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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쇠락한 명가의 소년가장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 공화국이 혼란하던 시절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렐리아 코타의 아들로 태어났다.[1]카이사르가 10대일 때의 로마는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점이었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는 웅변가이자 문법학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그니포는 갈리아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로마 귀족들이 고용하는 가정교사는 모두 그리스인인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카이사르 가문의 입지를 짐작할 수있다.
이 외에도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기록은 생각보다 적은데 이는 당대 쓰여진 카이사르 관련 역사책 중 어린 시절 부분이 죄다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고(기원전 85년) 16세에 유피테르(제우스)의 고위 사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선출되었다(기원전 85년).[2] 그리고 원래 기사계급의 코수티아라는 여성과 약혼을 깨고 당시 반 술라파의 수장이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 킨나와 결혼한다. 이때까지는 가문 좋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평범한 로마 청소년의 일대기인데, 문제는 장인인 루키우스 킨나가 기원전 84년에 죽고 2년 뒤에 고모부와 장인과 대립하던 술라가 로마로 군대를 끌고 돌아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2. 독재관에게 찍힌 새신랑
술라는 돌아오자마자 살생부로 대표되는 마리우스 일파의 대 숙청을 시작한다. 카이사르의 입지는 당시 미묘했는데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마리우스고 장인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인지라 민중파에 가깝다고 여겨졌지만, 근본 원조 귀족인데다 문중의 7촌 당숙 아저씨가 원로원파라는 이유로 마리우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처우에 대해 동정여론이 컸다. 술라는 여러 사람의 만류에 아직 10대(19세)였던 카이사르를 처음부터 숙청 대상으로 지목하지는 않고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민중파와의 인연을 끊지 않으면 다른 민중파 인사 9천명처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었지만 놀랍게도 카이사르는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철부지 시절의 카이사르가 내전의 승리자이자 사실상 로마의 지배자였던 술라를 상대로 배짱을 부린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3] 뜬금 아무 잘못도 없는 마누라를 쫓아내 죽게 버려두라는 꼬장에는 거부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대노한 술라의 척살령을 피해 달아난 카이사르는 우선 모든 가산과 아내의 지참금이 몰수당하고 플라멘 디알레스 직위도 박탈당한다. 그렇게 숨어지내던 와중에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와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탄원, 그리고 로마에서 존경의 대상이던 베스타 신전의 여성 신관들이 율리우스 가문의 대를 끊을 셈이냐고 항의하는 통에 결국 술라도 카이사르를 사면해준다.[4] 특히 원로원의 유력 가문이었던 외가의 강력한 영향력이 카이사르의 목숨을 살려주는 데 큰 몫을 했다. 당장 카이사르의 외할아버지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만 하더라도 집정관 출신이며 명망높은 법률가이자 온건파의 거두로서 처갓집 사람(카이사르의 7촌 당숙)도 죽일만큼 폭주한 마리우스에게도 대놓고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인망과 입지가 큰 인물로, 당시 옵티마테스에 대한 지지율을 담당하는 핵심인사였다.
이때 술라의 숙청이 얼마나 지독했냐면, 위에서 언급한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손들이 다시는 공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되는 정도가 가장 가벼운 벌이고 십중팔구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물론 이때도 재산 몰수는 덤. 게다가 술라는 단순히 자신의 부하들을 동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피살자의 재산을 현상금으로 수여하는 제도를 도입해서 살생부에 오른 자가 도망간다고 해도 현상금을 노린 사람들이 피살자를 추적, 살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아예 로마에서는 훗날 대규모 살생부로 숙청이 일어나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인했는지 비교되는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카이사르는 이 도피 생활 때 추적을 피하느라 큰 고생을 한다.
수에토니우스와 플루타르코스가 쓴 기록에 따르면 술라는 카이사르를 살려달라는 탄원을 마지못해 수락하면서 "그 젊은이의 머리엔 백 명의 마리우스가 들어 있건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5]
3. 도피성 군입대와 해외유학
카이사르는 비록 술라가 사면해주었지만 안전을 확신하지 못해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때 사제직 박탈이 전화위복이 된다. 로마의 플라멘 디알레스는 살생과 로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쿠르수스 호노룸에 필수적인 군복무를 할 수 없었는데[6] 플라멘 직위가 박탈된 카이사르는 해외에서 잠수도 탈 겸 해서 군단에 장교로 입대한다. 기원전 81년부터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총독이던 마르쿠스 테르무스의 부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평생을 따라다닌 비티니아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동성애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소문의 배경은 카이사르가 함대 차출을 요청하러 동맹국 비티니아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니코메데스의 궁전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한 뒤 또 비티니아를 찾아갔다. 일단 수에토니우스가 (앞의 루머들도 같이 쓴 뒤) 기록한 카이사르가 비티니아에서 머문 공식적인 이유는 채무 관계 청산.당시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굉장히 존중했고 상류층의 경우 그리스에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당연한 관례일 정도였지만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로마인들은 동성애를 죽을 죄로 여긴 것은 아니어도 '남자답지 못한'[7] 행동으로 여겼으며 특히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런 역할은 보통 어린 노예들이 담당했으나 하필이면 꽃다운 미청년 시절의 카이사르는 수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문이 났다.
훗날 니코메데스 4세는 죽을 때 비티니아 국토 전체를 유증의 형태로 공화국 로마 정부에 넘겨주었는데[8] 당시 로마인들은 카이사르가 남색으로 늙은 니코메데스 4세를 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진실이야 어쨌든 몇몇 사람들만 빼고 다 그 루머를 믿었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병사들조차 그랬다.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던 카이사르도 M자 탈모와 동성애 루머로 놀리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그와 친했던 병사들은 개선식[9] 등에서 구호로 써먹어가며 잘도 놀려먹었다.
"갈리아는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했고,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왕에게 정복당했다네. 갈리아를 무찌르고 개선하신 카이사르가 납신다!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데도 니코메데스 왕은 월계관을 쓰지 못했다네. 대머리 난봉꾼[10] 카이사르가 납시니, 로마인들이여, 어서 마누라를 숨겨라! 그는 금덩어리를 빌려 쓰고는, 고작 갈리아 창녀로 갚는다네."[11]
<카이사르의 생애> 中 "로마 군단의 개선행진가" 필립 마타작 저 "로마 공화정"에서
<카이사르의 생애> 中 "로마 군단의 개선행진가" 필립 마타작 저 "로마 공화정"에서
그렇게 군인 시절 동성애 루머에 시달리던 카이사르는 미틸레네(아나톨리아 반도 동쪽에 인접한 섬) 전투에서 동료의 목숨을 구해서 오크나무 시민관[12]을 받은 일로 이미지가 회복되었으며 킬리키아 전투 등 아시아 인근에서 활동하다가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자 안전을 확신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이후 로마에서 현직 집정관인 마르쿠스 레피두스[13]가 반란을 벌일 때 참여를 요청받았지만 참여하지 않았다.
귀국한 카이사르는 민중파를 내부적으로 결집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등 술라파 원로들을 부정부패 비리 혐의로 고발했다. 비록 두뇌가 비상한 카이사르의 고발문은 원로원 최종권고의 위헌성과 술라가 저지른 악행의 불법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키케로도 립서비스를 해줄 정도였지만 의외로 다 늙어버려 어찌되도 좋을 원로들에 대한 동정여론 때문에 그 키케로가 피고발인측 변호인으로 가세하자 깨끗하게 포기하고 술라파로부터 끌린 어그로를 풀기 위해 유학 명목으로 출국한다.
카이사르는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 몰론[14]의 수사학 강의를 듣기 위해 에게 해를 건너다[15]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는데, 두목이 카이사르에게 "몸값으로 은 20탈렌트[16]를 받겠다"라고 하자 카이사르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대뜸 화를 내며 "이 고귀한 나의 몸값이 고작 은 20탈렌트라니 납득할 수 없다!'"라고 항의하며 스스로 몸값을 50탈렌트로 올렸다. 물론 은 50탈렌트는커녕 20탈렌트조차 당장 가지고 있지는 않던 카이사르는 하인을 시켜 돈을 꿔오라고 한다. 해적 두목은 이 거물을 후대했고, 본인도 귀빈이라도 된 듯이 해적들에게 주눅들지 않는 모습으로 다녔다. 혹여나 자는데 해적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조용히 하라며 호통을 쳤고, 심기가 상한 해적이 인질 주제에 어디서 반항하느냐고 화내면 "꼬우면 죽여보든가"라며 오히려 자신의 몸값을 인질삼아 역으로 해적을 협박했다고 하며, 또한 자신의 자작시를 낭송하는데 그걸 듣다가 잠들어버린 해적들을 야만인이라고 욕하는 패기를 내뿜는가 하면, 나중에 해적들을 싹 잡아들여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했다. 나포된지 38일 만에 하인이 돈을 가지고 돌아와 카이사르는 석방되었는데, 카이사르는 로도스가 아니라 가까운 아시아 속주의 항구로 가서 무장선과 사람을 모집한 뒤 해적들을 싹 쓸어버렸다. 자신이 내준 은 50탈렌트를 남김없이 되찾아온 건 덤. 카이사르는 해적들을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에게 인계했는데,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는 대신 노예로 팔고 싶어했지만, 카이사르는 기어이 그들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17][18] 이 당시 활개치던 킬리키아 해적들은 에게 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까지 기어들어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기원전 67년에 돼서야 폼페이우스에 의해 소탕된다.
그러나 BC 74년 카이사르가 로도스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폰투스 왕국이 소아시아를 다시 침략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비를 들여 군대를 모아 소아시아 도시들을 도왔고, 그동안 로마에서 루쿨루스가 파견되어 폰투스 왕국을 물리친다.[19]
4. 희대의 날먹 및 배째라 행각과 출세[20]
BC 73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왔고, BC 72년에는 선거를 통해서 트리부누스 밀리툼(대대장; Military Tribune)으로 선출된다. '명예로운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의 빌라에서 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BC68년~BC69년 카이사르는 안찰관(Aedilis)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원로원의 한 자리를 얻게 된다. 이 시절에 아내인 코르넬리아와,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민중파의 우두머리였던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가 죽는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BC 69년에 아내와 고모인 율리아의 장례식을 주관한다. 그리고 로스트라(공공연단)에서 추모연설을 하는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본인이 마리우스파임을 천명하며, 자신은 베누스 여신과 고대 로마 왕가의 후손이지만 마리우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21] 이쯤에서 그는 술라파 인물들에게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술라파 의원이자 현직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신의 반란에 참여하라고 카이사르에게 권유했지만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불안해하는 술라파 정치인들을 안심시키 위해서 카이사르는 술라의 외손녀 폼페이아와 결혼한다. 정치적으로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으며[22], 안찰관으로서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해적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서 그를 위해서 법안을 자주 발의하였다.[23] 그 뒤 히스파니아의 속주를 다스리기 위해서 히스파니아로 출발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절 카이사르가 스페인의 도시인 가데스(카디스)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석상을 보고 알렉산더는 나와 같은 33세에 세계를 정벌했지만 나는 아직 역사가 기억할 만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에 돌아온 카이사르는 BC 65년 재무관으로 선출된다. 이때 온갖 축제와 이벤트들로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데, 문제는 이 비용의 일부분을 자신의 돈으로 대버리는 바람에 빚이 엄청나게 많아졌고 그 빚의 대부분은 크라수스에게 빌린 돈이었다. 이때 폼페이우스의 부인 및 여러 정치인들의 부인들과 온갖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기이한 점은 로마의 귀족 부인들을 몽땅 섭렵해나가면서도 누구와도 결정적으로 관계를 끊지 않았고, 그럼에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로부터도 원한을 사지 않았다는 점이다.
BC 63년 카이사르는 공석이 된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출마한다. 워낙 돈이 많이 들었고, 경쟁자들이 워낙 쟁쟁한 인사들이라서 카이사르 본인도 선거에 이길지 확신을 못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선거 당일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거에서 이겨서 돌아오든지 아니면 아예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카이사르에게는 다행히도 다른 두 후보들이 표를 나눠먹는 통에 카이사르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 로마 종교 최고사제직은 단순히 뽀대나는 근사한 명함으로써 역할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점술 및 종교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로마의 정치문제에 대해서 카이사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서 키케로에 앙심을 품고 호민관이 되기 위해서 일부러 평민의 양자가 된 클로디우스 같은 경우, 스스로 평민으로 강등되기 위해서 종교적 절차가 필요했는데 카이사르가 최고사제로서 이를 승인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24] 이때 카틸리나 음모가 발각됐는데, 카이사르는 이에 연관되었다는 강한 의혹을 받았고,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 인사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카이사르를 실각시키고자 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실패했다.
