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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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베르킨게토릭스의 본거지인 게르고비아[1]를 포위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패전한 유일한 전투다.
2. 배경
기원전 52년 4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27일간 이어진 아바리쿰 공방전 끝에 아바리쿰 수비대와 주민 4만 명을 몰살시키고 아바리쿰을 공략했다. 그는 이 성과로 자신에게 반기를 든 갈리아 연합군의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가 실각하길 바랐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일찍이 아바리쿰도 파괴하고 주민들을 이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제 자기 말대로 안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해 족장들의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을 6월 초까지 쉬게 해주면서, 앞으로 어찌할 지 고심했다.그러던 중 하이두이족이 부족장 선출 문제로 내부분열에 시달리자, 카이사르는 아직까지 자신을 지지하는 유일한 부족인 이들마저 떠나게 해서는 곤란하다고 여기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부족장으로 선출하기 위해 하이두이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콘빅톨리타비스를 족장으로 뽑게 한다. 그 뒤 하이두이족에게 그들이 가진 기병 전원과 1만 보병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하이두이족 문제를 해결하고 아바리쿰에 돌아온 카이사르는 병력을 양분해 티투스 라비에누스에게 4개 군단(제4 군단, 제6 군단, 제7 군단, 제12 군단)을 줘서 루테티아(파리)를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6개 군단(제8 군단, 제9 군단, 제10 군단, 제13 군단, 제15 군단, 폼페이우스로부터 빌린 1개 군단)을 거느리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부족인 아르베니족의 중심도시인 게르고비아로 진격했다.
로마군이 엘라베르 강의 오른쪽 둑을 따라 진군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강의 모든 다리를 파괴하고 강의 반대편에서 로마군과 평행하게 행진하도록 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밤에 횃불을 잔뜩 피워서 본군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위장한 뒤, 2개 군단을 극비리에 기동해 다리를 건너게 했다. 날이 밝으면서 로마군이 강을 건넌 걸 알게 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게르고비아로 철수했다. 카이사르가 곧장 그의 뒤를 쫓아가다가 게르고비아에 당도하면서 게르고비아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 지휘관: 율리우스 카이사르
- 병력: 6개 군단 25,000명
3.2. 갈리아군
- 지휘관: 베르킨게토릭스
- 병력: 30,000명.
4. 경과
강을 건넌 뒤 닷새간 행군한 끝에 게르고비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아바리쿰 공성전 때보다 훨씬 어려운 공성전이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게르고비아 시는 경사가 가파른 고지 위에 세워져 있었고, 습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도시 외곽에 베르킨게토릭스의 3만 군대가 강력한 진지를 형성한 채 버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짜고짜 공격했다간 막심한 피해를 입을 게 자명했고, 4개 군단을 라비에누스 지휘하에 루테티아로 보내뒀기 때문에 게르고비아의 적을 압도할 만한 병력을 갖추지도 못했다.카이사르는 적을 어찌 공략할지 고심하다가, 게르고비아 고지 주변에 흐르는 강 인근의 작은 언덕을 주목했다. 그곳을 점거한다면 적군이 물을 구하는 걸 막을 수 있었고, 인근의 농경지로부터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곳엔 일부 갈리아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2개 군단을 파견해 그들을 기습공격하게 했다. 2개 군단은 적을 쉽게 몰아낸 뒤 12피트 폭의 이중 참호를 파서 본진과 연결했다. 이렇게 해서 적이 수원을 구할 길이 막막하게 만들었으니, 이제 적이 약해지기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한편, 카이사르 덕분에 하이두이 족장으로 선출된 콘빅톨리타비스는 1만 보병과 다수의 기병을 리타비쿠스에게 맡겨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그런데 리타비쿠스는 도중에 병사들을 선동해 그들과 동행하던 로마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카이사르는 이 소식을 듣고 2개 군단을 숙영지에 남겨둔 뒤 4개 군단을 이끌고 리타비쿠스를 향해 진격했다. 하이두이족 장병들은 곧바로 항복했고, 리타비쿠스는 달아났다. 이 무렵 리타비쿠스로부터 로마군과 싸우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하이두이족은 그들 영역에 있던 로마인들을 대거 습격해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그러나 뒤이어 도착한 전령이 카이사르가 하이두이족 장병들을 제압하고 리타비쿠스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들은 태도를 바꿔 관련자를 처벌한 뒤 카이사르에게 해명 사절을 보냈다.
