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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00:07:18

사법살인

1. 개요2. 부작용3. 대표 사례
3.1. 아시아
3.1.1. 한반도
3.1.1.1. 고대3.1.1.2. 고려3.1.1.3. 조선3.1.1.4. 미군정3.1.1.5. 대한민국3.1.1.6. 북한
3.1.2. 중국
3.1.2.1. 춘추전국시대3.1.2.2. 진나라3.1.2.3. 전한3.1.2.4. 후한3.1.2.5. 서진3.1.2.6. 남북조시대3.1.2.7. 당나라3.1.2.8. 송나라3.1.2.9. 명나라3.1.2.10. 청나라3.1.2.11. 중화민국3.1.2.12. 중화인민공화국
3.1.3. 일본
3.1.3.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3.1.3.2. 에도 시대3.1.3.3. 일본 제국
3.1.4. 베트남3.1.5. 미얀마3.1.6. 고대 이스라엘3.1.7. 오스만 제국3.1.8. 사우디아라비아3.1.9. 이라크3.1.10. 이란
3.2. 유럽
3.2.1. 그리스, 이탈리아, 바티칸
3.2.1.1. 고대 그리스3.2.1.2. 로마 공화국3.2.1.3. 로마 제국3.2.1.4. 교황령3.2.1.5. 파시스트 이탈리아
3.2.2. 영국3.2.3. 아일랜드3.2.4. 프랑스
3.2.4.1. 프랑스 왕국3.2.4.2. 프랑스 혁명기
3.2.5. 독일3.2.6. 헝가리3.2.7. 체코슬로바키아3.2.8. 소련
3.3. 아메리카
3.3.1. 미국
3.3.1.1. 식민지 시대3.3.1.2. 독립 이후
3.3.2. 쿠바
3.4. 아프리카
3.4.1. 기니3.4.2. 적도 기니
4. 관련 문서

1. 개요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신념 때문에 사형을 당하거나 투옥되어서는 안 된다."
밀라다 호라코바[1]

司法殺人 / Judicial murder / Justizmord

죄가 없음에도 조작된 증거를 이용하여 법률에 따른 사형선고 및 사형집행을 이끌어내서 생명을 빼앗거나 유죄 선고[2]를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행위[3]를 의미한다.

법치주의 개념이 확립된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어렵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권력을 가진 인간들은 학살이나 살인같은 무식한 방법보다 자기에게 유리한 법령 등을 제정하거나 증거를 조작하여 유죄판결을 내려서 죽이는 방식을 사용했다. 현대에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진보당 사건 등 사법살인으로 볼 수 있을법한 사건[4]들이 많이 일어난다.[5]

2. 부작용

얼핏 보면 정적 제거에는 굉장히 효과가 좋은 방법이다.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수사기록 및 사법기록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겉보기엔 수사기관이 경찰권과 검찰권을 행사하여 혐의에 대한 증거를 수집한 것처럼 보이고[6] 법원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피고인의 항변 및 피고인이 제출한 자료와 검찰이 제출한 자료와 항변을 두루 조사해본 결과 판사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범죄의 구성요건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하여 유죄판결을 하였고 끝내 이를 재심 등으로 뒤집지 못하여 사형집행이나 유죄판결이 확정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설사 수사기록 및 사법기록에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부분이 있어도 발견하지 못하거나 발견하더라도 애써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7]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보면 사법살인을 당한 피해자나 유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에 말이라도 진지하게 경청해주고 관심 가져주기보단 판결에 불만 있고 너가 증거가 확실하면 재심하면 되지 라는 비아냥만 돌아올 가능성이 높기에 피해자에겐 오히려 2차 가해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결국 이를 정리해보면 판결문과 관련 기록들이 부여하는 공신력과 수사기관, 사법기관이 갖는 권위 때문에 판결을 포함한 공기록의 오류와 증거의 위변조를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적 제거에는 굉장히 효과가 좋은 방법이다.[8]

