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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몬 왕조 2대 군주 יהודה המכבי | 유다 마카베오 | ||
제호 | 한국어 | 유다 마카베오 |
히브리어 | יהודה המכבין | |
라틴어 | Judas Maccabeus | |
존호 | 코헨(כֹּהֵן , 제사장)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160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66/165년 ~ 기원전 1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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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카베오라고 불리는 그의 아들 유다가 그 뒤를 이었다. 유다의 모든 형제와 아버지에게 합세하였던 이들이 모두 그를 도와 기쁘게 이스라엘을 위하여 전쟁을 하였다. 그는 자기 백성의 영광을 널리 떨쳤다. 거인처럼 가슴받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허리에 차고 전투할 때마다 칼을 휘두르며 진영을 보호하였다. 그는 사자처럼 활약하였으니 먹이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힘센 사자 같았다. 그는 무도한 자들을 찾아 내쫓고 자기 백성을 괴롭힌 자들을 불살라 버렸다. 무도한 자들은 그가 두려워 움츠러들고 무법을 일삼던 자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그의 손으로 구원이 순조로이 이루어졌다. 그는 많은 임금에게 쓴맛을 보게 하였지만 그 위업은 야곱을 기쁘게 하였다. 사람들은 영원토록 그를 기억하며 기릴 것이다. 그는 유다의 성읍들을 두루 다니며 그곳에서 사악한 자들을 몰살시켜 이스라엘에서 진노를 돌려놓았다. 그는 땅끝까지 이름을 떨치고 멸망해 가는 이들을 한데 모았다.
마카베오기 상권 3장 1~9절
마카베오기 상권 3장 1~9절
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의 헬레니즘 제국에 맞서 마카베오 전쟁을 이끈 유대 민족의 독립 영웅으로, 하스몬 왕조의 제2대 왕으로 일컬어진다.[1] 구약성경 최후의 역사서인 마카베오기[2]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행적
'마카베오'는 별명으로, 망치를 의미한다. 제사장을 자처하며 제우스를 섬기라고 강요하는 셀레우코스 제국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마타디아의 아들이다. 형제로 엘레아자르 아바란, 시몬 타시, 요한 가디, 그리고 요나단 압푸스가 있었다. 기원전 166/16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유대 반란군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마카베오기 1서는 그의 용기와 군사적 재능에 찬사를 보내며, 이러한 자질로 인해 새로운 사령관으로 자연스럽게 선택되었음을 암시한다.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아폴로니오스에게 병력을 맡겨 이들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아폴로니오스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수많은 유대인을 살육하고 모세의 율법이 포함된 여러 고문서를 파괴했으며, 할례를 받은 갓난아기를 성벽에서 내던지고,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제우스의 신전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에 분노했고, 수많은 이가 마카베오에게 합세했다. 그중에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에 복무했던 유대인 병사들도 있었다. 마카베오는 이들로부터 적의 작전 계획과 전술을 전수받았다. 또한 효율적인 정보 수집 체계를 조직하고 반란 소식을 유대 전역에 퍼트렸으며, 무기를 최대한 수집하고자 요원들을 파견했다.
마카베오는 아군의 무장 수준은 셀레우코스 제국군에 비해 형편없으니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 대신 적 순찰대를 유인하여 섬멸하고 그들의 무기를 탈취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반란을 쉽사리 진압할 수 있다며 방심했던 셀레우코스군은 여러 소규모 전투에서 참패했고, 예루살렘 주변의 마을들이 마카베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에 주둔한 수비대는 고립되어 장차 굶어 죽을 위기에 몰렸다. 당시 사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아폴로니오스는 이 상황을 보고받고 즉시 본군을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기로 했다.
기원전 166년, 아폴로니오스의 2,000 원정대는 사마리아에서 산악 지대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고프나 요새를 우회하여 협곡으로 진입했으나, 그곳에 적이 매복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마카베오는 600명의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눈 뒤 나할 엘-하라미야 협곡에 숨었다. 원정대가 협곡의 좁은 통로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있을 때, 마카베오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부대는 적의 정면을 차단했고 두 번째 부대는 후방을 차단했으며, 세 번째와 네 번째 부대는 북쪽과 동쪽에서 적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또한 궁수들은 협곡 위에서 좁은 통로에 갇힌 적을 향해 화살 비를 퍼부었다. 아폴로니오스는 병사들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애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지휘관이 죽자, 셀레우코스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대다수가 섬멸되었다. 유대 반란군은 이들의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했다.
