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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22:49:22

공포정치

1. 개요2. 명칭3.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
3.1. 배경3.2. 공포정치의 시작3.3. 몰락
4. 목록
4.1. 아시아
4.1.1. 한국
4.1.1.1.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4.1.1.2. 고려4.1.1.3. 조선4.1.1.4. 근현대
4.1.2. 중국4.1.3. 일본4.1.4. 몽골4.1.5. 동남아시아4.1.6. 중동4.1.7. 중앙아시아
4.2. 유럽
4.2.1. 로마 제국4.2.2. 영국4.2.3. 프랑스4.2.4. 독일4.2.5. 스페인4.2.6. 알바니아4.2.7. 루마니아4.2.8. 체코슬로바키아4.2.9. 그리스4.2.10. 러시아
4.3. 북아메리카4.4. 남아메리카4.5. 아프리카
4.5.1. 우간다
5. 가공의 공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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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포정치()란, '공포'정치라는 이름대로 대중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정치형태로, 프랑스 혁명 직후 로베스피에르를 위시한 자코뱅파가 반대파에게 처형이나 고문 등의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탄압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서는 'La Terreur'라고 하면 공포정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집권했던 시기를 일컫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폭력적인 정치형태는 바로 공포주의, 즉 테러리즘이라는 파생어로 나왔다.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테러의 목적은 바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함으로서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야기하고 대중을 움직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 공포정치는 종이 한 장 차이며, 실제로 서구권 언어에서는 테러리즘이라는 말이 공포주의와 공포정치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독재정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너도 내 말 안 듣고 저랬다가는 쟤처럼 우리한테 당한다."고 위협하기 위한 것이다. 왕조시대에는 공포정치라는 용어만 없었을 뿐, 이런 수법을 이용해 왕권강화를 달성하였다. 군부독재 시절 대한민국도 그러했고, 아직도 많은 나라들이 이런 정치를 시행 중이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 왕권 강화를 하여 국가를 하나로 단결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던 명군도 있지만 드문 편이고, 대부분은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듯이 폭정으로 이어지고 국가를 혼란스럽게 했다.

2. 명칭

중국어 [ruby(恐, ruby=kǒng)][ruby(怖, ruby=bù)][ruby(政, ruby=zhèng)][ruby(治, ruby=zhì)][콩뿌정치]
일본어 [ruby(恐, ruby=きょう)][ruby(怖, ruby=ふ)][ruby(政, ruby=せい)][ruby(治, ruby=じ)][쿄후세이지]
영어 terrorism, reign of terror, fearocracy
프랑스어 politique de la terreur, La Terreur
terrorisme (남성) / terreur (여성)[1]
스페인어 el Terror
terror, terrorismo (남성)
독일어 Terror, Terrorịsmus (남성)
Schreckensherrschaft (여성)
러시아어 поли́тика запу́гивания
Эпоха террора
아랍어 عهد الإرهاب

3.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

3.1. 배경

공포정치를 이해하자면 먼저 프랑스 혁명 당시 여러 파벌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입법의회 당시에는 왕정을 지지하던 왕당파입헌군주제를 지지하던 푀양파가 우파였고, 공화주의자였던 지롱드당자코뱅은 좌파로 분류되었다.

1792년 9월 10일, 프랑스 제1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왕정 하에 있던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수립되었다. 입법의회 때 우파였던 당파는 축출되고 좌파였던 공화주의자만이 남았는데, 그 안에서도 강경 공화주의자와 온건 공화주의자로 나뉘었다. 온건파는 지롱드당을 계승해 우파가 되었고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다.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강경좌파는 몽테뉴파를 결성했는데 몽테뉴파는 사회민주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이후 루이 16세의 처리를 두고 지롱드당은 처형을 반대했고, 몽테뉴파는 처형해야 한다고 하면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몽테뉴파는 자코뱅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시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몽테뉴파의 뜻대로 처형되었고, 혁명은 점점 과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지롱드당의 입지는 점점 줄어든다.