설사 사형을 통하여 피해자를 굳이 죽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번 유죄선고를 받은 이상 교도소에서 사건사고를 일으키면 누범 등의 법률적 단서에 따라 사형을 이끌어낼 수도 있고 이 경우 사법살인의 피해자가 직접적으로 죽게된 원인은 사법살인 대상사건이 이와 별개의 사건에 의하여 형성된 사형선고라는 외형을 갖추게 되므로 피해자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피할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유죄판결을 통해 대상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이미지를 왜곡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사법살인 대상의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게끔 만들려는 불법적인 목적은 달성할 수 있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측근과 가족에게 까지도 오명까지 뒤집어 씌워 매장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법살인은 정적 제거에 역사적으로 자주 애용되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사법살인 역시 허점은 있는데 사법시스템을 통하여 살인을 하려면 최소한 유죄의 증거를 위조하고 절차적 하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허점이 존재하며 이러한 허점을 공신력이라는 포장지로 감춰놓은 것에 불과하다.[9] 만약에 역으로 정적 또는 정적의 유가족, 후손, 친구, 지인, 내부고발자 등이 추후 진실을 밝히게 될 경우 정적 제거를 하려고 시도한 본인을 포함하여 그 나라 정부 내지는 사법질서에 대한 불신감을 안겨주는 등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법살인을 저지른 국가에는 연좌제가 법률적으로 혹은 사회적[10]으로 만연해있었다.

정치인이나 공무원, 사인 등이 문서 등을 위조하거나 전자기록을 위변조하고 이를 지휘, 교사하여 명예를 실추시키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경우 형사처벌은 물론[11] 피해자나 피해자의 유족에게 국가 또는 개인이 배상을 해야 한다. 또한 정적에게 단순히 명예를 실추시키고 이미지를 왜곡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경우를 넘어서서 정적의 생명권을 침해한 경우 법률과 사형제를 악용하여 살인하였다는 비난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형 폐지론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12]

당장 사형제 폐지국들 중에 기존의 선진국이 아니면서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형 집행을 장기적으로 정지, 보류, 유예하거나 폐지한 국가는 인권을 존중하는 모범적인 국가가 아닌 사법살인 경력이 있는 나라들이다[13] 또한 이런 사법살인이 다른 나라에 널리 알려지면 사법살인이 일어나는 국가의 이미지가 추락하여 외교상의 불이익이나 불이익이 없다고 할 지라도 나라 망신이 되기도 한다.[14]

사법살인에 대하여 일반인의 상식으로 봤을 때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존재하는데 사법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그 나라에도 법률과 사법체계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법살인 피해자가 범죄자라는 것을 선동하여야 할 수단으로 언론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만일 그 나라에 외신기자들이 있을 경우 그 나라의 법률전문가들로부터 잘못된 법률자문을 받아서 사법살인을 강행하였고 이를 외신기자들이 인지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다른 나라에게도 쉽게 알려질 우려가 크기도 하다. 그래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전두환이 외신기자를 철저하게 통제, 검열하고 있었기도 하다.

다만 정적을 형식적인 재판을 거치게 한 뒤에야 죽일 수 있다는 절차상의 번거로움 및 위에서 서술했던 유죄의 증거를 조작해야 한다는 리스크 때문에 세계적으로 보면 독재국가들은 정적들을 살해할 때 형식적인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살해하는 초법적 살인이나 즉결처분, 그조차도 부담스러운 경우 일단 수용소 등으로 끌고 간 뒤 죽으면 실종, 의문사로 처리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으며,[15] 이 때문에 사법살인은 사법살인 피해자들도 어느정도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 있고,[16] 초법적 살인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들킬 우려가 높은 경우에 한정하여 사용하지 주된 정적 탄압 방법으로 쓴 독재국가는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17] 이후 사법살인 위주로 정적을 탄압한 국가는 대개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은 냉전 초기 동유럽 국가들[18]과 이슬람권 국가들[19]이다. 박정희 시기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보면 특이한 케이스인 셈.

사법살인은 어디까지나 법률 영향이 미치는 자국에 사법살인 대상자가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기에 망명 등으로 정적이 국외에 있는 경우 사용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궐석재판 형식으로 정적의 명예를 훼손하는 방법을 쓸 수는 있으나 이는 국내용 여론조작 시도에 불과할 뿐 해외에 있는 당사자의 입을 막을 수도, 외국의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 수도 없으며 심지어 궐석재판으로 형성된 판결문의 효력은 대부분 부인된다.

따라서 사법살인의 가해자는 자신이 제거할 정적이 해외에 있는 경우에는 국내에 있는 정적의 가족이나 지인 등의 생명을 볼모로 협박하여 입을 막거나 이조차도 먹히지 않을 경우 초법적 살인의 연장선인 암살을 시도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김형욱 실종 사건이나 러시아 푸틴 정권의 방사능 홍차,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김정남 피살 사건이 해외에 있는 정적을 암살을 통해 제거한 대표 사례다.

3. 대표 사례

사법살인을 당한 인물과 사법살인의 배후 순서다.

사실 전근대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법살인이 너무 많아서 사법살인과 사법살인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때문에 누가 봐도 확실한 사법살인이 아닌 이상 애매한 케이스는 출처 요망.