이후 세론이 토벌군의 새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산악 지대로 진군했다간 아폴로니오스와 같은 꼴이 될 거라 보고, 지중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야파 근처에서 내륙으로 이동하여 로덴을 지나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유대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및 파괴 작전을 위해 병력을 시골로 분산시켰다. 세론 본인은 벳 호론의 고갯길을 통해 한 마을로 이동했다. 그러나 마카베오가 사전에 파견한 척후병들이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보고했다. 마카베오는 1,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갯길에 매복했다. 그는 적장 세론이 선봉대를 친히 이끌고 이동하는 걸 확인하고, 선봉대를 집중 공격해 섬멸하고 세론을 신속하게 처단하기로 했다.
이윽고 공격 명령이 내려지자 화살과 돌멩이가 쏟아졌고, 세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원거리 무기를 맞고 전사했다. 선봉대가 지휘관의 전사에 겁에 질려 달아났지만, 후속 부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진군했다. 이로 인해 셀레우코스군 전체가 좁은 길에서 뒤엉키는 상황이 벌어졌다. 유대 반란군은 이들을 집중 공격했고, 셀레우코스군은 800명의 전사자와 장비 대부분을 남기고 서둘러 후퇴했다. 유대 반란군은 추격에 나서 해안 평야로 이동해 더 많은 적군을 살해했다. 승리 소식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마카베오의 병력은 6,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유대 반란이 진압되기는커녕 오히려 강성해지자, 안티오코스 4세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국내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수도 안티오키아를 떠날 수는 없었기에, 친척 리시아스에게 토벌을 맡겼다. 리시아스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인 프톨레마이오스, 니카노르, 고르기아스에게 실권을 맡겼다. 기원전 165년 봄에 출발한 원정군의 규모는 20,000명에 달했다. 세 장군은 아잘론 계곡 바로 위의 구릉 지대에 있는 엠마에우스에 숙영지를 세웠다. 한편, 마카베오는 6,000 병력을 1,500명씩 4개 부대로 나눠서 자신과 형제 시몬, 요하난, 그리고 요나단이 맡았다. 그들은 미스바로 이동한 뒤 적의 위치를 확인한 후 사령부를 라트룬 근처의 구릉 지대로 옮겼다. 양군은 서로 대치하며 적절한 전투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고르기아스는 밤에 적진을 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힐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적의 순찰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진영이 소란스러운 걸 보고, 적군이 먼저 공격하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다수의 모닥불을 피우게 한 뒤,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일부 병사들만 진영에 남아 불이 계속 피워지도록 돌보게 했다. 이윽고 고르기아스의 6,000 병력이 적진에 돌입했을 때, 진영에 남아 있던 소수의 유대인들이 샤르 하가이 계곡으로 도주했다. 고르기아스는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적이 적 본대라고 착각하고 추격했다. 그들이 샤르 하가이 계곡에 들어서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1,500명의 병사들이 막아섰다.
마카베오는 다른 2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이동하고, 또다른 1,500명의 부대를 적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고르기아스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계곡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평야 지대에 팔랑크스 대형을 세웠다. 적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계를 철저히 하는 모습을 본 마카베오는 3,000 병력을 1,000명의 3개 대대로 나눠서 적의 취약한 서쪽 측면에서 공격했다. 대대 하나가 적 기병과 교전하는 사이, 다른 2개 대대가 측면에서 팔랑크스를 덮쳤다. 당시 셀레우코스군은 남쪽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고, 서쪽에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적을 상대로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장군이었던 고르기아스는 피해가 누적되는 와중에도 병사들을 독려하며 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적진 후방으로 극비리에 이동한 1,500명의 유대 병사들은 전투 소리가 북쪽에서 들려오자 즉시 적진을 기습했다. 당시 셀레우코스군 진영에는 수많은 노예 무역상들이 마음대로 활보하고 있어서 시장판이나 다름없었고, 고르기아스가 출진했으니 유대인들이 쉽게 무너질 거라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노예 무역상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고 그들이 데려온 코끼리들이 날뛰면서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니카노르의 병사 3,000명을 살해했고, 나머지는 해안가로 도망쳤다. 그들이 불을 지르자, 고르기아스와 부하들은 아군의 진영마저 무너졌다는 걸 깨닫고 해안으로 도주했다. 마카베오는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히고, 적진의 무기와 장비, 보물 등 무수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엠마에우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리시아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안티오키아로 이동했다. 이후 2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우방의 영토를 통과하고 유대 지방의 최남단에 있는 벳주르에 진을 쳤다. 이후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 적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부대를 사방으로 보내 마을들을 파괴하게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면 필수적으로 지나가야 하는 히르베트 벳헤란 협곡에는 마카베오가 이끄는 반란군이 진영을 갖추고 있었다.