BC 62년 카이사르는 법무관(Praetor)으로 선출된다. 이미 마리우스 공적비, 마리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장례식 때 한 발언 등으로 이미 술라파 인사들에게 찍힌 카이사르는 법무관으로 선출되면서 더더욱 경계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호민관 퀸투스 메텔루스 네포스가 폭력 시위를 일으키자 이를 지지하는 분별 없는 행동으로 직위를 시작하고 몇 주만에 법무관에서 해임당했다가 반성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 며칠만에 복직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한편 여신에게 바치는 여자들로만 이뤄진 종교행사가 최고사제였던 카이사르의 집에서 이뤄지는데, 클로디우스가 카이사르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서 여장을 하고 숨어들어갔다가 걸려서 망신을 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키케로는 본인 특유의 말빨을 사용하여 클로디우스를 조롱하고 맹비판했고, 장래가 유망했던 귀족 클로디우스는 젊은 나이에 정치 커리어가 완전히 개박살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클로디우스는 민중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보다 젊은 평민의 양자로 들어갔고. 호민관에 당선된다. 그리고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처벌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안을 내놨는데 당연히 이 법안은 키케로를 노린 것이었다.[25] 이 때문에 키케로는 카틸리나 음모 이후 전직 집정관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1년간 로마에서 추방당한다. 법무관 임기를 마친 이후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된 카이사르는 현재 포르투갈 지역에서 지역 부족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 덕택에 소규모 개선식을 열 권리를 얻게 된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명예로운 경력'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고,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를 제외한 젊은 세대에서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26]
그는 법무관이 되어 직무를 수행한 뒤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 서쪽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현재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하는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이로써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27]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5. 집정관 선출 및 삼두정치
기원전 59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41세의 나이에 생애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 재직하면서 그동안 툭하면 견제당했던 설움을 폭발시키듯 단신으로 원로원파 전체를 아주 철저히 농락하여 로마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원로원파는 반체제 인물로 낙인찍힌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출을 방해하기 위하여 그에게 개선식과 집정관 후보 등록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28] 당시 규정대로라면 집정관에 선출되기 위해서는 직접 로마 시내에 들어와 입후보 지원서를 내야 했는데 개선식 이전엔 로마 시내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권리를 포기했고 이것이 못내 아쉬웠던 그는 로마 시내에 들어올 때 백마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집정관이 되기 위해 카이사르는 우선 폼페이우스와 접촉했다. 폼페이우스는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 창궐하던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여 세계 전역으로부터 찬양받고 있었고 폰투스, 유다, 시리아를 정복해 조국의 영토를 넓힌 승전장군이었는데, 전쟁이 끝나서 백수신세가 된 휘하의 부하들 수만 명에게 생계를 위한 농토를 지급해달라는 요청을 원로원이 일방적으로 씹고 있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름 원로원에게 잘 보이고자 소 카토에게 정략 결혼을 청했지만 씹혀 시민들의 가십거리만 돼서 놀림을 받는 바람에 폼페이우스의 자존심은 크게 상했는데 이때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숙원을 풀어주겠다며 접근을 한 것. 이렇게 원로원이 대놓고 폼페이우스에게 엿을 먹인 데에는 자신들의 군사적 무능을 부각시키는 폼페이우스라는 걸출한 군사적 천재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국유지를 반납하기 싫다는 심사도 깔려 있었다.
이러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협력하였고 여기에 당시 로마 최고의 거부였던 크라수스[29]를 끌어들여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이들이 맺은 협정의 내용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수의 충성스런 전직 부하들을 동원해서 카이사르에게 필요한 득표 수와 무력을, 크라수스는 선거 운동과 당선 후 막후 공작에 필요한 거액의 정치 자금[30]을 지원하는 한편 카이사르는 당선된 후 이 두 사람이 현직 집정관 시절에도 통과시키지 못했던 필생의 정책들을 관철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는 첫 삼두정치가 후의 2차 삼두정치와 다르게 비밀리에 결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제시된 조건이다.[31]
카이사르는 이 삼두협정 덕에 집정관에 무난히 당선되었고 여기서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최초로 발휘하여 율리우스 농지법을 성공적으로 민회에서 통과시킨다.
농지법은 원로원 계급의 탈법적 국유지 독점을 금지시키고(기존 국유지 임차법에 1인당 임차면적 제한규정이 있었으나 차명임대라는 꼼수에 유명무실화됨) 과도하게 집중된 국유지 임대권한을 빈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한 것으로써, 당시 정계에선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것으로 이 농지법을 주도한 기원전 140년대의 그라쿠스 형제와, 기원전 100년대의 사투르니누스 같은 호민관들은 원로원파 정치깡패들에게 족족 살해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이것을 무난히 해낸 것이었다. 다만 그라쿠스의 농지법과는 목적과 법안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데 그라쿠스는 원로원에게 국유지 한계치 이상의 양은 소유할 수 없게 못박고 빈민들에게 임대시켜 정착시키게 하는 대놓고 원로원의 어그로를 끄는 내용이라면, 카이사르는 어디까지나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을 정착시키는 땅을 주는 목적만을 제시한 법안이었다.[32]
어쨌든 이로써 국유지 임차권의 매매가 인정되었고(임대 20년 이후), 원로원 귀족들이 장악했던 캄파니아의 옥토는 제외되었으며, 불법적 임차권이 몰수된 자에게는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전리품을 팔아 보상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그런데도 원로원에서는 카토가 필리버스터를 계속해서 시도하다가 카이사르의 명령을 받은 근위병들에게 끌려나가는 등 논의가 파행만을 거듭했고, 카이사르는 결국 농지법을 민회에 상정해버렸다. 민회는 그라쿠스 형제 시절의 평민 집회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서민층의 영향력이 적고 원로원의 귀족과 친귀족 평민들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었지만, 이번에는 폼페이우스의 옛 군인 출신 부하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도끼 눈을 뜨고 난리를 치며 누구 하나 때려 죽일 듯한 험악한 분위기를 형성하였던 중이라 원로원에서처럼 필리버스터를 시도하려던 카토는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연단에서 끌려내려와 맞아 죽기 직전에 겨우 퇴장했으며, 그걸 본 원로원파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에는 그날의 점괘가 흉하다는 핑계를 대고 발언권을 포기해버려 만인의 비웃음을 샀다.[33] 크라수스가 대표하는 부유층 평민들이 찬성해주는 한편 당대 일반인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의 스타 정치인이었던 폼페이우스가 열변을 토하며 법안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자 민회는 가결이 확실시되는 분위기가 되었고, 이때 비불루스가 거부권[34]을 행사하려 하자 '아이고 비불루스 집정관님이 반대하시면 이 법안 무효됩니다~'라고 재빨리 외친 카이사르의 재치가 빛을 발해서 비불루스는 맞아 죽을까 봐 반대 발언 한마디도 못하고 쫄아서 그 길로 집으로 튀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이렇게 민회에서 통과시키는 김에 불법 점유지 몰수 대상에 캄파니아 지방까지 포함시켜 원로원에 엿을 먹이고 원로원 의원에게 민회 결의를 따른다는 맹세를 의무화하는 등 이중 삼중으로 원로원에 직격타를 날려버렸다.
또한 비공개였던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게 하였다.[35] 디우르나(diurna)는 ‘매일’이라는 뜻으로, 후일 언론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인 저널(journal)의 어원이 되었다.
이 외에도 정치적 동지이자 스폰서인 크라수스의 염원이었던 징세청부업자의 속주세 예납제 폐지에 성공하고,[36][37] 갈리아 땅에서 세력을 불리던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동맹을 맺었다.
동료 집정관이자 정치 성향상 정적이었던 비불루스는 정치적, 개인적 이유에서 카이사르를 방해하기 위해서라도 카이사르의 독단적 행보에 저항했으나 민회에서 공개적으로 똥물을 뒤집어쓰고 린치를 당한 이후 종교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태업 상태에 돌입했고,[38] 이 때문에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는 한동안 원로원파에게 극도로 경계를 당했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이 꽉 잡고 있던 민회나 개혁을 원했던 일반 시민들, 그리고 무산자들에게는 매우 환영받았다. 결국 카이사르를 포함한 삼두는 성공적인 집정관 임기를 보내는 데 성공. 덕분에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집정관에 취임했던 기원전 59년은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던 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비불루스는 그대로 공기화. 또한 개혁의 핵심이었던 군대에 참여했던 무산자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법에 대한 지지가 너무 높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찍이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게 양보했는데도 불구하고 법안을 질질 끌면서 폼페이우스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던 원로원에 대한 지지도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일찍이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각각 원로원의 의원들에게 농지법에 법리적 문제가 되는 조항이 있으면 법안 자체를 상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의원도 이치에 맞게 카이사르의 농지법을 반박하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군사적 재능은 둘째 치고 언변이 매우 능한 정치인이었을 뿐 아니라, 명분부터가 압도적으로 카이사르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이 포에니 전쟁 등에서 엄청난 영토를 얻었는데 그걸 원로원 의원들이 죄다 빼돌려서 자기 농장으로 만들어놓는 바람에 정작 고생한 로마의 평민 군인들이 굶어죽게 생겼는데 어떤 명분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특히 소(小) 카토는 농지법을 아예 통과시키지 말자는 태도로 나왔는데, 카이사르는 지지자들을 동원해서 처음에는 카토를 포룸에서 끌어내렸고, 카토가 다시 연설을 하려고 하자 그때는 아무도 카토의 연설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카토는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법안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나중에 카이사르가 민회에서 통과된 법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한 다음에야 투덜거리면서 인정한다.
카이사르의 임기가 점점 만료되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임기 후 임지로 중요하긴 하지만 전쟁 같은 화려한 업적은 없는 "산림과 도로"로 배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삼두정의 배경을 활용하여 자신의 임지를 갈리아[39]로 바꾼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임지를 바꾼 이유는 아마도 헬베티 족(지금의 스위스 안팎에 거주)이 민족 이동을 하려고 준비 중인 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40] 헬베티 족은 민족 이동을 위해 3년간의 준비를 하였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을 때는 이들이 준비를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헬베티 족이 갈리아 내부로 침입한다면 갈리아 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기회를 노렸던 카이사르가 원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지를 '산림과 도로'에서 갈리아로 바꾼 것이다. 카이사르가 헬베티 족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갈리아 전기에서 단 보름 만에 헬베티 족에 맞서기 위한 5개 군단을 소집했고 이 중 3개 군단을 새로 뽑았다고 서술된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갈리아 전쟁이 시작된 것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한 것처럼 카이사르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가 아닌 카이사르가 의도적으로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음을 보고 그 자리를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6. 갈리아를 정복하다
이후 집정관 임기를 마친 그는 일리리아,[41] 갈리아 키살피나[42] 두 속주의 총독으로 내정받았고, 여기에 더해 갈리아 트란살피나[43]의 총독권 또한 추후에 원로원 의결을 통해 부여받았으며 이에 따라 4개 군단의 명령권(임페리움)을 수여받았다. 복수의 속주 총독을 겸임하는 것 역시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고, 이 세 속주의 위치상 누가 봐도 카이사르는 야만족의 땅 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갈리아 제패라는 업적을 남긴다.[44]카이사르가 부임하던 해에 헬베티 족[45]이 고향 땅을 떠나 갈리아 내부로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헬베티 족은 전 갈리아의 풍요로운 영토를 힘으로 빼앗은 뒤 전 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이 원정을 위해 이들은 3년의 준비를 해왔다.
3년간의 준비가 끝나자 헬베티 족은 마을을 전부 불사르고 자신의 영토를 지나 갈리아로 침입한다. 우선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신을 보내 이들이 로마 속주 통과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하고 만일 이들이 통과한다면 무력으로 저지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힌다. 할 수 없이 이들은 기회를 엿보았으나 카이사르가 협상하면서 서둘러 건설해놓은 강의 방책을 보고 단념하였다.
결국 하이두이 족의 유력자 둠노릭스의 중재를 통해 이들은 세콰니족 영토를 거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과는 달리 세콰니, 하이두이 족 영토를 지나면서 약탈을 시도했고 하이두이 족의 요청으로 개입한 카이사르가 이들을 쳐부수었다.
그 뒤 갈리아인들은 족장회의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게르만족을 쳐부숴달라고 요청한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까지 올라온 뒤 당시 네르비 족 영토에 깊숙히 들어와있던 게르만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결전을 벌여 이들을 격파한다.