3.1. 아시아

3.1.1. 한반도

3.1.1.1. 고대
3.1.1.2. 고려
3.1.1.3. 조선
3.1.1.4. 미군정
3.1.1.5. 대한민국
3.1.1.6. 북한

3.1.2. 중국

3.1.2.1. 춘추전국시대
3.1.2.2. 진나라
3.1.2.3. 전한
3.1.2.4. 후한
3.1.2.5. 서진
3.1.2.6. 남북조시대
3.1.2.7. 당나라
3.1.2.8. 송나라
3.1.2.9. 명나라
3.1.2.10. 청나라
3.1.2.11. 중화민국
3.1.2.12. 중화인민공화국

3.1.3. 일본

3.1.3.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3.1.3.2. 에도 시대
3.1.3.3. 일본 제국

3.1.4. 베트남

3.1.5. 미얀마

3.1.6. 고대 이스라엘

3.1.7. 오스만 제국

3.1.8. 사우디아라비아

3.1.9. 이라크

3.1.10. 이란

3.2. 유럽

3.2.1. 그리스, 이탈리아, 바티칸

3.2.1.1. 고대 그리스
3.2.1.2. 로마 공화국
3.2.1.3. 로마 제국
3.2.1.4. 교황령
3.2.1.5. 파시스트 이탈리아

3.2.2. 영국

3.2.3. 아일랜드

3.2.4. 프랑스

3.2.4.1. 프랑스 왕국
3.2.4.2. 프랑스 혁명기

3.2.5. 독일

3.2.6. 헝가리

3.2.7. 체코슬로바키아

3.2.8. 소련

3.3. 아메리카

3.3.1. 미국

3.3.1.1. 식민지 시대
3.3.1.2. 독립 이후

3.3.2. 쿠바

3.4. 아프리카

3.4.1. 기니

3.4.2. 적도 기니

4. 관련 문서


[1] Milada Horáková, 1901~1950,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운동가, 반공주의 여성 정치인. 그녀는 고문을 통한 자백을 바탕으로 서방의 간첩,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1950년 6월 27일에 처형되었다.[2] 사형선고 뿐만 아니라 무기징역이나 유기징역 선고라고 할 지라도 유죄선고가 발생할 경우 교도소에서 사건사고를 일으키면 누범 등 법률적 단서에 따라서 가중처벌이 될 수 있다.[3] 단순히 사회적 비난을 받게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전과를 근거로 주거나 근로의 제한을 둔다든지 정신병원에 가두는 방식으로 형 집행 이후에도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4] 얼마나 심각하였으면 형사소송법 대원칙이 무죄추정의 원칙, 즉 "열 명의 범죄자를 잡지 못해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는 만들지 않는 것"이겠는가? 이 원칙조차도 근대 이후에서야 확립되었으니 유죄추정의 원칙이 형사사법의 주류였던 전근대에 사법 살인이 얼마나 흔했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5] 이마저도 이해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부연 설명을 달아놓자면 네이버 카페나 커뮤니티만 보더라도 관리진이 규정을 악용하여 관리진의 눈엣가시인 회원들을 영구탈퇴, 영구차단시키는 사례도 존재하며, 학교나 회사에서도 규정을 악용하거나 증거, 증인을 조작하여 퇴학, 해고 시키거나 공개 고로시나 조리돌림을 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이런 추잡스러운 행동을 사법부가 주도적으로 한다고 보면 된다.[6] 이조차도 불법적인 방식으로 증거를 확보한 것인지 강요와 협박에 의해 자백한 것인지는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닌 이상 모를 수밖에 없다. 관련 인물과의 CCTV가 범죄혐의의 증거로 제출이 되었는데 CCTV가 사실은 없는 자료였고 혐의를 진실로 꾸미기 위한 딥페이크일 수도 있는 것이고 서면의 경우도 PDF 편집기를 통하여 조작된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지문조차도 위조하는 케이스도 있다. 또한 위변조를 적극적으로 하는 경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나 주장들을 일부로 없애거나 다른 문서로 변경하여 유죄판결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입증책임의 일반원칙에 따라 파쇄의 경우 본인이 법원에 이러한 서류를 제출했었다는 증거를, 서류가 변경된 경우엔 해당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고 사법부에 의해 바꿔치기 되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이는 증명하는 쪽이 더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7] 기록에 대한 법률적인 지식 및 해석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기록을 하나하나 확인해보고 대조해보지 않는다면 흠결을 발견하기가 어렵다.[8] 일례로 커뮤니티 유저나 대중들은 사건사고가 터지면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증거를 내놓으라고 이야기를 하며 집단지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국평오개돼지이기 때문에 법률적인 지식이나 수사기관 내부자나 관련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재판까지 이뤄진 복잡한 사안에 대하여 하나하나 반박하며 반박할만한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심각한 경우 뇌피셜2차 가해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제일 심각한 문제는 남의 일에 관심이 없고 그저 남의 비극을 하나의 유흥이나 조리돌림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타블로가 대표적으로 증명을 해도 안 믿은 케이스였다. 차라리 대중들에게 읍소하고 하소연할 시간에 돈이나 더 벌어서 변호사를 찾아가는 것이 이득이다.