이 과정에서 지롱드 계열의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 장군은 정변을 기도했고 이것도 발각되자 해외로 망명하면서 지롱드당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2] 결국 지롱드당은 국민공회 안에 "12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몽테뉴파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1793년 3월 10일, 혁명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이 혁명재판소는 일반 법원에 비해 권한이 크고 강력했으며, 항소조차 할 수 없었다.

3월 21일부터 4월 2일 사이에 몽테뉴파는 각 자치 단체에 혁명반대파 단속을 위한 감시위원회를 설치하고, 9명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의 설치를 결의했다. 확실히 지롱드당을 노린 것이다. 4월 5일에는 몽테뉴파를 중심으로 한 공안위원회가 발족함과 동시에 혁명재판소의 첫 재판이 열렸다.

1794년 5월 말부터 로베스피에르는 군중을 선동해 지롱드당을 축출하려 했으며 각 지역의 코뮌, 시민군과 결탁하여 5월 31일부터는 각 지역에서 지롱드당 인사들의 추방이 실행되었다. 1793년 5월 31일 봉기가 일어나 무장군중은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지롱드당을 위협했다. 의원들은 도망가려다 미처 피하지 못했고, 6월 2일에 지롱드당 29명과 총리 2명을 체포하여 죽이게 되었다. 하루 전인 6월 1일에는 지롱드의 주요 인물인 롤랑 부인도 체포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을 위시한 몽테뉴파가 지롱드당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공안위원회는 사실상 국민공회를 대체할 혁명정부 통치기구가 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를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라는 '자유전정'을 혁명정부의 모토로 삼았는데, 오늘날 테러리즘의 기조와 비슷하다.

이후에도 각지의 지롱드파가 산발적인 봉기를 일으켰고, 7월 13일에는 몽테뉴파의 주축이었던 장폴 마라가 지롱드파 지지자인 코르테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로베스피에르는 "방종한 자유의 폐기"를 선언하면서 자신이 공안위원회 의장을 맡았는데 이때부터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3.2. 공포정치의 시작

"아!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할 것인가?"
롤랑 부인[3]이 처형 직전 남긴 말.
몽테뉴파는 혁명재판소를 통해 혁명 반대파는 물론이고 심지어 온건파들까지 제거했고, 이렇게 죽어나간 사람이 파리에서만 1,400명, 프랑스 전국에서는 2만여 명이나 되었다.

거기다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는 1794년 6월 10일에는 프레리알 22일 법을 제정하여 안 그래도 강력했던 혁명재판소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고 사법 절차를 간소화했는데, 체포되면 바로 재판으로 넘겨져서 증거 없이도 배심원 심증만으로도 유죄를 만들어 바로 처형하는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법을 만들어서 독재를 했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법이냐면, 시민들이 보기에 혁명 반대파다 싶으면 시민들이 그냥 잡아서 재판소로 끌고 가며 처형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인민재판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4] 그리고 이 법의 판결은 징역 없이 모두 사형이다.

프레리알 22일 법이 제정된 1794년 6월 10일부터 사법 절차가 간소화되자 그야말로 제거 속도도 빨라져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죽어나갔다. 파리혁명법원이 설립된 1793년 4월 3일부터 1794년 6월 10일까지 1년 2개월 동안 1,251명이 사형을 언도 받았는데, 이 법이 통과된 지 불과 1개월 반 만에 무려 1,376명이 사형을 언도받았다.[5]

3.3. 몰락

공포정치를 이끌어오던 자코뱅파 안에서도 갈등이 일어나 자기네들끼리 혁명재판소를 이용하여 서로 죽이고 죽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자코뱅파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유를 표방하며 나온 혁명정부였지만 거의 모든 과도정부가 그러하듯 실제로는 독재정권이 되어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였다. 특히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여 음주와 흡연은 물론이고, 카드놀이, 도박, 투우, 투견, 경마 등의 오락을 일체 금지시키고, 성매매와 자유성애까지 엄격히 단속하여 성매매를 한 여성은 잡아다가 교화한다며 감옥에 가두었고, 남자는 벌금과 구류형에 처했다.[6] 거기다가 집시와 점술 등에 대해서도 미신을 조장한다며 금지했다.[7]

로베스피에르의 밥 먹듯 일어나는 숙청과 문화 통제의 갑갑한 생활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은 점점 싫증을 내며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로베스피에르와 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하락했고 나중에가면 증오를 받았다.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하고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공포정치도 이로써 막을 내린다.