마카베오는 부대를 4개 부대로 나누고, 5,000명의 병력을 예비대로 두었다. 셀레우코스군은 고지 경계에 숙영지를 세우고, 일부 부대를 협곡으로 보냈다. 셀레우코스군이 무거운 갑옷과 무기에 짓눌린 채 오르막길을 걸어가던 그때, 3,000명의 유대인들이 협곡에서 튀어나와 돌격했다. 뒤따라 오던 셀레우코스군도 혼란에 빠져 몸을 돌려 달아났다. 당시 셀레우코스 진영에는 8.000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마카베오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5,000명의 예비군을 남겨뒀다. 하지만 진영에 남아있던 시리아인들은 아군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자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적병 5,000명을 주살한 마카베오는 적을 추격하는 대신 예루살렘을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예루살렘에 주둔한 셀레우코스 수비대는 지난 몇 달 동안 예루살렘 인근의 아크라 요새의 방어를 강화하고 식량, 물, 무기를 비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리시아스가 참패하고 반란군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아크라 요새에 숨었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신전을 복원하고 제우스 동상 등 그리스인들의 우상을 파괴했다. 탈무드에 따르면, 기원전 164년 12월 14일 사제들이 성소를 축성하고 봉헌한 후, 하루 분량의 석유가 8일 동안 연소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기적을 기념하여 매년 하누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아크라 요새의 방비가 워낙 강건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셀레우코스 별동대가 요르단 강 동쪽의 갈릴리와 길앗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카베오는 형제 시몬에게 3,000명의 병력을 맡겨 갈릴리로 파견하고, 자신은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길르앗으로 향했다. 시몬은 소규모 적군을 격파하고 포로들을 구출한 뒤 유대로 돌아왔다. 한편, 마카베오는 골란 고원 동쪽으로 이동하여 다테마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셀레우코스군을 후방에서 덮쳐 큰 타격을 입히고 멀리 도망가게 했다. 그 후 북서쪽으로 이동한 그는 새 셀레우코스 사령관 티모테우스를 라폰에서 격파하고, 라폰 시를 점령하고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후 길르앗의 유대인들을 구조하고 적대적인 영토를 통과하며 약탈을 자행한 뒤 유대로 귀환했다.
이 무렵,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하고 새 왕 안티오코스 5세가 등극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리시아스가 섭정을 맡았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새 왕 즉위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당분간 자신들을 공격할 여력이 없을 거라 판단하고, 노획한 공성 장비를 활용하여 아크라 요새에 전력을 쏟아붓기로 했다. 기원전 162년 초, 모든 준비가 완료된 유대 반란군은 아크라 요새에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요새 안에 있던 상당한 규모의 친 헬레니즘 성향의 유대인들은 요새가 함락되면 자신들이 반역죄로 처형될 것을 두려워해 수비대를 열심히 도왔고, 이로 인해 아크라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마카베오는 작전을 바꾸어 가만히 포위해둬서 적군을 굶겨죽이기로 했다. 이에 수비대는 전령을 안티오키아로 급파해 리시아스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마카베오는 리시아스가 쉽사리 움직이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리시아스는 아군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30,000명의 중무장 병력과 3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이들이 벳주르를 포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마카베오는 급히 아크라 포위를 중단하고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2마일 떨어진 벳제카리아에 진영을 세웠다. 벳 주르를 공략한 뒤, 리시아스는 벳제카리아로 진군했다. 마카베오는 이번에도 산지에 매복했다가 적의 측면을 급습하는 방식으로 대항했지만, 일전의 패배로 교훈을 얻은 리시아스는 측면에 창병 별동대를 따로 배치해뒀다가 적이 출현하는 즉시 막아서게 했다. 여기에 전투 코끼리들이 적을 향해 달려들자, 유대인들은 공포에 질려 전열을 하나둘씩 이탈했다.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마카베오의 남동생 엘르아살은 한 코끼리의 밑으로 기어간 뒤 검으로 그 코끼리의 배를 찔러 죽였지만 코끼리가 쓰러지면서 깔려 죽었다고 한다.