[9] 정적이나 정적의 유가족들이 유죄의 증거를 위조하고,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장기적으로 전쟁할 능력이나 금전적 능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부족함을 믿고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이다. 보통 아무런 권한없는 개인이 위조된 증거를 증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조된 증거에 대한 접근조차 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찌저찌 위조된 증거에 접근하여서 증거가 위조된 사실을 증명하였다고 하더라도 공소시효나 소멸시효 문제가 발목을 잡게된다. 결국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피해자의 발목을 잡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것이다.[10] 조선처럼 연좌제가 법률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만연한 경우가 있다.[11] 물론 진실 규명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처벌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12] 그 예시로 더불어민주당이해찬 의원은 인민혁명당 사건의 영향으로 사법살인이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국은 1950년 티모시 에반스라는 남성에게 경찰이 가족 살해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시킨 사건이 후에 진범이 밝혀지자 사형제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1965년에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했다.[13] 예시로 적도 기니는 2010년 망명자 4명을 납치해 대통령 암살 미수 혐의를 뒤집어씌워 형 확정 1시간 만에 모조리 사형시킨 일이 국제적으로 보도되어 비난을 받자 2014년 1월 말 살인범 4명을 사형한 것을 마지막으로 사형을 전혀 집행하지 않다가 2022년 9월 19일 아예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했다.[14] 당장에 상술한 밀라다 호라코바의 처형 당시에 윈스턴 처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장폴 사르트르를 위시한 세계적인 명사들이 항의한 것과 인민혁명당 사건 당시에 국제사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한국은 야만국' '사법 역사상 최악이자 암흑의 날'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에 기인하고, 물론 두 사건 모두 가해 주체인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박정희 정권의 가장 대표적인 악행으로 간주된다.[15] 특히 후자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자들과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전두환(삼청교육대 항목 참조) 등이 즐겨 쓰던 방법이다.[16] 한국에서의 조봉암 처형과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사형은 불발되었다), 북한에서의 박헌영, 장성택 처형을 생각하면 된다.[17] 애초에 대숙청 자체가 사법살인의 정의에 완벽히 부합한다.[18] 체코슬로바키아와 구 동독, 헝가리[19] 이란 혁명 이후의 이란, 압델 파타 엘 시시가 집권 중인 이집트, 빈 살만이 집권 중인 사우디아라비아[20] 당시 은전군은 무고했기에 이 당시의 왕인 정조는 사형을 반대했지만 역모와 관련되어서 죽여야 한다는 대신들의 압력을 못이기고 결국 사형에 처했기에 대신들의 책임이 크다.[21] 백범 김구 암살 사건도 사법살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애초에 '사법살인'에 대한 개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김구 암살 사건은 총기를 사용한 암살이라 애초에 완전한 불법인 초법적 살인이고, 형식상으로나마 합법적 재판의 권위를 이용하는 사법살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직접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가 끝까지 배후가 있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죽어서, 이승만이 배후라고 확신할만한 근거도 없다.[22] 18년 동안 8건의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켜 총합 20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그 중 8명이 바로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다.[23] 전두환 시기 사법살인 건수는 5건, 피해자 수도 7명에 달하는데, 이들 중 3명이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다. 다만 박정희 시기 사법살인이 정적 탄압이 목적이었던 것과 달리 전두환 시기 사법살인은 성과 쌓기가 목적이었던 감이 있기에 인지도는 다소 떨어진다.[24] 경위는 이렇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얻고 싶어서 처음에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지만 이스라엘에서 땅이란 하느님이 내려주신 것이라 쉽게 바꾸거나 사고팔지 않았기에 나봇이 거절했고 이 때문에 사법살인으로 땅을 빼앗은 것.[25] 엄밀히 말하면 아합이 직접 한 건 아니고 아합은 그냥 나봇의 포도원을 먹고 싶어서 끙끙댔을 뿐이고 그 모습을 본 아내인 이제벨이 저런 모략을 꾸민 것이다. 이 때에 야훼는 엄청나게 분노해서 엘리야를 보내 오므리 왕조의 멸망 선언을 하는데 이를 들은 아합이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자 멸망을 한 대(代) 늦춰주었다. 