그 이듬해에 카이사르는 사비스 전투에서 로마 세력이 들어온 것에 반발하는 갈리아 북부인들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그 뒤 4년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의 여러 반항을 진압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 영토에 침입하거나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등의 모험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로마에서 총독 임기를 연장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7년째엔 베르킨게토릭스가 주도한 갈리아 전체 민족의 반란에 직면하여 이들의 초토화 작전에 고전한다. 갈리아족은 그야말로 완전한 청야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즉 카이사르군의 진격로에 있는 마을들을 완전히 불사르고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는 젊은 데다 당시 힘이 없는 부족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아바리쿰에 있던 부족들은 이것에 불복하였고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카이사르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이들의 도시는 강과 절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지휘관인 카이사르와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로마 군단병의 공세에 무너지고 그 도시에 있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학살된다.(아바리쿰 공방전)
이렇게 되자 청야전술을 주장했던 베르킨게토릭스의 발언권은 매우 강해졌으며, 그 결과 갈리아인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지휘를 인정한다. 특히 12만에 달하던 아바리쿰 거주민들의 몰살은 갈리아인들이 마을과 터전을 자신들의 손으로 불사르는 게 더 낫다고 느끼게 하였다. 그 결과 베르킨게토릭스는 거의 완전하게 청야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현지 조달밖에 방법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보급할 길이 끊기게 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와 그의 본군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그를 생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있는 게르고비아로 진군한다. 그런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10개 군단에서 4개 군단을 떼어 부관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다른 부족을 공략케 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병력은 아바리쿰를 공략했을 때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아바리쿰도 10개 군단을 동원하여 간신히 점령했을 정도인데 베르킨게토릭스가 친히 있던 게르고비아를 6개 군단만으로 점령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즉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력과 적의 전력을 오판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를 공격하였으나 이곳 역시 천혜의 요새였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본군이 머물고 있었으므로 방비가 철저했다. 게다가 4개 군단이 줄어들었으므로 로마의 공격도 아바리쿰 시에 비해 거세지 않았다. 때문에 이 도시는 여러차례 공격했어도 끄떡도 하지 않았고 결국 군량이 다 떨어진 카이사르는 철수키로 결정한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철수하기 전에 '이대로는 그냥 못 가겠다'라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총공격을 한 뒤 큰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려고 계획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거세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걸 병사들이 오해하고 적진에 깊이 뛰어들고 만다. 그 결과 선두부대는 고립되고 많은 수가 전사하였으며 결국 본때를 보이려던 카이사르는 오히려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나게 된다. 즉 게르고비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갈리아족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이때 카이사르를 갈리아에 불러들였던 장본인이었던 하이두이 족이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붙는다. 하이두이는 카이사르를 불러들여 그 덕분에 갈리아의 맹주노릇을 하였는데 게르고비아 공방전의 패배로 카이사르에게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 족의 땅에 대부분의 군수자금과 군수물품, 그리고 갈리아 부족들에게서 잡아둔 볼모들을 머물게 하였는데 하이두이 족은 이것을 모조리 압수하고 로마인들을 살해한 뒤 카이사르를 배반한다. 그 뒤 하이두이는 배신한 대가로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휘하는 갈리아 연합군을 그들이 지휘하겠다고 하였으나 갈리아 족장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거부당한다. 그제서야 하이두이 족은 카이사르를 배신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되자 빨리 군량이 있는 곳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군량을 확보한다. 이때 카이사르에게서 4개 군단을 받아두었던 라비에누스는 상대한 족장을 이긴 뒤 돌아와 카이사르에게 합류한다.
이때 카이사르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는데 당시 카이사르가 달성했던 갈리아에서의 군공에 원로원은 시기하고 있었고 특히 삼두정의 동료였던 폼페이우스가 유난히 그랬다.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멋대로 임지를 벗어나 침략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그를 탄핵하여 갈리아족에게 넘기자는 의견까지 제시되는 상황. 게다가 그때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 말이었으므로 널널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임기는 단 1년만 남겨두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미 삼두정치가 끝장났으므로 더이상의 총독 임기 연장은 불가능하였다.[46]
때문에 베르킨게토릭스는 무사히 그 해를 넘긴 뒤 카이사르의 마지막 임기인 다음 해만 버티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완전히 물건너가게 되는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카이사르는 거의 분명히 정치 생명이 끝났을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모든 갈리아 부족이 배반했고 하이두이 족의 배신으로 모아둔 상당한 물자와 볼모가 날아갔기 때문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일단 임지로 철수한다면 그것으로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의 해방이라는 그의 목적을 십중팔구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도 이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게르고비아에서 졌다고 그대로 철수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머물고 있던 루아르 강과 속주 사이에 있던 세콰니 족을 공격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속주의 물자를 쓸 수 있는 루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베르킨게토릭스가 대군을 집결하고 카이사르의 눈앞에 나타난다. 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더 이상 청야전술을 쓰지 않고 카이사르와 군사적으로 맞붙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베르킨게토릭스가 청야전술을 계속 쓸 생각이었다면, 카이사르가 향하고 있던 세콰니 족을 이주시킨 뒤 그 영토를 불살라야 했다. 비록 이로써 카이사르가 속주의 루아르 강의 루트를 만들 수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카이사르는 적에게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급을 꾸준히 교란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카이사르에게는 그다지 큰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승리에 고무되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 아니면 사기가 고양된 부족들의 압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카이사르 앞에 갈리아 족 전체에게서 긁어모은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걸었다. 특히 당시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 때와는 달리 라비에누스가 4개 군단을 이끌고 합류하여 10개 군단 전부를 휘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에서 전투를 거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이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족을 살육하다시피[47] 하고, 도망가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추격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황급히 알레시아로 들어간 뒤 성문을 닫았고 카이사르군은 이 도시를 겹겹이 봉쇄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그의 대군이 이토록 쉽게 분쇄될 것이라 생각치 못했고[48] 알레시아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으므로 알레시아엔 고작 보름 남짓 먹을 식량이 있었을 뿐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식량을 아껴먹어 30일간 버티기로 하였고 외부의 구원을 기다린다.
베르킨게토릭스를 구하기 위해 갈리아족은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공격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도 이에 호응해 성밖으로 나와 공격한다. 카이사르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었으나 미리 방벽과 참호를 만들어둔 데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워낙 갈리아족보다 뛰어났으므로[49] 갈리아족은 앞뒤로 공격한다는 전술적 우위와 자신들의 영역에서 많은 수로 공격한다는 이점을 안고도 패배하고 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패배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고 구심점을 잃은 데다 두 차례의 패배로 인해 어마어마한 인적 손실을 입은 갈리아족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함으로써 갈리아는 평정된다.
그 넓은 갈리아 전역을 단 7년 만에 제패해버린 사건은 로마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범갈리아 연합론(?)을 내세워 봉기한 베르킨게토릭스를 알레시아 전투에서 물리치고 갈리아 지배를 결정적으로 확립함에 따라 서서히 원로원의 견제를 받게 된 그는 마침내 원로원의 최종 권고를 받고 루비콘강 앞에서 모든 군대를 해산한 뒤 로마로 올 것을 요구받는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게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여러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핵심은 카이사르 자신이 갈리아 총독을 유지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권을 반납하는 순간 원로원의 수많은 정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이 제안을 거부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 말기에 원로원과 이토록 심하게 대립하게 된 원인은 카이사르를 비호해주는 가장 중요한 두 인물들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삼두결속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지휘관으로서의 극도의 무능력함을 보인 끝에 자기 아들(젊은 크라수스) 및 군대와 함께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의 죽음, 카이사르에 대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로 기울어지게 된다.[50] 그 결과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반대로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대단히 강력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카이사르에게 대단히 강경하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양자 간 충돌로 나타난다.
원로원은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했고, 카이사르에게 지휘권을 반납한 뒤 민간인 신분으로 집정관에 입후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카이사르는 부재중 입후보 출마를 허락하면 군대를 해산하고 입후보하겠다고 답한다. 원로원은 토의 끝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고, 카이사르는 내전을 치르기로 결정한다. 카이사르의 군사 행동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8개 군단이 휘하에 있으면서 순순히 자기 목숨(정치 생명은 물론 실제 생명도)을 적대 세력 손에 내어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다.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말은 이 강을 건널 때 했다고 전해진다.
7. 루비콘 강을 건너다
우선 명확히 해야 할 것은 로마는 과두정에 가까웠으며 명문대가의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속주 총독직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역임자들이 1년 아니면 부득이한 경우 2년씩만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였고, 임기를 채운 총독은 당연히 물러나 원로원의 일원으로 남아야 했던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무관 및 과두정 인물들끼리 모두 동등하거나 그렇다고 믿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집정관과 재무관의 차이가 있었고, 같은 원로원 의원들끼리도 전직 집정관이냐 아니냐, 돈이 많냐 적냐, 가문이 얼마나 오래됐냐,[51] 출신이 어디냐 등 갖은 조건에 따라서 같은 기사계급인데 가문이 원로원에 진출을 언제 했느냐에 따게서 신참자(Novus Homo)니 뭐니 다 꼬리표가 있었고 높고 낮음이 있었다.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도 이런 순서대로 했다. 그래서 로마 과두정 인물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높이는데 필사적이었다. 그러므로 로마 공화정에서 특정 정당이나 이념보다는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그리고 보호민-피호민 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렇게 쌓아올린 명예(?)를 Dignitas라고 하며 이는 로마 공화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한국어로 딱히 정확하게 대체되는 단어가 없으며 명예, 존엄, 권위 등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합쳐진 단어라고 할 수 있다.[52] 목숨보다 이 Dignitas 때문에 카이사르는 내전을 선택했다고 고백했으며, 결국 이 Dignitas를 너무 독점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살아 있을 시절 Dignitas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암살당한다.그러나 카이사르는 3개의 속주와 6만 명의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10년씩이나 보유했다. 단순히 계산해 봐도 전직 정무관 30명이 1년씩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던 자리를 카이사르 혼자 차지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역시 마찬가지로 공화정 정무관에게 허락될 수 없는 거대한 지휘권을 보유했다. 당연히 그만큼 기존 명문 귀족들의 자리는 줄어들었고, 북이탈리아나 에스파냐 같은 수익성 좋은 속주에서 재산을 모을 기회도 사라졌으니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전통적 귀족들에게는 최악의 적이었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53]는 경제적, 정치적 원조를 통해 자신의 피호민들을 공직에 진출시켰다. 이것은 로마에 있던 보호자-피호민 체제에서 자주 있던 일이다. 보호자는 이렇게 피호민이 많고 그들의 지위가 높아져 자신의 세를 불릴수록 Dignitas가 더 올라갔다. 카이사르의 문제는 내전에 이긴 다음 술라를 본받아 혼자 Dignitas를 거의 독차지하고 따른 야망이 있는 명문가 자제들이 카이사르의 Dignitas를 넘볼 수 없도록 횡포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카이사르는 적들도 사실상 피호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적들을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관용을 베풀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피호민이 되는 것은 명문가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 나쁜 일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원로원 계급은 혼자 Dignitas를 독점하는 카이사르를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거나 싫어했지만,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소 카토, 메텔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소수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술라-마리우스 내전같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더 두려워했다.[54] 원로원의 많은 현역 의원들이 카이사르처럼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봤거나 공포정치를 경험해 봤기 때문에 또 다른 독재자가 로마로 진격해서 내전이 일어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다만 카이사르 다음 순번으로 기다리고 있던 고명한 명문가들은 입장에서 카이사르의 두 번째 집정관 당선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내전하고 말겠다는[55] 엄밀하게 따지면 원로원이 최종 권고를 통해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지정한 것이 먼저이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측으로부터 카이사르와 맞설 군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역이용해 도리어 원로원 최종 권고의 법적 불합리성을 주장[56][57][58]하면서 로마 진군을 결정하였다. 이때 카이사르의 주장의 요지는, 갈리아를 제패하여 지금 로마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바로 카이사르인데 이렇게 국가의 영웅인 자신을 (애초에 불법인) 최종 권고를 날려서 죽이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또한 헌법적인 면을 볼 때 친카이사르 성향의 호민관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원로원에서 쫓아낸 일이 있었다. 이는 원로원이 호민관의 신체불가침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전임 집정관으로서 카이사르에게 좋은 구실을 줬다. 하지만 카이사르 본인이 고백하기로는 전에 개선식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이제는 갈리아를 제패한 자신의 Dignitas를 깎아내리려는 원로원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진짜 이유였다.
반론하자면 고작 이런 이유로 카이사르의 내전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우선 원로원 의원들이 총독직에 연연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 게 애시당초 이들은 각자 로마 국유지를 불하하거나 임차하여 거대 라티푼디움을 경영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약 총독직으로 딴지를 건다면 전통적인 원로원 의원보다는 소 카토나 키케로같은 신흥 귀족들에게 더 문제였을 것이겠지만 갈리아는 당시 전쟁이 날 거라고 소문이 파다한 지역인데 굳이 갈 사람이 있을 지나 의문인 상황이었다. 또, 젊은 귀족들은 일단 명예로운 경력부터 쌓아야 했으므로 당장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총독직에 목숨을 걸 이유도 없었을 테고. 위의 이유들은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라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하다.[59][60]
일단 갈리아 전쟁 자체는 로마에 위협이 된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미리 갈리아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원래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헬베티족(현 스위스인)이 처들어 올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갈리아족 일부가 그들과 손을 잡고 로마인들을 쫒아내려 했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 거지 결코 아무 문제도 없던 갈리아에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 아니다.[61] 무엇보다 갈리아는 당시 로마의 속주였고 헬베티족으로부터 방어하는 것 자체는 엄연히 로마가 할 일이었지 침략 전쟁이 아니다.