리시아스와 셀레우코스군이 이전과는 달리 침착하게 움직이며 반란군을 몰아붙이자, 마카베오는 패전을 모면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예루살렘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프나로 철수했다. 다만 예루살렘 성전에 수비대를 배치해서 적이 성전을 모욕하는 걸 미연에 방지했다. 셀레우코스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뒤 성전을 공격했지만 격파당했다. 그러던 중 안티오코스 4세의 친구이자 메소포타미아로 원정을 떠났던 필리포스가 안티오코스 4세의 붕어 소식을 듣고 귀국 중이라는 소식이 리시아스에게 전해졌다. 리시아스는 이러다가는 권력 기반을 잃을까 두려워서 마카베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용할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마카베오가 동의하자, 리시아스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필리포스를 물리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 지위를 단기간에 공고히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로마 원로원이 셀레우코스 제국이 기원전 188년에 체결한 아파메아 조약에서 규정된 것보다 많은 군함과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절을 보내 항의했다. 리시아스는 감히 로마 공화국에 대적하지 못하여 군함을 침몰시키고 코끼리를 죽이는 걸 허용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러한 굴욕에 분노했고, 기원전 162년 사절 중 한 사람이었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라오디케아에서 피살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의 조카로 로마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는 이 틈을 타 원로원에 접근해 자신을 왕으로 밀어주면 로마에 철저히 복종하겠다고 약속했다. 원로원이 이번에도 거절하자, 친구 폴리비오스의 조언에 따라 극비리에 로마를 탈출해 안티오키아로 잠입한 뒤, 귀족들을 포섭하여 기원전 161년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고, 리시아스와 사촌인 안티오코스 5세를 처형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왕위에 오른 뒤 마카베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기원전 161년 봄 니카노르가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 북쪽으로 진군했으나, 마카베오는 이들을 매복 공격해 패주시키고 니카노르를 붙잡아 처형한 뒤 머리와 손을 성전 문에 매달았다. 하지만 단독으로는 제국을 상대로 오래 버티기 어렵다고 여긴 그는 로마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독립국으로 인정해주고 동맹을 맺자고 권유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로마가 저들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하기 전에 신속히 토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마카베오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병사들의 요구에 못 이겨 병력을 대거 해산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그는 이때를 틈타 원정군을 조직했다.
기원전 160년 봄, 셀레우코스군 24,000명이 유대로 진군했다. 당시 마카베오는 3,000명 가량의 병력만 남아 있었다. 조언자들이 일단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자고 충고했지만, 그는 끝까지 싸우기로 작정하고 베트 호론에서 동쪽으로 6마일 떨어진 엘라사에서 적과 맞붙었다. 그는 적 우익 부대에 적장 바키데스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그를 죽이면 적군이 와해될 거라 판단해 적 우익을 향해 맹공을 가했다. 그러나 바키데스 처단은 결국 실패했고, 그와 끝까지 충성을 다하던 3천 전사들은 전멸했다. 그의 유해는 전투가 끝난 뒤 형제들에게 거둬져 모딘에 있는 가족 무덤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반란은 일시적으로 진압되었지만, 마카베오의 동생 요나단 압푸스가 세력을 재건한 뒤 반란을 재차 일으켰다.
3. 후대의 평가
마카베오 전쟁 중 유다 마카베오 치하 유대 지역 |
두 권의 마카베오기의 서술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큰 덩치와 완력을 바탕으로 한 맹장 타입이며, 전투 전에 신앙 등을 통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능하였다. 또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팔랑크스에 맞서기 위할 때 평지에서의 정면 대결은 가급적 피하는 등 지장의 자질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면모들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알렉산드로스 3세,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윗, 여호수아, 헥토르, 아서 왕, 카롤루스 대제,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함께 아홉 위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마카베오기 상권의 경우, 사실 유다 마카베오 말고도 하스몬 왕조 창립 멤버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분량상 딱히 마카베오가 이 멤버 중 두드러지게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마카베오기'로 통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마카베오가 하스몬 왕조 창립자로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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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마카베오 자신은 저항군을 이끌었지만 왕을 칭하지는 않았다. 훗날 시몬이 왕이 되면서, 마카베오까지 왕으로 대접받은 것.[2]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되,가끔 수전절을 설교할 때 마카베오(마카비)를 필두로 언급한다.특히,메시아닉 기독교가 더더욱 많이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