카이사르가 하이두이 기병 10,000명과 상당수의 보병을 이끌고 돌아와보니,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가 떠나면서 남긴 2개 군단을 압박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뒤, 강 인근의 또다른 고지에 새 진영을 세워서 수원 공급이 원활하게 했다. 상황이 이런데다 하이두이족이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니,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 공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병력을 철수하기로 했지만, 그냥 퇴각하면 자기가 베르킨게토릭스를 당할 수 없어 물러난다는 인상을 줄 걸 우려해 강력한 공격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준 뒤 후퇴하기로 했다.
우선 수비대의 주의를 분산시키기로 하고, 노새를 관리하는 이들을 말에 태워서 기수 행세로 하며 공격 나팔을 요란하게 불러서 강변 언덕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는 척하게 했다. 그런 후 1개 군단이 깃발을 들며 그쪽으로 진군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가 언덕을 공격하려고 이동하고 있다고 판단해 일부 병력만 본진에 남기고 본군을 통솔해 그곳으로 향했다. 카이사르는 적의 움직임을 보고 일이 잘 되고 있다고 여기고, 주력군에게 적의 본진을 돌파하고 성벽으로 접근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로마군은 남동쪽에서 게르고비아 시를 향해 진격해 단숨해 적의 3개 진영을 돌파하여 성벽 바로 앞까지 진격했다. 성벽 위에 있던 갈리아 수비대는 로마군의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퇴각 나팔을 불게 했다. 이에 절반 가까운 병력이 철수했지만, 나머지는 성벽을 타고 올라가 도시를 공략하려 했다. 그들이 소음 때문에 퇴각 나팔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성벽 위의 적군이 혼란에 빠진 걸 보고 잘만 하면 도시를 공략할 수 있다고 믿고 퇴각 신호를 무시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려 했지만, 사다리를 사전에 준비하지 않아서 그럴 수 없었다. 하이두이족이 지원을 위해 후방에 이르자, 로마인들은 그들을 적으로 오인하고 공격했다. 이로 인해 공격부대는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 언덕을 지키러 이동하던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이 성벽을 기어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기병대를 이끌고 게르고비아로 돌진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다. 이후 갈리아 보병대가 도착해 로마군을 에워싸기 시작하자, 로마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도주했다. 갈리아인들은 이들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쳐죽였지만, 10군단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후방에서 굳건히 버티고 티투스 섹스티우스가 파견한 제13군단의 몇몇 코호트들이 10군단을 지원하자 추격을 중단하고 도시로 물러났다. 카이사르는 이날 전투에서 백인대장 46명이 죽고 병사 700 여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적어도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을 것으로 간주한다. 카이사르는 전투의 열기에 취해 명령을 무시한 장병들을 호되게 질책한 뒤 게르고비아에서 철수했다.
5. 이후
카이사르가 직접 이끄는 로마군이 게르고비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 갈리아에 퍼지자, 모든 갈리아족이 로마군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다. 급기야 그동안 카이사르를 돕던 하이두이족 마저 베르킨게토릭스와 손을 잡았다. 카이사르는 일단 루테티아로 진군했던 라비에누스의 4개 군단과 합세한 뒤,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가까운 세콰니 족의 영역으로 진군해 그들을 제압한 뒤, 키살피나 속주에서 모집한 병력으로 갈리아를 공격하기로 했다.한편, 베르킨게토릭스는 각 부족으로부터 병력을 추가로 확보하여 상당한 대군을 갖추었다. 그는 이에 자신감을 품고, 부관들에게 "로마군이 군수품을 수송하며 퇴각하는 지금이 바로 공격하기 적합한 때다. 로마군은 군수품을 지키기 위해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지금 쳐부수지 않으면 로마군은 내년에 다시 강해져서 돌아올 것이다."라며 곧바로 추격했다.[2] 그러나 카이사르는 빈게네 전투에서 갈리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8만여 병력을 수습해 알레시아 시로 퇴각했다. 카이사르가 즉시 그들을 추격하여 알레시아 시를 포위하면서, 갈리아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알레시아 전투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