또한 바로 위에서 말하듯이 경제적, 정치적 원호를 받은 이들을 공직에 진출시킨 건 카이사르만 하던 일도 아니고 애시당초 카이사르 역시 크라수스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사실 현재 정치인들도 초반에는 다른 정치인의 밑에서 일하고 영향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또 그걸 반드시 나쁘다고 보기도 어려운데[62] 그걸 가지고 비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총독직을 오래했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게,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내정된 과정 자체는 전부 합법이라는 것이다.[63][64] 즉, 카이사르는 엄연히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저 직위에 임명받은 만큼 당시 원로원도 카이사르가 몇 년을 총독직을 했든, 몇 명의 병사를 가지고 있든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고 보았다.[65] 그리고 만약 거기에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면 당연히 임명되기 전에 뭔가 이런 내용을 가지고 말이 나왔어야 정상인데 정작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66]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한 짓을 보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직 정도는 우스울 정도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전 지중해 해안에서 50마일 내를 전부 관장한다는 말도 안 되는 권한을 얻어냈고 이 덕에 폼페이우스는 아무런 제한없이 지중해 일대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임기는 3년이었는데 이 일을 3개월만에 해냈고 그러자 원래는 반환해야 하는 권한을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를 치는 데 쓰자고 제안해서 지지를 받은 적도 있었다. 비록 기간은 카이사르가 더 길었지만 받은 권한과 그에 대한 난이도, 합법 여부 등만 놓고 보면 폼페이우스 쪽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67][68]
애시당초 카이사르의 내전은 고작 이 정도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가 않다.[69][70][71] 이 일의 기원은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시작되는데, 포에니 전쟁으로 얻게 된 막대한 신규 영토이자 국유지를 원로원파 귀족들이 제멋대로 차지하여 농장을 건설하고 이 이권을 목숨을 걸고 싸운 로마 중산층 병사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막았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던 그라쿠스 형제같은 이들을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이름 하에 마구 죽여댔던 것이 진정한 발단이다.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로부터 시작된 민중파는 점점 더 과격하지는 탄압에 맞서게 되었고, 이런 민중파의 후계자가 바로 카이사르인 것이다.[72] 물론 원로원파에서는 카이사르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나 당연히 명분따윈 없었고 카이사르는 이런 위협으로부터 대항하기 위해 거물급 원로원파이면서도 신참이라 홀대받고 있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삼두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크라수스가 동방 원정에 나섰다가 패해 사망하였고 반면 카이사르는 그 뛰어난 정치적 능력에 더해 갈리아에서 얻은 군사적 명성까지 더해지면서 이를 고깝게 여긴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로 넘어가면서 수십년 이상을 끌어온 원로원파와 민중파의 최종결전[73]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카이사르의 내전의 본질인 것이다.
때문에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포르키우스 카토,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대다수의 명문대가들은 민중파의 수장인 카이사르를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의 두번째 집정관 당선을 지켜보느니 내전이 낫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74][75][76] 그들이 실제 군사력을 가진 폼페이우스까지 끌어들이면서 로마는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갈리아 전쟁에서 전격전과 기동전에 익숙해진 카이사르 군단은 원로원의 예상보다 빠르게 로마 본토로 강행군해 들어왔고, 맞설 병력의 소집이 미처 끝나지 않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함께 그리스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군단을 편성한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모습은 결국 이들에게 정치적 불리함을 안겨주게 된다. 여기에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결정적인 오판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빠른 이탈이다. 동맹시 전쟁의 여파로 인해서 동맹시들은 아직도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이들에게 더 많은 시민권과 권리를 약속한 민중파 카이사르는 당연하게 환대를 받았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하여 집정관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집정관이 된다. 그 뒤 스페인으로 건너가 그곳의 원로원 세력을 일레르다 전투에서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와 대결하기 위해 그리스로 건너간다. 그리스의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를 숫적 열세의 상황에서 포위를 하다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배하고 만다(디라키움 공방전). 폼페이우스는 군량 보급과 숫적 우위, 그리고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전보다는 지구전을 펼치는 게 유리한 게 명백했다. 그리하여 폼페이우스는 시종일관 지키는 전법으로 나갔는데 폼페이우스와 동행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장기간의 군대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때문에 폼페이우스에게 조속히 결판을 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폼페이우스는 결국 파르살루스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폼페이우스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뻔한 전술을 썼는데, 즉 카이사르군과 자기 쪽 보병이 붙으면 자신의 기병으로 카이사르군의 우익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예측하여 폼페이우스 기병의 예상 이동로에 장창병을 잔뜩 포진시켜 이 기병을 격파하고 거꾸로 폼페이우스 보병의 좌익을 공격한다. 로마군이 장창을 썼다하니 뭔가 이상한데, 플루타르코스는 비교열전 카이사르전에서 원래 로마군이 돌격 직전에 날려댔던 필룸을 이날 전투에서만큼은 날리지 말고 집어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원들의 얼굴에 겨냥하도록 카이사르가 그의 병사들에게 명령했고, 필룸은 던지는 걸로 알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자신들의 얼굴에 상처가 날까봐 면상을 가리고 도망쳤으며 이게 기병대의 패주로 이어졌다고 서술해놓았다. 이들이 도망친 이유에 관해선 매우 수상하기는 하지만[77] 플루타르코스가 전투 당시에 생존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와전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서술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78] 허나 앞서나온 장창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그의 서술에서 나온 필룸으로 변경되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어찌됐든, 여기서 폼페이우스군은 대패하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에 살해당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들어온다.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목을 건네받은 카이사르는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저서인 내전기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라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때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인지, 아니면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자의 죽음을 보고 슬퍼한 눈물인지는 해석이 분분하다. 이는 이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로마의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를 기념하는 조각들을 대거 남긴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보통은 의도적으로 카이사르가 프로파간다를 위해 폼페이우스를 띄워주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나 하고 추정한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권력 싸움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상당히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데 여기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반감을 사게 된다. 결국 이들은 카이사르를 공격하게 되었고(알렉산드리아 전쟁) 적지에서 소수 병력밖에 없었던 카이사르는 죽을 고비도 넘기는 등의 고생을 하지만 결국 원군이 도착하면서 승리한다.[79] 그 뒤 소아시아의 젤라 전투에서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말을 남긴 승리를 거두어 이 지역을 평정한 뒤 로마로 귀국하여 다시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원로원파 잔당을 소탕하러가 탑수스 전투에서 이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와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 갈리아와 이집트 사건을 묶어 처음이자 마지막 대개선식을 치렀다.
8. 관대한 카이사르의 무혈독재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 잔당을 격파하고 로마로 귀환한다. 카이사르는 이때 방대한 개혁을 실시한다.달력 정비 - 카이사르는 기존에 사용하는 구 로마력의 오차를 간파하여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두어 실질적으로 1년을 365.25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겨우 1년에 11분 14초였으며, 16세기에 그레고리력[80]이 만들어질 때까지 1500년이 넘게 사용되었다.[81] 그리고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으며,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쿠리아 율리아를 세웠다. 또 바실리카 율리아와 마르켈루스 극장을 건설하였고,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여 도시를 확장했다.
원로원 개편 - 원로원의 중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술라 시대에 600명으로 증원되었던 정원 수를 900명으로 늘렸다. 기사계급에게 의석을 주어 원로원 강화를 꾀한 술라와는 다르게 카이사르는 의석을 대부분 자신의 지지자로 채웠고 갈리아의 유력자들에게도 제공했다. 원로원의 계엄령인 원로원 최종 권고를 폐지했다.
원로원의 기득권 세력은 이 비상계엄을 통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재판 없이 처분할 수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지속적으로 이것의 불합리성을 주장해왔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한 깊은 역사를 가진 이 비상결의는 그 대상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폐지된다. 거기에 술라가 배심원단을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한 것을 폐지했다. 원로원 귀족들로 구성된 기존 배심원단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편향된 판결을 내기 쉬워서 공정한 판결이 불가능했다. 거기다가 기존 배심원단이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쪽은 거의 유력자들이었기 때문에 뇌물을 받기 쉬웠다.[82] 카이사르는 배심원단을 로마 시민
속주 정책 - 늘어난 로마 영토에 따라 속주를 재편성했는데 카이사르가 직접 정벌한 갈리아와 누미디아, 폼페이우스가 정복한 비티니아, 시리아를 추가하여 18개의 속주가 편성되었다. 속주가 늘어나면 이에 군사 지휘권이 부여된 총독이 임명되어야 하는데 카이사르는 행정 개혁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공화정 시절 집정관 다음가는 관직이었던 법무관을 8명에서 16명으로 늘리고 재무관을 20명에서 40명으로 2배 늘렸다.갈리아 키살피나의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프로빈키아와 트리나크리아(시칠리아)의 속주민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속주민 융화 정책을 통해 카이사르는 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정치적 관용 -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나 술라와는 달리 반대파을 죽여 씨를 말리거나 재산을 몰수하거나 이혼을 강요하는 짓을 안했는데 이를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카이사르의 관용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는데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카이사르가 같은 로마 시민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카토의 논리가 공화국 이념적으론 맞는 말이라 쳐도, 마리우스와 술라가 벌인 피바다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대다수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관대한 처사를 환영하고 지지했다. 당장 키케로부터도 카이사르의 관용에는 편지까지 따로 보내며 동의와 지지를 표했다.[84]
복지 정책 -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고 의료와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의사와 교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했다. 군대에서만 12년 가까이 보낸 카이사르는 군인에 대한 대우 역시 개선하기 위해 70데나리우스였던 봉급을 140데나리우스로 2배 늘렸다. 대도시였던 로마는 교통이 매우 혼잡했기에 카이사르는 짐마차의 주간통행을 금지했다. 다만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85] 카이사르는 그렇게 새로운 시스템들을 구축하면서 로마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9. 종신독재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개혁을 마친 뒤,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 자신을 임페라토르(imperator, 최고사령관)라는 호칭[86]을 사용하면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권력을 누리게 되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사실상 로마의 제정이 시작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다만, 카이사르 본인이 제정을 시작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카이사르는 생전에 제정으로 가겠다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전에 암살당했으니 말이다. 물론,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으로서 활동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로마 역사에도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원로원 체제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었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왕관을 거부하는 정치적인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로마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꿔놓은 과정은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집권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성립시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카이사르에게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결국 이러한 카이사르의 제정으로 가는듯한 행보 때문에 오늘날까지 카이사르는 평가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독재적 야망을 품은자라는 부정적인 꼬리가 따라붙고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위치는 사실상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에 황제라는 개념이 없었고 카이사르가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으면서 황제의 개념을 만들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을 거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의 제도화가 시작되면서 현대의 개념이 완성된 것이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였는데, 원정을 떠나기 전 불과 사흘 전에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은 주모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카이사르의 반대파가 주류였지만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비롯한 카이사르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젊은 장교들도 가담했었다. 암살의 주된 동기는 카이사르가 그간 보인 제정으로 가는 행보에 대한 반발과 카이사르에게 집중되는 명예에 대한 불만이었다. 로마 공화정이 공화정인 이유는 왕이 없는 유력가문 몇몇이서 중요한 관직을 공평하게 나눠먹기를 했기 때문에 공화정이었는데, 카이사르는 이 모든 명예로운 관직들을 사실상 혼자서 독점하고, 말년에 가서는 술라가 했던 것처럼 원로원을 본인이 임명하든지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선출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편법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87]
그리고, 내전이 끝나고 전후처리가 끝난 이후부터 카이사르는 대놓고 황제처럼 행동했다. 종신독재관에 임명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조각상을 로마 왕들의 조각상 옆에 만들어 놓고 자기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한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문화 충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루페르칼리아 축제[88]가 열리던 때 대중 앞에서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쳤는데 카이사르가 조용히 거부했다. 이에 대해 그가 야심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려 했다는 견해와 왕관을 거부하는 정치적인 제스처를 보여주면서 대중의 의혹을 불식시키려고 했다는 견해가 엇갈린다.
외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왕관을 바쳤을 뿐이고 카이사르는 로마에는 왕이 필요없다면서 왕관을 되돌려주었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이벤트가 카이사르의 지시 혹은 묵인 없이 지지자들만의 독단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고[89], 카이사르가 왕정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를 경계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불안감에 기름을 붓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 카이사르의 이런 말년의 행보에 의문을 표하는 역사가들도 있는데 이러한 왕 행세는 암살이라는 결과가 보여주듯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반면 실익은 전혀 없는 기분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카이사르는 이때까지는 항상 자기 절제가 철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카이사르도 나이가 들었고 또 모든 정적을 물리친 후라 긴장이 풀렸을 수도 있지만, 당시 카이사르가 어떤 심산이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90]
때문에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생겨났다. 일례로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뇌에 손상을 입었을 거라는 가능성이다.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기생충의 서식지로 가장 유력한 곳이 이집트이고 내전 막바지에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으므로 시기적으로는 대충 들어맞는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전투인,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과 싸운 문다 전투에서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지지부진하며 고전한 모습을 보인 것도 뇌기능 손상설을 뒷받침한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뇌졸중 등의 신체질환과 원로원의 견제 등으로 비롯된 우울증이 도져서, 격렬한 감정 변화로 인해 이전만큼의 신중함을 잃었다는 설도 제기된다.[91]
음모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카이사르가 애인의 자식이라 아낀 것은 맞지만 브루투스는 외삼촌이자 카이사르의 숙적인 카토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폼페이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간 것에서 그가 얼마나 카이사르를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주모자인 카시우스는 브루투스의 처남이고 독재에 대한 반감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와 맞서 싸우다가 항복했다.