다만 이 일에 대한 앙금이 남았는지 후일 오므리 왕조가 예후에게 몰살당할 때 예후는 죽은 여호람 왕의 시체를 나봇의 포도원에 던지고 야훼가 시킨 일이라고 했다고.[26]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걷어내고 보면 빌라도의 행적은 로마인을 쉴드치기 위한 윤색이라는 가설이 근거를 얻고 있다.[27] 시아파에 우호적인 성직자로 2016년 처형되었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2016년경 단교를 했다가 2023년 들어서야 재수교했다. 정작 이란 역시 후술하듯 수많은 이들을 사법살인으로 죽였기에 내로남불에 불과하다.[28] 참고로 처형된 사람들 외에도 심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만 46명에 달한다.[29] 이 문서에 언급된 이란의 사법살인 사건들 중 대부분이 알리 하메네이 시기 사건들인 것과 달리, 이 사건만큼은 아야톨라 호메이니 시기(정확히는 집권 직후)에 벌어진 사건이다.[30]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것 때문에 고문을 하여 누명을 씌워 사형을 시켜버린 사법살인이다.[31] 정부의 국가폭력을 폭로한 언론인에게 부패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도 모자라 외국으로 망명을 가자 납치하여 끌고 오고는 재판에 넘겨 사형이 확정된 지 단 4일 만에 사형을 시켜버린 최악의 사법살인이다. 심지어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이 사법살인에 대해 '반체제 언론인 사형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외국의 비난을 내정간섭이라고 하는 뻔뻔함까지 드러냈다. #[32] 영국과 내통한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지만 나중에 무고하며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3] 테오도시우스 대제와는 동명이인이다.[34] 정확하게 말하면, 메리 1세제인 그레이가 직접적으로 반란 음모에 가담한 증거가 없는데다, 처형 당시의 나이가 15세 밖에 안됐을 만큼 너무 어려서 오히려 그녀를 구명해주려고 했다. 허나, 이런 시도가 여왕의 권력에 타격이 갈 것을 우려한 잉글랜드 의회와 조정 대신들이 제인 그레이에 대한 구명을 결사반대하면서, 그대로 그녀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35] Timothy Evans, 1924~1950. 1949년에 경찰의 부실한 수사로 자신의 아내와 13개월 딸을 살해한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경찰이 조작한 자백을 바탕으로 1950년 1월 11일에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재판 과정도 막장이라 단 3일 동안만 진행된 데다가 판결은 단 40분 만에 내려졌고 주요 증거 대부분이 배심원단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약 2개월 뒤인 3월 9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53년에 에반스의 아파트 이웃이자 10년간 8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존 크리스티(John Christie, 1899~1953)가 자신이 에반스가 저질렀다는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면서 경찰은 재조사에 착수했고, 결국 크리스티가 에반스 모녀 살해 사건의 진범임이 입증되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사형제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게 되었고, 결국 영국은 1965년에 아예 사형제를 폐지해야만 했지만, 에반스는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무려 16년 뒤인 1966년 10월에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36] 슈타지 간부 출신으로 탈동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구 동독 마지막 사형수가 됨 훗날 무죄 판결 받음, 그 이전 정치적 사법살인들은 통독 후 죄다 무죄 처리되었다.[37] 정확히는 소련 정부와 카다르 야노시의 합작품이다. 참고로 카다르 야노시가 1956년 헝가리 혁명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5년간 사법살인한 사람만 무려 277명에 달한다.[38] 그가 집권한 단 5년 동안 사법살인의 희생양이 된 정치범만 무려 190명에 달한다.[39] 다만 남편 쪽은 후에 진짜 간첩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으나, 이 사실은 사형 집행으로부터 40여년 뒤에 밝혀진 것이기에 사형 집행 시점에서는 이들이 유죄란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위배되기에 무리한 사형 집행을 한 것만큼은 비판받아 마땅하다.[40] Diallo Telli, 1925~1977.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의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체포 당시 현직 법무부 장관이면서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유능한 인재였다.[41] 사실 그가 속해있던 부족 풀라니족이 그의 체포 한 달 전에 투레 암살 음모를 꾸민 것이 적발된 바가 있다.[42] 거의 완전히 밀폐된 콘크리트 감방에 사람을 가둔 후 아무런 음식은커녕 물조차 주지 않은 채 굶겨 죽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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