4. 목록

대체로 폭군, 독재자와 겹친다.

4.1. 아시아

4.1.1. 한국

4.1.1.1.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4.1.1.2. 고려
4.1.1.3. 조선
4.1.1.4. 근현대

4.1.2. 중국

4.1.3. 일본

4.1.4. 몽골

4.1.5. 동남아시아

4.1.6. 중동

4.1.7. 중앙아시아

4.2. 유럽

4.2.1. 로마 제국

4.2.2. 영국

4.2.3. 프랑스

4.2.4. 독일

4.2.5. 스페인

4.2.6. 알바니아

4.2.7. 루마니아

4.2.8. 체코슬로바키아

4.2.9. 그리스

4.2.10. 러시아

4.3. 북아메리카

4.4. 남아메리카

4.5. 아프리카

4.5.1. 우간다

5. 가공의 공포정치


[1] 프랑스어에서 "Terreur"는 우리가 생각하는 테러가 아니다. 프랑스어에서 "Terreur"는 곧 공포로 일반명사인 "Peur"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테러는 "L'attentat terroiste"이다.[2] 이후 뒤무리에는 나폴레옹 1세 즉위후 왕당파로 전향한다.[3] 마리잔 "마농" 롤랑 드 라 플라티에르. 장마리 내무장관의 아내. 남편보다 20살 어리고, 로베스피에르보다 5살 많다. 뛰어난 정치력과 지적 능력으로 프랑스 혁명기에 족적을 남긴 여걸.[4] 사실 혁명 혹은 쿠데타처럼 사회가 한 번 뒤집어지고 난 후의 과도기에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강경 성향의 혁명정부가 일어나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당장 한국도 5.16 군사정변 이후 일어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도 여러 개의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이런 시국에 춤 추거나 하는 문란행위하면 사형' 같은 법을 만들기도 했다.[5] 이렇게 숙청된 사람 중에는 라부아지에도 있었다.[6] 이는 로베스피에르가 엄격한 성격이라서 방탕한 생활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 국민을 자신처럼 극도의 금욕주의로 살게 했다는 얘기다. 향락적인 프랑스인들한테 그런 걸 금지시키니 실각하지.[7] 참고로 이런 식으로 일반 국민들의 사생활까지 통제하며 공포를 통한 억압으로 짓누른 정치를 한 사람이 150년 전 옆나라에도 있었는데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다. 심지어 국왕의 목을 자른 것까지 똑같다. 다만 이쪽은 본인이 군사 지휘관이고 유능했던 것도 있어 평생 독재자로 살다가 죽고 나서야 시체가 조리돌림당하며 몰락했다.[8] 특히 전두환 시기에는 5.18 학살이 일어나는 등 전보다 더 심하게 탄압했다.[9] 투표권을 포함한 참정권 위반. 국민의 주권을 침해하였다.[10] 이는 반공권 최악의 학살자로 꼽히나 정작 내치에서는 그렇게까지 심한 폭정을 저지르지는 않은 수하르토와 비슷하다. 물론 후기에도 경향신문 강제 폐간이나 진보당 사건같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11] 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12] 물론 여자의 몸으로 유교적 가부장제가 강한 거대 중화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얕보이면 안 된다는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13] 칼리굴라[14] 또는 Ivan[15] 반면 차기 여제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는 평가가 내려갔다.[16] 예로, 폴란드어를 금지시키고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이 시대를 산 퀴리 부인의 증언으로는, 수업 중 러시아 장학사가 갑자기 들이닥쳐 러시아어 테스트를 하고 학생이 잘 못하면 교사를 갈궜다고 한다. 실제로 퀴리 부인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좋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