한편 암살자 중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사람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트레보니우스,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와 술피키우스 갈바가 있었다. 이 중 카이사르의 최측근이라 할 만한 사람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다.[92] 데키무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해군을 지휘하던 장교로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제2상속자로 정했을 정도로 아낀 인물이다.[93] 카이사르는 데키무스를 기원전 42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시키려 했다. 트레보니우스 역시 기원전 45년 보궐 집정관이었으며 갈리아 전쟁과 내전 당시 적지 않은 활약을 한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일부 지지자들은 왕정이나 다름 없는 카이사르의 독재에 실망했다는 설이 있다. 또 측근들과의 관계가 아주 원만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당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경계하라는 누군가의 말에 카이사르가 "나는 비쩍 마른 그 두 사람보다 뚱뚱한 둘(안토니우스, 돌라벨라)이 더 무섭다"라고 은근한 견제성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카이사르의 암살에 직접 가담한 부하들 중 집정관급 인사는 트레보니우스가 전부였다.[94][95] 안토니우스는 알면서도 방기했다는 설[96]과, 카이사르 사후 빠르게 대권을 장악했다는 점 때문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음모론이 약간 묘사된다.
9.1. 카이사르 체제와 프린키파투스
카이사르가 그간 보인 행보로 볼 때 과연 그가 암살되지 않고 살았다면 자식이나 친지에게 물려주는 전형적인 제정을 할 것인가는 모를 일이다. 후계자로 지명했던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누나의 외손자였고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으나, 유언장을 통해 양자로 지명받아 가문을 이은 정치적 후계자이자 상속자였다.암살 뒤 소위 '공화파'와 1차로, 다음엔 카이사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안토니우스와 벌인 2차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로마의 제정은 그야말로 편법과 제도의 모순의 극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거듭해 맡아오던 집정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호민관 특권[97]과 군단 지휘권만 원로원에게 얻어낸 다음 이것만을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희한한 계승방식을 썼으며 대외적인 호칭으로는 공화정기부터 원로원 내 우선 발언권자에게 불려진 칭호 프린켑스[98][99]라는 칭호를 썼다. 이는 공화정에 익숙하고 왕정에 불안감과 혐오감을 갖고 있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으나 직위는 없이 권리만을 애매하게 짜맞추는 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불안정한 자리였고, 이 때문에 혈연에 집착하면서 왕정과 다름없는 체제로 나아가게 된다.
더욱이 카이사르가 구상했던 체제는 애매모호했던 아우구스투스가 만들고 티베리우스가 정착시킨 프린키파투스(원수정)와 큰 공통점 외에는 그 실체가 불확실했다. 그의 양자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9년 조정 헌법 아래 만들어진 새로운 공화정[100]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로마식의 입헌군주정 내지 세습이 가능한 종신대통령 체제의 양두정체를 만들었지만 이 역시 그가 의도적으로 계획대로 판을 짜놓고 노골적으로 완성해낸 국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프린키파투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전례를 통해 얻은 교훈 아래, 본인의 업적론 문구처럼 "나는 어떠한 새로운 관직을 만들거나, 조상들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라며 자신의 모든 명예 수여, 권한 수여까지 공화정스럽게 원로원의 손을 빌려 다 통과시키며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집권 후 40년 넘게 천수를 누리며 상황에 맞게 디자인해 우리가 제정 혹은 원수정(프린키파투스)로 부르는 그 체제를 만들어낸 뒤,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공화정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종신 특권을 상속시키는 방법 그대로 물려줬다. 따라서 프리키파투스라는 국제는 공화정 체제에 프린켑스가 로마 시민과 민회를 대표하는 형태로, 세나투스 로마누스와 함께 양두정으로 이끄는 방법이었지 왕정으로 부르기 어려운 형태의 로마 공화정의 신체제로 당대 로마인들에게 인식됐다.[101]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이 국제는 태생부터, 서기 4세기 도미나투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1세에 의해 만들어지기 전까지 "공화정과 전제정 사이의 과도기 형태"라는 애매모호함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카이사르의 정치적 후계자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는 기본적으로 공화국제의 탈을 쓴 상황에서 원로원의 형식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켑스인 황제는 과거의 법과 자신이 만든 법을 모두 지켜야 했다. 따라서 냉혹하고 변덕스럽다고 비난받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도 요세푸스, 타키투스, 디오의 표현처럼 편법을 사용해도 그 근간을 지켰고, 로마황제들은 이런 줄타기를 잘해낸 아우구스투스를 자신들의 통치철학으로 언급했다. 따라서 로마 역사상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에게 모두 탄핵된 네로처럼 이런 애매모호함 속의 합법적 통치와 합의의 틀을 어긴다면 내전은 언제든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네로처럼 창건자 혹은 전임자의 친혈육이 아닌, 입양자[102]가 입양되어 온 집안사람들을 반역죄로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증거를 조작해 대놓고 불법을 저지른다면 이는 알려지는 순간 결과는 뻔했다.[103]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 무고 사건, 피소음모사건, 베네벤툼의 음모 등에서 온갖 불법과 악행을 저지르며 그 근간을 훼손한 네로는 탄핵돼 자살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멸문한 이후 네황제의 해라는 내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때 이 제도의 허점이 그대로 노출된다. 최초의 제정 내전기에서 그 1년 사이에 죽은 황제만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세 명. 그 뒤로도 황제의 계보가 끊어질 때마다 내전의 위험이 항상 도사렸고, 이런 애매모호함을 방지하고자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계승법을 만듦에도 프린키파투스는 상당히 모순적이었다. 다행히 서기 2세기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2세기 후반 25여년간 존속한 세베루스 왕조는 평화를 유지했지만 이들 왕조가 단절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로마는 내전으로 번졌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된 이후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일개 대대장이었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가 되면서 결국 군인 황제 시대가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점차 문제가 쌓여가던 제국에서 정국의 극심한 변화는 로마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는 로마 황제라는 직위가 다른 왕국들의 왕과는 달리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었고, 단지 호민관 특권과 최고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일반 시민'이었기 때문에 직위 자체가 매우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황제를 암살한 뒤 그 직위를 자처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여차하면 군단 지휘권만 가지고 다른 권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할 수도 있었다. 내전기 때도 그런 식이었고, 3세기의 군인 황제 시대 때는 군단이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자기네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것만으로도 황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황제라는 직위가 실제 존재하는 공직이었다면, 그리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 그에 걸맞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면 더더욱 이토록 쉽게 황제 자리를 아무나 주장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가 역임했던 독재관이라는 자리와 비교할 때 이 차이점은 명백하다. 독재관이라는 직위는 분명한 공직이며 이를 위해서는 집정관 선출처럼 켄투리아회(민회)에서 선출되어야 했다. 독재관을 맡으려면 좋든 싫든 수도 로마로 가서 켄투리아에 참석해 투표를 해야 했다. 이것 자체로 정국 불안정은 많이 견제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형태였다면 훗날 로마에서 많이 보여지는 외지에 있는 군단이 제멋대로 자신의 군 사령관을 로마 전체의 최고 권력자로 추대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아우구스투스의 프린켑스의 형태가 아닌 카이사르의 종신 독재관의 형태였다면 황제를 추대하고 싶은 군대는 우선 로마를 손에 넣고 나서 켄투리아 민회를 장악하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이러한 수순만으로도 황제의 난립은 예방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황제는 단지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을 가진 일반 시민의 신분이었으므로 군대가 제멋대로 이러한 특권을 주장하고 자신의 사령관을 추대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 같이 희한한 형태의 독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독재관, 집정관, 독재관 등을 거듭 역임했던 것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무엇이 로마의 새로운 정부 형태가 될 것인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죽어버렸고, 이것은 위에서처럼 아주 모호한 형태의 아우구스투스식 원수정으로 귀결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상당한 기량[104]의 소유자였지만 희한할 정도로 혈통에 집착[105]하였다. 물론 이는 인지상정이지만 나라를 통치하는 데 있어 혈통은 결코 100% 보장되는 능력이 아닌 데다 끊어지면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106]했고, 그나마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유능한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를 황제에 앉히는 등 최소한의 합리성이 있었지만[107] 그 이후의 황제들은 혈통이 완벽함에도 원로원과 지나친 마찰을 빚어 암살(칼리굴라)되거나 지나칠 정도로 온화하여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난(클라우디우스)을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혈통이 끊어질 때마다 일어난 내전기와 3세기의 군인 황제 시대를 초래한 원수정이었다.
카이사르의 종신독재관은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다. 전임 독재관인 루키우스 술라는 임기가 없는 독재관이지만 공화국이 복원되면 물러나야 했다.[108]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 취임 이후로는 경호원을 원로원에 대동하지 않았고 카이사르의 독재는 원로원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는 카이사르 암살로 귀결된다.
10. 암살
- 자세한 내용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참조
암살이 결행된 날짜인 3월 15일은 유명하다. 그가 파르티아 정복을 원로원에 공표하려고 했던 날이기도 했지만, 훗날의 문학적 창작력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덧붙여졌다.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월 보름을 조심해라!"라고 했다라든지, 그 전날 파티에서 누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선호하냐고 물었더니 '갑작스러운 죽음'이라고 했다든지, 암살된 당일 아내가 예지몽을 꾸고 극구 말렸는데 갔다든지. 이 모든 것의 결정판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다. 물론, 그가 숙적인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서양에서는 3월 15일은 불길한 날로 여겨진다.
카이사르 한 명이 없어진다고 수백 년 전의 공화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구속구 역할을 하던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공화정의 몰락이 가속화됐다고 보는 게 맞는다. 카이사르 암살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고 실제로 원로원에게 돌아온 것은 마리우스 이후의 대숙청이었다. 그러나 복고주의 세력(소위 공화파)은 이런 현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낙관적으로 행동하다가 자멸했다.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세우면서 그들의 암살은 그 의미가 사라진다.
고대 로마에서는 날짜를 매달 초하루(Kalendae)와 이두스(Idus)를 기준으로, "무슨 달 초하루 며칠 뒤", "무슨 달 이두스 며칠 전" 하는 식으로 표시했다. 이 중 이두스(Idus)는 3, 5, 7, 10월에는 15일, 그 외의 달에는 13일을 말하며 카이사르 암살로 유명한 3월 15일은 라틴어로 Idus Martii(3월의 이두스)가 된다. 영어로도 이를 번역하여 Ides of March(3월의 이데스)라는 표현이 존재하며, 이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3월 15일 아침,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파르티아 정복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원로원에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의 아내 역시 원로원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원로원으로 향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가자 의원들은 모두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슬쩍 그의 뒤로 갔다. 곧 일당 중 한 명인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옷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는데, 이것이 공격의 신호였다.[109]
카스카가 맨 먼저 목을 찔렀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으므로 카이사르는 칼을 빼들어 저항할 수 있었다. 원래 있던 호위병력은 불과 며칠 전 해산시켰기 때문에 그는 혼자였고, 주변 사람들은 하도 놀란 나머지 카이사르를 돕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암살자들은 그에게서 칼을 빼앗은 후 카이사르를 빙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사실 카이사르는 자신을 잘 방어하고 있었지만 브루투스가 단검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체념한 듯 옷을 머리 위로 벗어 던지고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있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그의 옛 적수였던 폼페이우스의 흉상으로 밀어붙였다. 때문에 흉상은 피로 물들었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한 사람을 찌르기 위해 많은 칼이 난무한 탓에 암살자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카스카가 맨 먼저 목을 찔렀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으므로 카이사르는 칼을 빼들어 저항할 수 있었다. 원래 있던 호위병력은 불과 며칠 전 해산시켰기 때문에 그는 혼자였고, 주변 사람들은 하도 놀란 나머지 카이사르를 돕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암살자들은 그에게서 칼을 빼앗은 후 카이사르를 빙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사실 카이사르는 자신을 잘 방어하고 있었지만 브루투스가 단검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체념한 듯 옷을 머리 위로 벗어 던지고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있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그의 옛 적수였던 폼페이우스의 흉상으로 밀어붙였다. 때문에 흉상은 피로 물들었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한 사람을 찌르기 위해 많은 칼이 난무한 탓에 암살자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재각색한 카이사르 암살 직후의 이야기가 또 유명하다. 그의 작품 《Tragedy of Julius Caesar》에서는 암살파의 대표인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의 당위성과 지지를 얻기 위해 시민들 앞에 나서서 긴 연설을 한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카이사르에게 익숙해진 시민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했다.[110]
이후 브루투스가 떠나자 원래 암살파들이 별 영향을 못 줄 것이라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가 나선다. 그는 브루투스의 연설에 동감을 표하는 듯하다가 결국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충격적인 반전을 구사하며 시민들의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111]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카이사르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연설을 계속하여, 마침내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기에 이른다. 안토니우스는 곧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 일당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성을 잃은 시민들은 '브루투스와 일당들을 끌어내 죽여라!'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급변한 상황에 놀라 잠적하고, 안토니우스는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그도 훗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게 밀리고 만다.
