는 다름아닌 헤로데 안티파스로 등장한다. 루카복음 23장 12절(평소 사이가 나쁘던 빌라도, 헤롯이 예수에 대한 처리를 놓고 한편이 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읽으면 꽤나 재미있는 부분.[41] 실제로 있는 '엘머 퍼드 증후군'이란 언어장애다. 시트콤 빅뱅 이론의 등장인물 배리 크립키 역시 이 증후군 증세가 있으며, 폴아웃 3에 나오는 무기인 웨이저 와이플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42] 촬영 당시 병사 역을 맡은 엑스트라들이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실제 연기지만, 널리 알려진 설과 달리 대본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43] 포르노 영화 제목 덕에 대중들에게는 통칭인 칼리굴라로 유명한 황제다. 과거에는 세네카수에토니우스의 조작된 기록으로 인해 막장 폭군이자 암군으로 유명했으나, 현재는 권력 강화 중 암살된 황제 내지 원로원과 공화주의자들의 반격으로 암살된 황제 등으로 재평가 중이다. 이런 흐름처럼 21세기 이후 발간된 논문들에서도 고대 로마인들의 기록, 당대 로마 원로원과 황제 본인 및 서민들의 황제 표기 등을 존중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고고학 기본서 등에 의거해 가이우스로 표기하면서, 칼리굴라라는 비공식 통칭을 각주에 집어 넣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이 황제와 동시대 사람인 유대인 필로, 요세푸스를 비롯하여 100년 뒤의 타키투스, 200년 뒤의 디오조차 이 황제를 가이우스로 기록하고 있다.)[44] 칼리굴라의 4년 치세 동안 로마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갈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유대인 필로는 알렉산드리아 사태 당시, 가이우스와 직접 대면했다.[45] 마태오 복음서 27장 19절: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습니다."하고 당부하였다.[46] 다만 개신교 계열 라디오 방송인 극동방송의 방송인 주일 드라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뤘을 때 필라투스의 아내의 이름을 클로디아로 설정했다.[47] 원래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연기자였으나, 후에 신앙심이 깊어 목사가 되었다. 애마부인에 출연한 흑역사가 있다.[48] 저 말만으로 본다면 필라투스는 아르케실라오스와 카르네아데스로 대표되는 회의주의 전통의 가르침을 연상케 한다. 당시 로마 장교들은 저마다 다른 학파의 철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곤 했다. 필라투스 역시 장교로 양성되는 과정에서 철학 교육을 받았을 개연성이 있지만, 회의주의 철학자의 밑에서 배웠는지 여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49] 다만 니체는 반 기독교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저 문구 때문만이 아니라 신을 죽였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