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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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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D400> 민무회
閔無悔
본관 여흥 민씨
생몰년 생년 미상 ~ 1416년(태종 16년) 1월 13일
가족 아버지: 민제
누나: 원경왕후
형: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본관은 여흥(驪興). 민제(閔霽)의 아들이자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4형제 중에는 막내이다.

2. 생애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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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 민제의 아들이며 태종원경왕후의 동생으로 세종대왕외삼촌.

원경왕후의 힘을 얻어 지돈녕부사까지 승진하는 등 외척으로써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방해가 되는 권신들을 숙청하던 태종 입장에서는 가장 꺼렸던 자들이 바로 외척들인 민씨 집안. 결국 태종이 양위 파동으로 인해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두 형 민무질, 민무구가 사사당한다.

두 형이 죽고난 뒤에 태종의 두 타겟은 남은 두 처남이었는데 이때 세자였으며 원경왕후의 의사에 따라 민씨 집안에서 의탁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던 양녕대군에게 하소연을 했던 것[1]을 두고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고자질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여기에 덧붙여 그들이 유배형에 처해진 지 얼마 안 돼서 태종이 효빈 김씨가 임오년에 경녕군을 낳았을 당시에 원경왕후에게 학대당한 일[2]도 밝히면서 더욱 탄핵을 당해 형 민무휼과 본인도 형들이 겪은 것처럼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그곳에서 교수형으로 죽는다.[3]

민씨 4형제의 숙청 과정에서 보면 가장 빈틈이 많았던 인물,양녕대군에게 한 말도 그렇고 저 말이 드러난 계기도 노비소송에서 패한 염치용이라는 자가 민무회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면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소송 대상이 국가, 즉 왕이었다는 것, 거기다가 그 과정에서 태종의 후궁과 정승인 하륜이 뇌물을 받았다고 하며 심지어 준 사람은 그 노비다. 거기다가 이 말 자체가 거짓말인건 덤 그러니까 염치용은 없는 말을 지어내서 민무회에게 말했는데 민무회는 또 거기에 낚여서 충녕대군에게 충녕대군은 다시 태종에게 보고한 것이다. 졸지에 태종은 노비 뇌물에 판결을 내린 꼴이 되었고 때문에 민무회를 잡아들이고 일이 시작되었다.[4]

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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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당시의 발언을 보면 해석에 따라 위험해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물론 양녕대군이 먼저 그들의 형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죽은 것은 당연했다고 했지만,[16] 세자에게 '세자는 우리 가문에서 자라지 않으셨습니까?'라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다만 이 말을 한 것은 민무휼의 동생인 민무회였고, 민무휼은 동생에게서 그 말을 듣자 그 자리를 뜬 양녕대군을 쫓아가서 그 말을 잊어달라 말한 게 전부인지라 약간 억울한 면이 없잖아 있다.[2] 태종 15년 12월 15일 무인 1번째기사[3] 사돈심온도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숙청된다.[4] 그래도 이 때는 죽이네 마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양녕대군이 저런 말을 꺼내자 분위기가 죽여버려야 한다로 바뀐다. 저건 아예 세자를 겁박한 것이기에 뭔 변명을 해도 봐줄 수 없는 죄다.[5] 태조 왕건의 김언, 대조영의 손만영 등으로 알려진 배우다.[6] 형들이 사사된 뒤에도 군부에서 고위직은 아니지만 관직을 역임했는데 태종이 신료와 종친들 모두를 동원한 소집 훈련을 실시했을 때 차질없게 잘 준비해 대신들에게 칭찬을 들었다.[7] 실제 역사에서 양녕대군은 이들을 아주 매몰차게 대했으며 죽을 때도 "그래도 싸다"고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8] 이 임무를 위해 최 내관은 자기 손이 닿은 상궁 내관들을 중궁전에 집어넣어 중전 민씨의 행적까지 감시했다.[9] 이들이 내뱉은 "좋은 날"이란 특정한 의미없이 그저 암울한 날이 끝날 것이라는 의미에 불과했지만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민무구의 유언을 그 때까지 기억하고 있던 뒤끝 쩌는 태종은 가슴의 한을 품은 자들의 역적 모의로 받아들였다.[10] 이 사실을 안 양녕대군은 최 내관에게 발길질을 하며 "언젠간 죄값을 치를 것"이라며 일갈한다. 원래부터 프락치인 최 내관과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 때만큼 험악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11] 이 때 국문 과정이 정말 모질고 잔인한데 고문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용의 눈물>에서도 거의 최고급으로 고문을 당한다. 주리틀기는 물론이며 인두형, 고문 중의 최악이라는 압슬형까지 안 당하는 고문이 없다. 매형이라는 사람한테 남보다 심지어 정적들보다 더 심한 고통을 당한 것. 이들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은 사람은 후에 심온 집안 사람들 정도인데 심온 집안도 압슬형까지 당하는 묘사는 없다.[12] 고문이 끝나고 유배 조치되어 말을 태워서 도성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민무회가 "웬일로 전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민무휼은 "너 지금 뒤에 의금부 관리가 들고오는 짐짝 못 봤니? 우리는 글렀어..."라고 답하고 이에 민무회는 충격을 받고 어두운 허공을 응시하는 장면이 백미이다.[13] 이 때 형들과 마찬가지로 내금위장 정만쇠가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으며 교수형과 사약 중 하나를 친절히 양자택일하게 되는데 형들과는 달리 교수형을 선택하고 도성 뒷산의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는다. 이 때 정만쇠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으며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14] 용의 눈물에서는 민무휼의 장인 이직 역으로 나왔다. 시대 역행[15] 이때 뒤에서 민무회에게 “왜 그런 정신 나간 발언을 했냐?”라고 하는 표정을 지은 것이 압권이다.