이 사건은 감정에 대한 호소가 논리적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온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야말로 픽션이라는 사실과 셰익스피어는 왕권 사회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하도록 하자. 실제로는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그렇게 선동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며 카이사르의 죽음 직후 그는 집으로 도망쳤다. 확실한 것은 카이사르 장례식에 안토니우스가 참석하여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고인의 업적을 찬양하는 평범한 연설을 했고 민중이 대규모 봉기를 했다는 것이다.
11. 사후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되었다. 화장 당일,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작성한 유언장을 낭독한다. 안토니우스도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하루 정도 지나서 유해를 발견했고 이 현장에서 피소라는 원로원 의원이 유언장을 사망하기 6개월 전에 작성하여 여제사장에게 맡겨둔 사실을 알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카이사르의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유언장 내용은 로마인 이야기 5권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112]에게 남긴다.
-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 제1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상속권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돌아간다.
-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 집행 책임자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 제1상속인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113]
-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의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일을 실행할 책임자는 제1상속인으로 한다.
이로써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18살의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양자 입적 후 유언장에 따라, 익히 잘 알려진 옥타비아누스로 정식 개명 후 로마 정계에 등장한다. 처음에 그 누구도 옥타비아누스를 알지 못했으나 이 젊은 청년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된다.
안토니우스가 이러한 유언장을 발표를 하고나서, 오히려 이 덕에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군중들은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의미로 장례용 장작 위에 놓인 카이사르의 유해에다가 직접 구해 온 마른 나뭇가지들과 가구 조각들과 옷가지들을 땔감으로 수북이 덮어 주었고, 심지어 여자들은 보석들까지 불길에 넣어 주었다. 즉, 독재자였음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카이사르였기에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경의의 표현으로 시신 위에 자신들이 가진 물건들을 땔감으로 수북히 덮어 주었고 그로 인해 화장을 위해 불을 당겼을 때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고 한다..[114]
불길이 꺼지고 나서 뼛가루(유해)를 수습하려고 했을 때 비가 세차게 내려 뼛가루들이 전부 강으로 쓸려가는 바람에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묘소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115] 이때 혜성이 하늘을 지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카이사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다. 후대 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 혜성은 핼리 혜성으로 밝혀졌다.[116] 로마의 귀족들은 화장을 한 후 뼛가루나 유골 조각들을 보관용 도자기(유골함, Urn) 또는 작은 석관에 담아 가족 묘 건물에 봉안하는 식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비바람에 유해가 모두 소실된 카이사르는 뼈조각 하나도 추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카이사르의 묘소는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무덤이 없는 사실이 더욱 시대의 풍운아 카이사르답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비록 강물로 씻겨 내려가긴 했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대대로 내려오고 이름마저도 기억되고 있으니. 또한 로마의 정권 교체나 멸망 이후로 각종 문화재와 무덤이 약탈된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카이사르는 죽어서도 행운을 누린 셈이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카이사르의 암살은 로마의 정국을 크게 요동치게 했다. 만일 이 과정에서 일이 다르게 풀렸다면, 카이사르는 일개 반역자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암살파들은 정작 암살에 성공한 뒤 정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고,[117] 오랫동안 카이사르와 싸워왔던 원로원의 옵티마테스 그룹은 폼페이우스의 패배 이후로 거의 와해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직 살아 있었던 키케로조차도 별다른 일은 하지 못했다. 애당초 키케로는 이런 일에는 능한 인물도 아니었고 암살 자체가 즉흥적으로 일어났기도 했고 무엇보다 원로원파는 가장 중요한 군대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암살범들과 그와 관련된 이들(키케로 포함)을 모조리 숙청하면서 로마의 정권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이 장악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공화정 이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많이 보이고(당장 브루투스조차 속주에서 고리대금업으로 속주민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시민들의 원로원에 대한 인식이 워낙 부정적이다 보니 카이사르와 같이 대중을 대리하여 원로원을 견제하는 인물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 중 카이사르가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원로원 그 자체를 없애거나 하진 않은 데다가 내란에서 그에게 적대하던 자라도 죽이지 않았던 경우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들은 로마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에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는 데다가, 당시 로마군 역시 이미 앞선 내전으로 반 카이사르파 군대를 완전히 박살 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 충성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암살 계획은 매우 허술했다. 심지어 마르스 광장에서는 카이사르의 파르티아 원정에 따라가겠다고 자원한 고참 군단병들이 숙영 중 이었고 이들이 자신이 존경하는 최고 사령관을 그것도 관용을 받은 자들과 카이사르와 함께 전장을 누빈 고위 장교들이 뒤통수 쳐서 죽였으니 이들이 카이사르파에 붙을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애초에 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카토, 렌툴루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같이 영향력 있는 이들이 사망하면서 보수파는 없어졌고 암살을 감행한 브루투스 일당에 카이사르의 죽음에 분노한 민중을 억누를 인재가 없었다. 심지어 로마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파트리키 가문 출신 중에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부)로 대표되는 젊은 귀족들처럼 카이사르파에 몸 담으면서도, 암살 직후 상황을 끝까지 주시하다가 장인이나 친척들과 달리 원로원파 혹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쪽에 붙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이미 40년 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에서 마리우스는 보수파에 대한 대숙청을 벌였고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그러나 술라는 당시에 폼페이우스, 루쿨루스, 크라수스를 비롯한 젊은 보수파들을 결집하여 민중파를 박살내고 마리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한다. 술라는 당시 로마 진군으로 민중들에게 반발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술라가 이때 한 짓은 전부 다 불법이었지만 당시 이를 규탄하고 맞서 싸울 만한 민중파의 거두들은 마리우스를 비롯해서 대부분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망해 버렸기 때문에 갖다붙일 명분을 만들어내기 좋았다. 그리고 술라는 많은 군공을 세운 명장인 데다 유능한 정치가라 그를 중심으로 보수파를 결집시키기도 쉬웠다. 게다가 당시의 술라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명분도 충분했고 유능한 인물도 카이사르 암살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보수파는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보다 훨씬 불리했다. 이런 가운데 암살자들에게는 술라같이 냉정하고 술수를 잘 부리는 인물이 없었고 대부분 원칙주의자들이었던 데다 상황 판단이 느려 도피하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암살자들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에게 패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만들어내 로마 제정을 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신격화하여 공식적으로 '디부스 카이사르(신격 카이사르)'라고 호칭하였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를 도입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대대로 신격화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후로 황제들은 대대로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았으며, 제정 말기에 이르게 되면 '카이사르'는 하나의 칭호가 되었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신격이 된 이후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한 조각상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제정기반 확립을 위한 프로파간다였다.
로마에서는 신격화된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카이사르 포룸이 세워졌는데, 카이사르 포룸은 왠지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포룸에 있는 조각상이 카이사르의 기마상, 그리고 카이사르가 자신의 가문(율리우스 씨족)의 시조의 어머니라는 비너스(아프로디테)의 조각상도 포룸에 가져다 놓았다고... 반면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에는 로마의 역대 인물들(깐깐하고 야단잘 칠듯한)의 조각상이 있었기에 자연적으로 카이사르의 포룸으로 연인들이 이동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있다. 카이사르가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면서도 자기 애인들의 남편들에게까지도 원한을 사지 않은 연애 고수였다는 점도 한몫 했을지도. 라틴 문학들 중에서도 연인을 카이사르의 포룸까지 데려는 왔는데 결정적(청혼?)인 대시를 못하는 남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응원하는 비너스와 껄껄 웃으며 좀 잘해보라고 타박하는 카이사르를 묘사하는 내용도 있다.
[1] 이때 임신한 배를 갈라 태어났다고 전해져 제왕절개의 유래가 되었다.[2]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술라의 방해 공작이 있었지만 당선되었다고 쓰고 있지만 당시 로마는 고모부 마리우스와 훗날 장인이 되는 킨나 등 술라에 반대하던 마리우스 일파가 집권하던 상황이라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당시에 킨나의 후원으로 최고사제에 당선됐다는 것이 정설이다.[3] 그가 당시에 맡고 있던 사제 직책이 이혼을 금지하고 있어서라는 설도 있고, 그 아내의 아버지인 장인이 민중파였던 만큼 어린 나이에 이미 민중파로서의 입장을 확고히 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며, 그냥 술라가 남의 사생활에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이 싫었다는 설도 있다. 카이사르는 후일 자신이 최고 권력자가 된 뒤에도 자기 부하나 정적의 사생활에 크게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어서, 맨 마지막 이유도 그리 뜬금없는 것은 아니다.[4] 야사에 따르면 술라는 마지못해 카이사르의 이름을 지우며 '자네들은 모르겠나? 이 청년의 머리속에는 수천명의 마리우스가 들어있는데'라며 투덜거렸다고 한다. 훗날 카이사르가 옵티마테스파가 원로원 권한을 악용하여 자신을 제거하려하자 내전을 일으켜 공화정을 타도한 것을 생각하면 술라의 견목이 맞아 떨어졌다.물론 수도 로마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배짱은 술라를 더 닮긴 했다만[5] https://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uetonius/12Caesars/Julius*.html[6] 로마는 전형적인 정복국가였으며 이 정복 전쟁에 나서는 이들이 바로 투표권을 가지는 시민들이었다. 현역병이자 예비역인 시민들의 눈에 군복무를 하지 않은 미필 정치인은 결격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7]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박을지언정 박혀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 여겼다.[8]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비티니아 증여에 태클을 걸며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를 참고하자.[9] 로마는 개선식에서 개선장군이 교만해지지 않게 한다는 명목으로 개선장군을 놀리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10] 동성애 스캔들은 루머지만 카이사르의 이성관계는 실제로도 굉장히 화려했다.[11] 이때 카이사르는 동성애 드립보다도 대머리 드립에 더 짜증을 냈다고도 한다(...).[12] 참고로 이 시민관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전장에서 전우의 목숨을 구해줬을 때 도움받은 전우가 직접 만들어 증정하는 관. 이걸 받는 것 하나만으로도 평생의 자랑거리가 된다.[13] 이 사람의 아들이 나중에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더불어 제2차 삼두동맹의 한 축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다.[14] 키케로도 이 사람 밑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15] 다만 이 사건은 역사가들에 따라 시기는 조금씩 다르게 서술된다. 에게 해에서 납치되었다는 전개는 동일하나 수에토니우스는 술라가 죽은 후의 일로, 플루타르코스는 술라가 죽기 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16] 로마의 1탈렌트는 32.3kg. 은 650kg은 현대 기준으로도 5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17]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ulius-Caesar-Roman-ruler[18]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서(?) 교수형에 먼저 처한 다음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십자가형 문서에도 나오는 참혹함을 생각해보면 자비라고 할 수 있긴 했다. 어떤 어린이용 위인 동화에서는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서 해적들을 잡아놓고 "다음에 또 날 잡거든 그땐 몸값으로 100탈렌트를 요구하도록. 알겠나?"라고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19] 루쿨루스는 확실한 술라파였지만, 카이사르의 외가인 코타도 술라파였고 루쿨루스가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을 정도로 접점이 없지는 않았다.[20] 라고는 하지만 카이사르는 빚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 빌린 돈은 다 갚았다. 애시당초 가장 큰 채권자이자 거부였지만 로마 내에서는 신찹자 취급을 받았던 크라수스를 삼두의 일원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세를 갚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21] 로마 공화정은 부모의 위대함이 자식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가 깊기는 했어도 집정관도 겨우 3명밖에 안 나왔고, 당장 카이사르의 아버지만 하더라도 법무관에서 커리어가 끝났다. 자신이 선거에서 당선되어야 할 명분을 쌓으려는 프로파간다라고 보면 된다.[22] 이전에는 폼페이우스파였다고 되어 있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는 그 자신이 선언한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파였고, 당시에는 폼페이우스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에서 신참에 불과했으므로 파벌이 있을 만한 처지도 아니었고 정치력이 좋은 편도, 원로원파와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었다. 괜히 삼두정치에 폼페이우스가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당시 군사적 명성이 혁혁했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많았다.[23] 폼페이우스는 이 시절 관직을 전혀 지내지 않았으므로 원래는 군대지휘권을 갖는 것 자체가 엄연히 불법이었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아버지가 갖고 있던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24] 키케로를 엿먹이기 위해서 카이사르가 일부러 해줬다는 설이 우세하다.[25]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반역자라며 재판도 없이 먼저 처형하였고 이로 인해 명성이 높아졌고 본인도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재판도 없이 카틸리나를 처형한 건 엄연히 불법이었고 로마인들도 열기가 식은 뒤 이래도 되는 건지 고민하던 참이었다.[26] 다만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을 자기 재산으로 처리해버려 빚이 엄청났다. 애초에 패션에 관심이 많고 수집욕도 있어서 돈을 펑펑 쓴 데다가 국가 단위의 행사를 개인 돈으로 치렀으니 빚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속주 통치를 하러 떠날 때 빚쟁이들이 돈을 떼어먹힐까 봐 못 가게 막기까지 했다. 결국은 대부호 크라수스가 보증을 서줘서 겨우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가 바로 이 크라수스. 이 엄청난 빚도 카이사르가 탕아 정도로 취급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는데, 이 시절 선거는 돈으로 승부를 보는 경향이 강했고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해서 빚을 졌다고 탕아 취급을 받았다는 건 조금 어폐가 있다. 당장 위에서 나온 카틸리나만 해도 카이사르보다 훨씬 많은 돈을 빚지기도 했고.[27] 소규모 개선식. 나중에 갈리아 정벌과 이집트 정복(실은 카이사르의 내전의 종식)으로 대개선식의 숙원을 풀었다. 그러나 저때에는 같은 로마인을 상대로 싸운 걸 가지고 개선식을 한다고 로마 시민들이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28] 개선식은 개인에게 비할 데 없는 엄청난 영예였다.[29] 술라에 협력한 후 반대파 자산 매입 등으로 엄청난 거부가 되었으나, 군공은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정도로 폼페이우스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30] 특히 고대 로마에서는 선거 운동을 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FA컵이나 가을야구를 자기 이름으로 개최하고 대진료와 상금을 자기 재산으로 지급할 수 있어야 했으며 선거 운동도 길거리에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잡아다 '아무개씨, 요즘 장사잘되시죠? 제가 집정관 되면 무역 법을 제정하려는데 아무개씨의 사업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지지를 부탁합니다' 식이었다. 물론 길거리의 모든 시민들을 알 리가 없으니 그들의 사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야 했는데 이 비용도 굉장했다. 사실 이런 것들 뿐 아니라 실제로 유권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고 놀랍게도 이는 불법이 아니었다.[31] 특히 농지법은 폼페이우스가 강렬히 통과되기 위한 법안이었는데 폼페이우스의 전역병들에게 토지 분배를 위해서는 필수였고 이는 민중파의 지도자로써 그라쿠스 형제 이래 실패 해온 농지개혁을 성공시켜야 하는 것은 카이사르의 제일 우선 목표였다.[32] 다만 이것만으로도 난이도는 굉장히 높았다. 당시 로마 원로원이 타협할 수 있는 최대한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도 당시 원로원이 삼두에 밀렸고 로마인들의 지지도 빋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야 할 듯.[33] 단순히 점괘를 언급한 건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로마인들도 다른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꽤 미신적인 전통이 있었다. 문제는 민회가 열린 그날은 길흉을 판단하는 최고 권위자인 공화국의 최고 제사장이 택한 길일이라는 점이었고, 그 최고 제사장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위에서도 서술했듯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기 훨씬 전부터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최고 제사장으로 선출되었고, 이 지위는 종신직이라 이때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34] 공화정 로마에서는 두 집정관 중 1명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회나 원로원에서 통과된 법안도 실행할 수 없었다.[35] 후대 "황제"들은 악타를 새 정책들을 공표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다만,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공개로 돌리는 등 언론 통제를 하기도 하였다.[36] 이 예납제는 징세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던 기사 계급들의 고충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미리 정부에 낸 세금보다 적은 양이 수취되어 징세업자들이 손해를 볼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마구 징세하다간 현지인들의 불만이 폭발해 로마 정부에 고발이 들어가거나, 극단적으로 폭동이 일어나거나 할 경우 그 책임을 옴팡지게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때문에 기사 계급을 대표하던 크라수스는 이 예납제가 폐지되면 징세업자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과도한 세금 수취의 필요가 없으니 속주민들에게도 더 좋다는 논리로 이 법안의 통과를 요구해왔다.[37] 내전에 승리한 이후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속주민들에게도 라틴 시민권을 주고, 로마에서 온 세리나 총독이 세금을 거두는 대신에 속주들이 원하는 만큼 알아서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게 바치는 시스템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이 법안이 원로원에서 논의 중이던 상황에서 암살당했다.[38] 단 비불루스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것은 카이사르가 입안한 농지개혁법에 무조건적인 반대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비불루스가 사악한 카이사르에 의해 무고한 피해를 입은 선량한 정치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때 비불루스가 한 짓은 아무리 좋게 봐도 치졸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카이사르가 공개적으로 이 법안에 대해서 동료 집정관인 비불루스에게 지지를 요청하고 반대한다면 왜 반대하는지 토론해보자고 했는데, 비불루스는 이 농지법에 대해서 반박은 못하고, 자신의 임기 동안에는 어떠한 개혁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민회에서는 호민관 3명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여서 계속 투표를 방해했다. 나중에는 카이사르를 상대로 암살자까지 보냈다가, 덜미가 잡혀 군중에게 강하게 비난을 받고, 농지법을 반대할 변명들이 다 없어지자 비불루스는 집안에 틀어박혀서 종교적인 이유로 카이사르의 법안 통과를 방해한다.[39] 대략 지금의 프랑스[40] 사실 가정이라고 할 것도 없이 헬베티 족은 주기적으로 자기들이 살던 곳에서 나와서 깽판을 쳤으니 이런 추측이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민족 이동이었으므로 그 낌새를 발견하기도 쉬웠다.[41] 현대의 서북부 발칸반도, 즉 아드리아 해 연안에 해당한다. 거의 구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라고 보면 된다.[42] 루비콘강 이북, 알프스산맥 이남의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해당한다.[43]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 남부지방에 해당한다.[44] 물론 이건 카이사르가 단순히 정복욕때문에 필요없는 짓을 벌인 건 아니고 애시당초 갈리아에서는 걸핏하면 분쟁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유탄을 라틴 인들이 맞는 경우가 상당히 자주 있었기 때문에 예방전쟁인 측면이 컸다. 갈리아 총독의 주 임무 자체가 원래 갈리아 인들을 다독여 이런 사태를 막는 것이기도 하고. 거기다 후술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헬베티 족이 갈리아에 처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부임이 그만큼 쉬웠다. 로마인 입장에서 보면 야만인들이 전쟁을 벌이는 땅에 아무도 가고 싶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45] 라틴어로 옛 스위스 지방 사람을 가리키는 말. 현재 스위스에는 독일어, 프랑스어권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어느 한쪽 언어만으로 국명을 지정할 수가 없어서 중립적으로 라틴어명을 사용하다 보니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단어이다. 교양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나오는데 스위스의 영어 약자는 S도 Sw도 아닌 CH로 이는 라틴어 명칭인 Confoederatio Helvetia에서 나온 것이다. 참고로 S는 스페인, Sw는 스웨덴이다.[46]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갔다가 사망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의 회유에 넘어가 버렸다.[47] 실제로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에서 살육했다라고 언급한다.[48]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숫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카이사르의 전력을 앝잡아 본 것이었다면 애초에 왜 청야전술을 썼던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그가 카이사르를 게르고비아에서 패배시킨 것으로 베르킨게토릭스의 군사적 재능이 상당히 높이 평가되는 게 일반적이나 이러한 판단 미스를 하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이는 과대평가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고대국가와 부족제 집단의 차이점이 중앙집권화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로 구분하는 걸 생각해보자. 베르킨게토릭스는 부족이 그다지 힘이 없었고 초기엔 다른 부족의 압력에 못 이겨 그의 뜻을 온전히 펼 수 없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부족들이 그의 뜻을 따른 것이지 상황이 다시 유리해진 상황에서 그들이 그에게 어떠한 압력을 가했을지도 고려해보아야 한다.[49] 사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은 중세 시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물론 플레이트 갑주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완전무장은 주로 기사계급이나 할 수 있었고 일개 병졸들이 그 정도의 갑주를 갖추는 것은 드물었다.[50] 애초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술라의 반란 때도 자비로 군사를 모아 함께 했던 보수파였다.[51] 공화정 말기에는 귀족 집안이 거의 사라지고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귀족 가문이라는 출신 성분이 도움이 되지 않았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52] 영화(대부 등) 속 마피아 두목의 카리스마와 인망을 생각하면 편하다. 어차피 비슷하기도 하고, 실제로 심지어 일각에서는 고대 로마의 정치 체계나 현대 이탈리아 시골의 마피아 체계나 별 다를 바 없다고 평하기도 한다.[53] 애초에 그는 크라수스의 피호민이었다.[54] 애초에 이런 막대한 지휘권과 많은 속주를 준 이유도 카이사르가 크라수스랑 폼페이우스를 보호자들로 두고 있으니 싸우기 싫고, 어차피 능력 있는 놈이니 폼페이우스처럼 해먹고 알아서 군대를 해산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55] 다만 소 카토가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는데 괜히 전면전을 카이사르에게 강요했다고 폼페이우스를 욕하고 튄 걸 보면 이 이너 서클에서도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56]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일원으로서 이전부터 꾸준히, 자문기관에 불과한 원로원이 자기네 정적을 처벌할 목적으로 발동하는 최종 권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57] 애초에 원로원 최종 권고는 구체적인 성문법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집정관, 호민관 등이 원로원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작동되는 원리였다. 그게 어느새 초법적인 조치이자 원로원의 무소불위 권리처럼 변질된 것이다.[58] 카이사르 암살 당시 명분은 독재자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원로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카이사르와 차이점이라면 권력이 카이사르 한 사람에게 몰리냐, 원로원에게 몰리냐 차이다. 현대인의 시야에서 보면 그냥 권력 투쟁일 뿐이다.[59]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시절에는 이게 맞는 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리카누스에게도 카르타고에서 로마까지 혼자서 오라는 몰상식한 말따윈 하지도 않았고. 원로원은 아프리카누스를 견제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상식 내였고 무엇보다 당시 아프리카누스는 건강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60] 한마디로 위에서 나온 말은 로마 공화정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그 공화정 체제가 박살나 있었고 그걸 주도한 것 자체가 원로원이 한 일이었다.[61] 만약 여기서 로마가 갈리아 상황에 아무 대처도 하지 않았다면 헬베티족이 WAGHHHHH~~~~!!!를 외치며 갈리아 땅에 침범했을 테고 그러면 갈리아족은 이들에 쫒겨서 이탈리아 땅에 침입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당장 훈족의 서진으로 인해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에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62] 사실 초짜 정치가 지망생이 지식과 인맥을 쌓는 방법 중 하나이다.[63] 애시당초 카이사르는 민중파였기 때문에 항상 불리한 쪽이었고(카이사르가 정치를 시작할 때는 이미 술라가 한번 민중파를 쓸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원로원파로부터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자신의 행동은 반드시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원래 원로원파 출신들이 공화국의 전통을 파괴하고 법을 개무시하는 와중에서도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까지 카이사르는 불법적인 일을 벌인 적이 없었다.[64] 즉,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이 비장미를 띄는 이유는 물론 본격적으로 내전을 시작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 자체가 그의 인생 최초로 로마의 법을 어기는 행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65] 애시당초 총독의 원래 임기를 크게 벗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법인 것은 아니고 꼬박꼬박 로마에 임기 연장을 요청해서 허가를 받았던 것이다. 보통 로마에서는 전쟁같은 비상사태 시에는 임기가 있더라도 이를 연장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물론 그러려면 그만한 전과를 세웠어야 했고 그러지 않으면 로마에서 새로 사령관을 뽑아 현지로 보냈지만.[66] 애시당초 말이 좋아 총독직이지 실질적으로는 예방전쟁을 위한 원정군 사령관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아무나 보낼 수 없었던 것이고 당연히 총독직을 혼자서 10년이나 해먹었네라는 말이 어불성설인 이유이다. 사실상 정치와 전쟁 둘 다 수행하기 위해 총독직으로 간 거지 다른 총독들이 하는 것처럼 속주에서 돈이나 긁어모으라고 간 것이 아니니 그만한 임기동안 종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67] 원로원파가 민중파에게 항상 써먹는 마법의 말이 바로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는데 폼페이우스의 저 권한은 그야말로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준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걸 고작 해적이나 잡기 위해 준 것인 데다가 그 권한을 가지고 해적 소탕을 마치자 이번에는 전쟁을 하자고 선동하기까지 한다. 일단 일을 마쳤으면 권한을 반납한 다음 다시 한번 민회를 거치는 게 정상인데도.[68] 사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저 당시 폼페이우스는 로마에서 그 어떤 공직도 맡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거느린 군대는 사실 로마군이긴 했지만 동시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병집단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 시점에서 폼페이우스는 공직 경력도 없었고 또, 사령관에 임명될 나이도 되지 못했다.[69] 무엇보다 카이사르를 증오하는 골수 원로원파에서 만약 이 과정에서 불법이 포함되었다면 딴지를 걸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애시당초 민회에서 절차를 거쳐 안건을 통과시켰으니까 카이사르가 10년간 갈리아 총독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설령 정해진 임기가 있어도 민회에서 결의하면 충분히 합법일 수 있으니 원로원에서도 뭐라 하지 못한 것.[70] 그리고 카이사르에게 선고된 원로원 최종 권고의 내용도 어디까지나 카이사르가 집정관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군대를 두고 혼자서 로마에 와야 한다고 한 것이지 카이사르의 총독 및 그 업무, 기간 등과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없다.[71] 그리고 군대를 두고 혼자 와야 하는 거리가 이탈리아 경계선(루비콘 강)에서 로마까지다. 즉, 이 거리를 카이사르가 혼자 걸어오는 동안 암살하겠다는 소리다. 물론 원래 그런 규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였는데 그걸 갑자기 카이사르에 한정해서 부활시킨다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수작일 수밖에 없었다.[72] 카이사르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자신이 민중파임을 대중 앞에 확실하게 알렸다. 이로 인해 술라의 탄압을 피해 도망가기까지 했을 정도.[73] 이후 완전히 원로원파를 끝장내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하게 되므로 완전한 최종결전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이 내전으로 인해 (적어도 기존의)원로원파는 사실상 몰락하고 로마의 방향성이 정해졌다는 의미에서는 최종결전이 맞다.[74] 사실상 당시 카이사르에 필적할 만한 정치가는 원로원파에 존재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원로원파는 다들 고만고만했고 태생적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75] 당장 원로원파의 중심이자 우두머리가 폼페이우스였는데 일단 폼페이우스는 비교적 신참 가문 출신이었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두파로서 원로원파의 정적과도 같은 입장이었다. 자기네 파벌에서 우두머리를 내지 못 하고 정적 파벌에서 대표자를 데려와야 할 정도로 원로원파는 얼굴마담이 될 만한 인재가 없었던 것. 물론 폼페이우스는 자체 군사력도 있고 군사적 능력도 출중한 데다가 전공도 많아서 고작 얼굴마담만으로 끝날 정도로 위상이 낮지 않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76] 그리고 직전에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평정해 거대한 영토를 로마 권내에 편입시켰으므로 출마만 하면 당선은 사실상 따놓은 당상이었다.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영웅이니 당연한 일이었다.[77] 많은 전쟁사학자들은 폼페이우스군 기병대가 좁은 지역에 너무 많은 병력이 투입되면서 일종의 교통체증이 일어난 상황에서 카이사르의 창병들이 필룸을 꼬나들고 기병 돌격을 저지하자 서로 엉켜있던 뒤쪽 기병들 사이에서 앞열이 패한 것인가 하는 공포가 발생했고 공포가 전 기병대로 전염되며 스스로 와해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파르살루스 전투 이전 디라키움에서의 포위상황에서 폼페이우스가 바다를 통해 식량은 공급받았지만, 말들이 먹을 건초를 보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말들이 비실비실해서 패퇴했다는 설도 있다.[78]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고전,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필두로 수많은 저서들도 이러한 오류들이 있다.[79] 이때 기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소실되었는데, 도서관은 이후 클레오파트라가 페르가몬 등에서 책을 가져오는 등의 노력을 통해 다시 채워진다.[80] 현대에도 쓰이는 역법이다. 율리우스력처럼 4년마다 윤년을 두되 100년마다 윤년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로서 1년은 365.2425일이 되었고 지구의 공전주기와의 오차는 26초로 줄어들었다.[81] 다만, 율리우스력을 도입하면서 기존 달력의 오차를 수정하느라 기원전 46년은 445일이 되었다.[82] 대부호 크라수스가 이를 잘 이용해 먹었다. 그 덕에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83] 실제로는 기사계급과 호민관 위주로 구성되었다. 물론 그렇게 봐도 기존의 원로원 독점 상황에 비견해보면 양대 견제세력이 생긴 것이므로 보다 긍정적인 방향의 개혁이 맞았다. 현대라고 해서 밑바닥 노동자들이 생계를 버리면서까지 법을 공부하고 배심원으로 출석할 수 없는건 마찬가지이므로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84] 키케로와 바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투항했고 카토는 끝까지 맞서다 폼페이우스군이 패하자 자결했다. 카토의 조카였던 브루투스는 훗날 얼마없는 보수파를 결집하고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카토와 브루투스는 이후 공화정 복고파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카이사르의 관용에 다시 한번 공화정 복고파가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응답하자 2차 삼두정치 시기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이들을 뿌리채 뽑기로 결정하고 살생부와 내전을 통해 수천명의 공화정 복고파 인물들을 제거하고 옥타비아누스가 교묘한 제정 시스템인 원수정을 도입하면서 끝을 보게 된다. 즉 결국 카이사르가 평생 추구해온 관용의 정반대로 해결함으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대업을 완성시켰다.[85] 게다가 당시에는 방음이 잘되지 않았던 탓에 소음공해는 심했을 것이다.[86] 다만 이건 최고사령관에게 쓰이던 호칭으로 어디까지 합법이었다.[87]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암살의 주동자 카시우스이다. 카시우스는 카르헤 전투에서 패배해 박살난 크라수스의 패잔병을 긁어모아 동방 국경을 수호했고 주저없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했지만 카이사르는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88] 이 축제는 귀족이나 고급 정무관들이 무리를 지어 나체로 시내를 뛰어 다니면서 손에 든 채찍으로 아무나 때리는 행사였다. 이 때 이들의 매를 맞으면 임산부는 순산하고 석녀는 임신을 한다는 전설이 있었다.[89] 동양에도 이런 비슷한 이벤트가 있었다. 선양받을 때 3번 정도 거절하는 것이다. 이건 사실 공화정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안토니우스를 탄핵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고, 그런 위험한 일을 카이사르의 재가 없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카이사르도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면 자신이 왕이 될 욕심이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90] 당시 카이사르의 후계자 제 1 후보로 여겨진 안토니우스가 야심을 품고 카이사르의 명성을 떨어트리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가설도 있다. 이는 카이사르 암살을 안토니우스가 사전에 알고도 방기했다는 설과 잘 매치되므로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다. 컬린 맥컬로우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91] #[92] 특히 바실루스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몇줄 안 나온다. 그것도 암비오릭스를 죽이는 자객 같은 임무를 맡기는 걸로 보아 카이사르가 크게 신임하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바실루스는 키케로를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었다.[93] 갈리아 전쟁기를 보면 그를 젊은 브루투스라 칭하는 등 데키무스에 대한 카이사르의 애정을 알 수 있다.[94] 그것도 파비우스가 죽고 나서 임명된 보궐 집정관이었다.[95] 로마 최고위 관직인 집정관 당선 이력은 그 사람의 영향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96]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보다는 돌라벨라와 안토니우스가 더 두렵다고 안토니우스와 다소 거리를 둔 모습이 있다.[97] 신체불가침권(즉, 사형당하지 않을 권리)과 민회를 통한 법률 제정권, 그리고 원로원 의결 거부권.[98] 제1 시민. 쉽게 말해 '로마 시민 중 으뜸'이란 뜻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이렇게 불렸다.[99] 로마 원로원은 철저하게 발언권 순서로 위계질서를 명확히 했고 이를 공화정체 안에서의 전통과 자유로 봤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예전 원로원 분위기처럼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사용해 자신의 발언권을 관철하고 두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조카이자 사위 마르켈루스, 외손자 가이우스 가이사르, 손자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등에게 원로원 우선 발언권이라는 특권을 법으로 만들어 원로원이 부여하는 방법으로 카이사르 일가의 특권을 보장했다.[100] 서기 4세기 전까지 로마 원수정 시대로 불린 시대 동안 로마인과 원로원, 황제 모두 늘 자신들의 조국 로마를 공화국이라고 불렀다.[101] 서기 41년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은 기다렸다는 듯 집정관이 황제 개인 금고에서 돈을 다 빼돌렸고, 원로원은 계획대로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전의 공화정 복구를 선언하려고 카파톨리아 신전에 모였다. 하지만 황제파들은 아예 클라우디우스 쪽으로 가거나 베스파시아누스처럼 신전에 남아 공개적으로 "황제가 억울하게 시해됐다. 당장 복수하자는 결의부터 해라. 그리고 암살범들을 국법에 따라 기소해라"라며 따졌다. 그리고 이때 공화정 회귀론자들조차도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는데, 왜 공화정 복귀를 다시 해야 하느냐"라고 의문을 던지며 프린키파투스로 후대에 불린 국제를 왕정이나 제정이 아닌 공화정이라고 재확인했다.[102] 네로는 부모 양쪽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가문 피를 물려받았지만, 로마 기준으로는 먼 친척이면서도 외삼촌 칼리굴라 생전부터 상속권은 없는 정치적 남남으로 규정된 상태였다. 로마인들 기준으로 같은 집안이란 혈연상 6촌 이내였고, 귀족 가의 경우 외가의 가부장의 상속 연계 인지도 종종 요구됐다. 입양 후에도 장인이자 양부인 혈연상 외종조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아헤노바르부스로 불렸고, 외삼촌 칼리굴라는 네로가 태어난 이후 조카의 탄생을 축하함에도 일찌감치 그를 "남자 혈육이나 카이사르 가의 상속권이 없다"라며 제위 계승 가능성을 차단했다.[103] 재평가 이후에도 네로가 암군이자 폭군으로 재확정된 이유는 그가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근대 이후를 기준으로도 암군과 폭군에 부합했기 때문이다.[104] 정치적 능력만 따지자면 카이사르를 능가한다는 평가가 상당수다. 물론 군사적 능력은 젬병이라 하술할 아그리파, 그리고 아내 리비아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 군사 방면은 대부분 일임한다.[105] 자기 대신 군사 활동을 전담하던 친구 아그리파에게 딸까지 줘가면서 혈통을 이으려고 했다.[106] 그러나 위에 이미 서술되어 있다시피, 그 자신이 이미 불확실한 상태에서 권력 투쟁에 뛰어든 데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최고 권력자 지위를 설정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혈통보다 확실한 정통성 확립수단은 없었다. 어찌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107] 다만 티베리우스의 뒤는 자신의 후손과 혈연 관계가 있는 인물(게르마니쿠스)에게 돌아가도록, 결국 꼬이게 되기는 했지만 조치를 했다.[108] 술라의 독재관은 참 교묘한데 특정한 기간의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으나 비상시의 종결을 임기 종료로 정의한 독재관이다. 역설적으로 비상시를 기준으로 임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원로원에는 공화국 복원의 강력한 의지를 알리는 동시에 민중파에게는 절대권력을 가진 일인자임을 알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이다.[109] 혹은 카이사르에게 감옥에 갇혀있는 형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가 카이사르가 거절하자 옷자락을 잡았다고 한다.[110] 심지어 한 시민은 브루투스를 왕으로 만들자고 한다.[111] 이 과정에서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의 피 묻은 옷을 보여주면서 로마 시민들을 부추겼다고 하는 판본도 있다. 이원복이 감수하고 박흥용이 그림을 담당했던 계몽사의 학습 만화 세계사 로마편에서도 이 장면이 나온다.[112] 외할아버지가 폼페이우스의 고종사촌동생, 외할머니가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이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가 재혼해 일찍부터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 밑에서 자랐다.[113] 이 유언장에 따라, 이전까지 투리누스로 많이 불린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로마법상 가문을 상속받는 양자들의 개명 절차대로 '프라이노멘+노멘+코그노멘+입양 전 노멘-anus', 즉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114] 참고로 이때 카이사르의 유언장 공개 현장에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도 같이 있었고 유언장에 본인과 아들의 이름이 없자 짐을 싸서 이집트로 돌아갔다.[115] 참고: 위키피디아 카이사르 문서[116] 카이사르가 사망했던 로마 시절 당시에 핼리 혜성의 존재가 알려져 있던 건 아니었다. 핼리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는 한참 후대인 17~18세기경의 인물로, 75~6년마다 한 번씩 출현하는 핼리 혜성의 출현 주기와 기록을 확인해본 결과 카이사르의 장례 당시 나타난 혜성의 출현 날짜가 같았기 때문에 이 혜성이 핼리 혜성이었다고 규정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혜성은 한반도에서도 관측되었는데, 삼국사기 혁거세 거서간 재위 14년 음력 4월에 기록되어 있다.[117] 가장 큰 원인은 로마의 법적 주권자인 대다수 시민들이 부패와 타성에 찌든 구 원로원 체제의 복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들은 물론이고 기사 계급, 심지어 신참자 급 원로원 의원들까지도 마찬가지였기에 한 줌밖에 안 되는 암살파는 거의 즉시라고 해도 될만큼 순식간에 고립되어버린다. 게다가 키케로와 트레보니우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집정관급 임페리움도 못 부여받은 인물들인 데다(카이사르 암살로 유명해진 인물이 대다수였다) 카이사르와 대적하던 거물급 인사들은 대부분 사망하거나 은퇴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